2. 무소유의 참뜻

지난번에는 ‘무소유’를 간추린 ‘소유한다는 것은’을 보며 이야기 나눴다. 이번에는 무소유를 넓고 깊이 새겨 품으려는 마음으로 <무소유>를 펼친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세상 적에서 사라져 갈 때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서 물건을 가지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인다. 그러니까 무엇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물건 대한 인식 전환 필요
마음 나누기가 진짜 행복

스승은 이 말씀에 이어 아끼던 난초를 햇볕에 놔두고 나들이했다가 뒤늦게 생각이 나서 허둥지둥 돌아와 축 늘어진 난에 샘물을 길어다 주어 살렸다고 말씀한다. 또 안거를 마치고도 나그넷길(만행)을 떠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난을 보살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겠다고 다지며 벗에게 난을 안겨 보냈다는 이야기 끝에 이런 말씀을 나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제 몫을 더 많이 챙기려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사람마저 가지려 들다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괴롭히거나 죽이고 마는 소유사, 산업사회 이후 소유역사를 다른 말로 바꾸면 소비역사다. 우리는 ‘소비가 미덕’이라고 부추기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살고 있다. 쓰지 않고서 살 수 없는 우리는 소비를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를 넘어서서 물건 아까운 줄 모른다데 있다. 필기구를 비롯해 웬만한 물건들은 다 일회용이다.

요즘 사람들 머리에는 물건을 거듭 쓴다고 하는 생각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제정신도 갖지 못하고 헤맨다는 스승 뜻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덜 쓰고 덜 버리기’에 고스란하다.

“우리 선인들은 밥알 하나 버리지 않고 끔찍이 여기며 음덕을 쌓았는데, 그 후손인 우리는 과소비로 음덕은 그만두고 복 감할 짓만 되풀이하고 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지나친 소비와 포식이 인간을 병들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흔히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영혼을 지닌 인간이 한낱 물건 소비자로 전락한 것이다. 소비자란 인간을 얼마나 모독하는 말인가. 사람이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니, 소비자가 어찌 왕일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스님이 글을 즐겨 쓰는 스승에게 끝이 날카로운 만년필을 드렸다. 스승은 원고지에 닿을 때 사각거림이 좋아 한껏 누렸다. 그러다가 어느 해 유럽 여행길 만년필 가게에서 똑같은 만년필을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하나를 더 샀다. 두 개를 가지고 나니 그만, 하나였을 때 가졌던 살뜰함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차!’ 싶은 스승은 새로 산 만년필을 얼른 다른 사람에게 준다. 그랬더니 사라졌던 소중함이 되살아났다고 했다. 말씀을 가볍게 마치고 마셨으나 이 말씀 안에는 마구 쓰레기를 만드는 소비자가 되지 않아야 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물건을 쓰지 않을 도리는 없다. 물건을 쓰면서도 소비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무엇이든 쓰고 버리는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말고 나와 함께 삶을 가꾸어가는 식구라고 여겨야 한다. 몸이 아플 때 치료하며 살아가듯이 세간살이를 비롯한 연장 따위가 망가지면 고쳐가며 거듭 살려 써야 한다는 말이다. 이밖에 깊은 뜻이 하나 더 있는데 한 자루가 글을 쓰면서 제구실을 하고 있을 때 나머지 한 자루는 쓸모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에는 둘 다 제구실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 소복하다. 남는 만년필을 다른 분에게 드렸다는 것은 곧 그 만년필에 숨을 불어 넣어 살렸다는 뜻이다. 곁에서 나와 더불어 내 살림에 힘을 보태 주고 있는 이라면 그것이 연장이든 사람이든 오래도록 가까이해야 참답다는 말씀이다. 삶이 죽음에 맞서는 말이듯이 살림은 죽임에 맞선 말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거듭 돌려써야지 쌓아두어서는 안 된다. 돈을 쌓아두는 일은 돈이 돈 노릇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죽이는 일이다. 발이 묶여 제구실하지 못하는 돈들이 엉뚱한 데 힘을 쓰면서 생겨서는 안 될 일들을 벌이고 있다. 투기자금이 되어 떠돌아다니며 갓물주를 만들고 갑과 을을 갈라 세워 여리고 서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어떤 것이든 쓰기 시작하면 감가상각이라고 해서 거침없이 값이 내려가는 데 오직 돈만은 은행에 묵혀놔도 보관료는커녕 도리어 이자가 붙고, 주식을 사는 사람만이 기업 임자란다. 어째서 그런지 그것이 맞는 것인지 거듭 물어야 한다. 불교는 마땅하다고 여겨오는 모든 것에 물음을 던지는 종교다.

돈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흔히 돈 없이는 사람 구실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참으로 그럴까. 돈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바꿔쓰는 수단일 뿐이다. 오래도록 머슴을 부리다 보면 머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말 듯이, 교환가치밖에 없는 돈에 매이다 보니 돈 없이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고 받아들일 뿐이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부처님이 복을 지으려면 이웃과 나눠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서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보시다시피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밖에 없어 사람 구실 하기 어렵다고 맞받는다. 부처님은 가진 것이 몸뿐 일지라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일곱 가지나 있다며 빙그레 웃으신다.

첫째, 눈길 나눔- 따뜻한 눈길을 나누고 좋은 점 보기. 둘째, 낯빛 나눔- 웃음을 머금으며 부드러운 낯빛 나누기. 셋째, 말씨 나눔- 힘 돋우는 말과 사랑 어린 말씀 나누기. 넷째, 몸짓 나눔-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일손 거들기. 다섯째, 맘씨 나눔- 마음을 쏟아 이웃을 정성껏 맞이하기. 여섯째, 자리 나눔- 지친 이에게 앉을 자리 내어주기. 일곱째, 살펴 나눔- 말하지 않아도 이웃 속내 헤아려 보듬어 쉼터가 없는 이에게는 다리 뻗고 쉬도록 해주거나 한뎃잠 자지 않도록 옆자리 내어주기가 일곱 가지 보시다. 마음만 나눠도 넉넉하다는 이야기다. 마음 나누기는 거듭해도 마르지 않는다. 좋은 마음은 내어주면 줄수록 더욱 솟는다. ‘없이’ 샘솟아 거듭나는 것이야말로 ‘텅 빈 충만’이다.

우리가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쓰거나 나눌 수 있을 뿐 무엇 하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건물을 사서 세를 놓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건물을 살리는 사람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다. 건물 처지에서 봤을 때 내 품에 사는 이와 내 임자라고 하지만 내 품에서 벗어나 있는 이와 누가 더 가까울까. 우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만 가질 수 없다. 써야 할 때 쓸 수 있을 뿐이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래서 윤구병 선생은 무소유는 공동소유를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하면서 나눔과 섬김 바탕에 무소유가 있다고 말씀했다. 쓸 수 있을 뿐 가질 수는 없다는 말씀으로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지라도 쓰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내줘야 한다는 말씀이다.

남에게 내어줄 수 없을 만큼 아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고 받아들이면 그것을 지키는 데 힘을 쏟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스승은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라고 말씀한다.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누릴 수 있다’란 말씀이다. 스승은 “가진 것을 버리고 스스로 얽매임에서 벗어나 한껏 누려라. 사람이 참으로 바라는 것은 넉넉하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누리는 것”이라고 거듭 흔드셨다.

해와 달, 바람과 공기, 강과 바다, 산과 들 따위 자연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내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이는 없으나 누구나 모시고 받들 수 있다. 애인이나 부부, 어버이와 아이, 벗과 벗 사이도 다를 바 없다. 그저 서로 아낄 수 있을 뿐, 누가 누구 것이 될 수는 없다. 예수님과 부처님을 마음 놓고 우러르며 사랑할 수 있듯이 다른 사람도 내 곁에 있는 아내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으며 내가 모시는 스승을 우러를 수 있다. 아내든 아이든 아름다운 자연 바람과 빛이든 사랑은 모두 그때 그 모습이 좋아서 그렇게 어울리며 아낄 뿐이다. 어울리며 어깨동무하여 우리를 이룬다. 우리란 너와 나는 둘이지만 서로 떨어질 수 없이 깊이 사랑하는 사이를 가리키는 결 고운 말씀이다.

욕심은 부리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스승이 무소유에 가려 담은 참뜻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이웃과 어울려 누리려는 데 있다. 너나들이 어울려 누리는 사이가 바로 우리 사이요 우리가 어우렁더우렁 넘실거리는 품이 울타리다. 어깨동무하고 강강술래 하는 사이에 살림이 오롯하다.

무소유는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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