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으면 정신적으로 한 차원 올라서는 작업을 해야

어떻게 맡겨 놓아야 하는 건지요

질문 인터넷 동영상에서 대행 스님의 법문을 듣다가 마음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자기 주인공에 믿고 맡겨 놓으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맡겨 놓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우리가 마음을 내기 이전은 바로 불성이라고 불가에선 하는데, 영원한 자기의 생명의 근본이다 이겁니다, 그게. 그래서 심봉과도 같다. 그래서 그거하고 내 현재 의식하고 계합이 된다면 50% 50%, 100%가 돼서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 찰나 생활을 그냥 할 수 있다 이겁니다.

물이 그럴 겁니다, 아마.
“나는 어떠한 게 막혀도
그냥 이렇게 돌아서 내려가니까 아무 지장이 없는데
사람들은 막히면 뚫고 나가려고 애쓰니까 더 막히는 거지.”

우리가 지금 고정된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만나는 거, 또 말하는 거, 엄마 만날 때는 자식이 되고 또 친구 만날 땐 친구가 되고, 동생 만날 땐 언니가 되고, 만약에 시집을 갔다면 남편 만났을 땐 아내가 되고, 자식 만날 땐 엄마가 되죠? 금방금방 그렇게 돌아가죠? 이게 찰나 생활이에요. 찰나찰나 돌아갑니다.

그게 금방 자동적으로 엄마를 만나면 딸의 행동을 하고, 남편이 들어오면 금방 “여보!” 그러곤 그냥 아주 자동적으로 아내 노릇을 하죠. 그러니깐 이 세상은 그렇게 묘하고 자동적인 겁니다. 우리가 그 컴퓨터 시스템을 해 놓고 거기 입력을 해 놓으면 자동적으로 버튼만 누르면 돌아가죠? 나오고. 그래서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것마다 입력을 해 놓으면 앞서 건 없어지면서, 현실에 입력이 되는 게 들어가면서 자꾸자꾸 현실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즐겁고 고맙지 않습니까. 그렇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어찌 그렇게 고달프게만 사는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제 집을 은행에다 잡혔는데 그게 그만 돈을 못 갖다 줘서 넘어가게 생겼대요. 그래서 울고불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공부하기 전에는 그래도 자꾸 도와주면서 공부를 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인제 알았다고 그랬는데 “한 열흘만 있으면 돈을 이렇게 좀 꿀 데가 있는데, 그게 나오면은 꼭 그걸 갚고선 그 집을 찾아야 할 텐데, 이제 우리 식구는 다 죽습니다.” 이럭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어요. “지금 당신 주인공이 바로 컴퓨터와 같다. 그러니 그것이 전자의 그 인과로 인해서 업보가 돼서 지금 이렇게 나온 거니깐, 이렇게 어렵게 나온 거니깐 거기다가 ‘네가 한 거니깐 그걸 해결을 해 주는 것도, 증명을 해 주는 것도 너밖엔 없다.’ 해결을 해야 증명을 하는 거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깐 “‘증명을 해 다오. 이게 되는 게 증명이다.’ 그러고 거기다가 맡겨 놔라. 죽으면 죽고 살면 살지 뭐,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그랬어요.

그랬더니 영 은행에서 그걸 넘기질 못하는 거예요. 왜 넘기질 못하는가 했더니 서류가 없어졌대요, 은행에서. 그래 가지고 그걸 경매로 넘기질 못하고 있다가 이 사람네가 돈을 해 가지고 가니깐 그게 서랍 그 위 천장 있죠? 그 서류가 천장에 붙었다가 뚝 떨어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돈을 갚고 집이 넘어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 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할 게 아니라, 내 자성신은 체가 없기 때문에 만 개도 될 수 있고 천만 개도 되고 십만 개도 될 수 있는 거거든요, 내 분신이. 납득 안 가죠? 옛날에 손오공 같은 거 보면 그 손오공이 똑같은 게 많이 이렇게 나오죠? 또 무술을 하는데 칼을 착 들고 이렇게 돌리니깐 칼이 수만 개가 되죠. 그와 같은 겁니다. 그게 대일승법이에요. 그러니깐 이 자체가 말로 해서 가르치고 이렇게, 이론을 가르치고 지식으로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건.

이거는 가난하고 가난치 않고 배운 사람이고 배우지 않은 사람이고 다 할 수 있는 공부예요. 근데 머릿속에 많이 들어가고 많이 배운 사람은 자기를 자기가 믿지 않아요.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거죠, 이건. 그래서 믿지 않는 겁니다. 자긴 힘이 없다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힘이 없다는 것이 입력이 되거든요. 그러니 뭘 합니까? 나오긴 뭐가 나옵니까? 힘이 없는 걸로 나올 수밖에요. 안 되는 걸로 나오는 거죠. 컴퓨터가 정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컴퓨터는 사람이 입력을 해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 생각에 의해서 입력이 되는 거죠, 그냥. 이건 자동적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감사함을 느끼며 살고 싶어요

질문 스님들께서 늘 일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거 보면 참선 공부하는 데도 그런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부러 생각을 할 때는 막연하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게 되지만 그것도 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새 생활에 빠져 잊고 살게 됩니다. 올 새해에는 매사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고 싶은데 막연하게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확실하게 느껴 보고 싶습니다. 도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이걸 똑바로 아셔야 됩니다. 생활을 떠나서는 참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 법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선을 한다, 와선이다 입선이다 행선이다 이 모두가 앉으나 서나 생활이 그냥 참선이기 때문에 그걸 한데 합쳐서 참선이라고 그런 겁니다. 그러니 앉아도 여러분이 앉은 것이고, 선 것도 여러분이 선 것이고, 눕는 것도 여러분이 눕는 것이고, 똥 누는 것도 여러분이 똥 누고, 먹는 것도 여러분이 먹고, 자는 것도 여러분이 자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아니라면 부처는 없죠. 아니 부처만 없는 게 아니죠. 세상도 없고 가정도 없고 형제도 없고 부모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참선이라고 그러는 거는 이론이나 학설, 말을 잘해서 연구를 잘하고 또 교리를 잘 알아서 체계 있게 한다고 해도 참선이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내가 살면서 실험하고 체험하면서 느끼면서 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마음을 잡고 발견해서 발전시키고 창조력을 기르고 생활이 과학인 줄 알고 그대로 가는 것이 참선입니다. 이 세상에 어린애를 낳는 것도 바로 과학입니다. 벼를 심어서 쌀을 만드는 것도 과학입니다. 그 쌀로 밥을 지어 놓는 것도 과학입니다. 어느 것 하나 과학 아닌 게 없습니다. 어느 거는 과학이고 어느 거는 과학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생활 속에서 물리가 터지려면 이런 것도 좀 알아 두셔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일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왜 스님네들이 허허벌판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그 비를 맞으면서 그냥 풀섶에 그냥 앉아 있고 물이 흘러 내려가는 데 앉아 있기도 하고 천둥 번개가 치고 그러는 데 앉아 있기도 하고 높은 산골짜기에 앉아 있기도 하는 줄 아십니까?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감사한 줄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오늘 아침에도 쇳송을 했지만 ‘오종대은(五種大恩)을 알라, 일체제불과 더불어 일체 생명 전체에 감사할 줄 알라’ 이 소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을 내지 않고 지금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도 감사한 줄 알아야 됩니다. 지·수·화·풍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줄 알고 이 세상 풀 한 포기도 감사히 생각할 수 있어야만 된다 이겁니다, 곤충 하나도.

그건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쫓고 쫓기면서 먹히고 먹으면서 이 세상에 거듭거듭 거쳐 나오면서 진화돼서 인간이 제일 나중에 났다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부모가 내 부모요, 어느 자식이 내 자식이라고, 이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거듭거듭 거치면서 짐승의 부모도 됐다가 짐승의 자식도 됐다가, 곤충의 부모도 됐다가 곤충의 자식도 됐다가, 또 딴 부모의 자식이 됐다가 딴 부모가 되고…. 거듭거듭 구름이 한데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 딴 구름하고 모이고 흩어지고 또 모이고 이렇게 하는 것과 우리 인생살이가 같습니다. 그러니 남의 부모만 남의 부모고 내 부모만 내 부모라고 할 수 없는 그 도리가 바로 이 진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오종대은을 아는 사람, 그 모두 둘이 아닌 줄을 아는 사람은 보살의 행을 할 수가 있다. 모든 데 착을 두지 않고 사랑할 줄 알고….

이 돈이고 흙이고 돌이고 생명 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돌아가지 않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도 돌아가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다 돌아가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를 가지고 이거 끊어질까 봐 붙들고는 얽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것이 옳다고 하면서 타의에서 구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진실되지 못합니다. 진실되게 믿으면서 진실되게 구하고 진실된 나를…, 참나를 구하는 소식을 그때서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살아 보시지마는 어떠한 경험을 얻는다 하더라도 피나는 노력이 아니라면 할 수 있겠습니까?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이 뛰어넘을 수 있는 겁니다. 기술도 그렇고 모든 게.

그런데 생활에서 행하면서 그대로 참선이라고 하는데도 그것도 지키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습니까? 허공을 믿습니까, 이름을 믿습니까, 형상을 믿습니까? 모든 거를 잘 살펴서 세 가지가 다 충분해야만 따르라고는 했습니다. 뜻과 말과 행을 따르라고. 믿는 건 자기 자신을 믿는 겁니다. 자기, 즉 수십억 마리를 마음으로 다스려서 한마음으로 묶어 세운다면 바로 주장자입니다, 그게. 그리고 중심입니다. 그 중심이면서도 찰나찰나에 돌아가니까 공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런 풀잎 하나도 감사하고 저 물이 흘러가는 것도 감사하고…. 물이 여러분한테 그렇게 말할 겁니다. “나같이만 살았으면 아무 일 없을 텐데….” 물이 그럴 겁니다, 아마. “나는 어떤 게 막혀도 그냥 이렇게 돌아서 내려가니까 아무 지장이 없는데 사람들은 막히면 뚫고 나가려고 애쓰니깐 더 막히는 거지.” 하고 흉을 볼 겁니다. 또 흙은 흙대로 자기처럼 살라고 합니다. 아무리 파 제끼고 해도 왜 파느냐, 아프다, 어떻다 한마디 없어요. 뒤집건 메꾸건 뭐, 짓밟건….

그래서 모든 것이 나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바로 그렇게 둘로 보지 않는다면 서로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해요. 개가 그냥 서로 싸우는 거 같이 보이죠? 그건 사람들이 들에 부부가 나가면서 서로 장난하고 그러는 거나 똑같은 얘기죠. 사랑하는 소리가 그냥 사람이 볼 땐 싸우는 걸로 봅니다.

그러니까 이 모두를 나같이 알고, 즉 여러분같이 알고 감사히 생각하라. 그 은혜를 생각하라. 국왕의 은혜도 알아야 하고, 국민의 은혜도 알아야 하고, 부모의 은혜도 알아야 하고, 형제의 은혜도 알아야 하고, 모든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 수는 없죠. 혼자 산다면 옷도 입지 말아야 하고 먹을 것도 먹지 말아야 하고, 뭐, 땅도 딛지 말아야 하고 이러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주 만유를 창조해 나가는 인연의 필연적인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큰 것만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 돌아가는 지혜를 찾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진실하게 떼어 나간다면 그 안에서 물리가 터지는 기쁨과 고마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절친에게 배신당해 너무 힘들어요

질문 얼마 전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절친에게 배신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절에 다니면서 열심히 관하고 놓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배신감이 너무 커서 너무 힘들어요. 몸이 아픈 것보다 지금 마음은 훨씬 더 괴로운 것 같습니다. 공부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놓지 못하고 있는 제가 부끄럽지만 이 마음이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한 말씀 일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대다수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보다는 육신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디가 조금만 아프거나 그러면 금방 병원에 간다 어디 간다 하면서도 마음으로 문제가 생기거나 고장이 나면 몰라서도 그렇지만 안다 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나중에는 대처를 못 하고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등 동물인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면 좀 더 마음을 계발하고 정신적으로 한 차원 올라서는 작업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면에만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고 온통 야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우선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우면 자연히 편안해지게 돼 있습니다. 아무리 몸을 가꾸고 건강한 듯해도 그건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발전해 나가면 몸은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마음과 우리들의 마음이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신행 상담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어떡하면 장님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나. 그렇게 되진 말아야 할 텐데, 귀가 열리고 눈을 떠서 자유스럽게 길을 걸어야 할 텐데, 그리고 영원히 걸어야 할 텐데, 그리고 나아가서는 어버이로서 길잡이가 되어야 할 텐데….’ 이런 마음으로 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속에는 자생 중생들이 수북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 자생 중생들부터 내 마음으로 다스려서 천백억화신으로 출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고, 관하는 것을 게으르게 하지 말고 모두 한생각을 다스려서 거기 굴려 놓는 데에 목적을 두십시오. 지금 우리가 살다가 죽어서 몸 떨어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업식만,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만 그림자처럼 좇아가서, 이 세상에 어떠한 모습을 타고 난다 하더라도 그 업식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겁니다.

그러니 우리 좀 더 분발해서…, 나는 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돈을 갖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라는 사실을 일러 드릴 뿐입니다. 그 모든 살림살이를 바로 누구가 하고 있나. 내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모든 일체 잘못되고 잘되고는 내 탓이라고 꼭 정정해야 됩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남의 미움을 받거나 남을 원망을 하거나 이렇게 하신다면 그거는 백날 해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보다 다른 신을 믿는 게 편한데

질문 불교는 자신을 믿는 종교인데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다른 신을 믿고 기도하는 게 훨씬 편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한테 맡겨 놓을 수가 있을까요?

답변 맡긴다는 거는…. 진짜로 누굴 지금 믿습니까? 허공을 믿습니까, 형상을 믿습니까? 누구 이름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못 믿죠.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고, 대신 먹어 줄 수 없고, 똥 눠 줄 수 없고. 모든 게 그러니깐 자기 주처에 입력됐던 것을 자기가 다시금 거기다가 맡겨 놓고, 네가 엎드려졌으면 네가 일어나라는 식이에요.

거기다 입력을 해 놓은 거를 없애면 내가 그릇이 비워지면서 아주 내가 밝게 보인다 이겁니다. 부가 자 속에 들어 있고 자 속에 부가 들어 있거든요. 아버지! 자기 전생의 조상이에요, 영원한. 그것이 바로 이름 지어서 컴퓨터라고 하는 겁니다. 부는 어떠한 이런 개체가 아니라 전체에 한데 합쳐진 그 컴퓨터예요. 주처.

즉 말하자면 그거는 맷돌로 맷돌질을 하는데 아래에서 심봉이 꿰어지죠? 위의 거하고 아래 거하고 맞아야 되죠? 그래야 돌아가잖아요. 음과 양이 한데 합쳐져야 어린애도 생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래 위가 한데 맞춰지는 심봉이 바로 힘만 내 주는 겁니다. 그런데 심봉을 꽂지 않고 맷돌을 돌렸기 때문에 그 삶이 입력이 돼 가지고, 그게 인과가 되고 업보가 되는 거죠. 지금도 내가 볼 때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든 가톨릭교든 불교든 전부 바깥에서 구하고 있어요.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부처님이시여, 관세음보살이시여’ 아, 이러곤 해 달라는 거죠.

우리 인간은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제일 나중에 났어요. 왜냐. 미생물에서부터 거쳐 진화해서 쫓기고 쫓으면서 이 인간까지 진화됐기 때문에, 다른 무정물이나 이런 것은 다 먼저 자랐지만, 인간은 진화돼서 오늘에 오는 과정이 수억겁 광년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걸 끌고 온 자기 장본인이 너무나 경험이 많고 너무나 그 힘이 대단한 거거든요, 그 힘이.

그러니까 그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나오는 것을 거기에다가 다시금 맡겨 놓고 거기서밖에는 해결을 못 한다는 믿음을 가질 때, 그런 믿음을 가질 때에 그 앞서 입력이 된 건 지워져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지워지면 그 상태로 나를 밝게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내 몸뚱이에 있는 것도 전부 리드할 수 있고요.

그러니깐 무조건 자기 주처를 믿고 거기다 맡겨 놓고 ‘거기서밖엔 해결 못 한다.’ 또 무슨 일이 잘됐으면 ‘아, 감사하구나.’, 이렇게, 이거를 속으로, 뜻으로 이렇게 믿어야지, 만날 바깥에서 주여, 무슨, 하나님 아버지시여, 관세음보살, 부처님, 지장님, 무슨…. 아이고! 불교고 누구고 다 통틀어서 그 바깥에서 그럭하면 자기 영혼도 못 건져요. 아시겠습니까?

부처님은 누구라도 건져 주시나요

질문 부처님은 누구라도 건져 주시나요? 저처럼 막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중생도 건져 주시나요?

답변 항상 건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하는 건 어느 개별적인 하나를 놓고 “부처님”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 그것을, 즉 말하자면 안팎이 없으면은 그대로 부처예요. 그래서 하는 소립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누구나가, 하다못해 죽여도 살리는 거고 살려도 살리는 거예요, 그냥 모두가.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정성을 지극히 들였는데 그 이튿날 죽어 버렸어요. 아주 가난하고 그래서 깡패로다가 만날 이렇게 해서 그냥 몇 번 들어갔다 나오고 들어갔다 나오고 이랬으니, 그 신분이라는 게 그걸 가지고는 도저히 크게 될 수가 없거든요. 도저히 집어 주려야 집어 줄 수가 없어. 그래서 그만 그 몸이 그 이튿날 죽더라 이 소립니다. 그렇게 깡패 짓을 하고 그랬는데 하루아침에 마음을 뉘우쳐서 어느 스님한테, 그것도 그냥 보통 스님한테 줘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죠, 죽는 것도. 도인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는 사람이 도인이에요. 그 참, 어린애처럼 사는 그 도인한테 줬단 말이에요. 내가 얘기를 하려니까 지금 “도인, 도인”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 자기가 그냥 도둑질을 했든지 어떻게 됐든지 자기가 좀 모아 놓은 거를 몽탕 다, 죽으려고 아예 줘 버렸어요, 그분한테. 내가 잘못한 걸 다 용서해 달라고 다 그냥 마음으로 생각하곤 다 내놨죠. 그러고 개심을 한 거예요. 그런데 턱 그 스님이 보니까 그렇게, 본래는 그렇게 착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다시 돌아선 걸 보곤 그냥 자비를 베푸신 겁니다. 그 이튿날 죽은 거죠. 그랬으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마 여기 정성스럽게 다니는 사람이 정성을 들이고 그 이튿날 죽었으면 “아이구, 죽었다고? 왜 그 절에 그렇게 뭐….”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거기 나갔는데 왜 그 이튿날 죽었느냐? 시주를 이렇게 했는데 왜 죽었느냐?” 그럴 테지요. 그래 죽으니까 시자가 하는 소리가 그랬거든. “스님, 스님. 그 사람은 우리한테 시주를 이렇게 해서 지금 불사를 하게 돼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그 이튿날 죽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예, 이놈아! 이다음에 알 것이니 가만있어라.” 이러고 나서 나중에 자기가 깨치니까 그 도리를 알겠더라 이겁니다. ‘아, 스님께서 그래서 그랬구나. 이 사람은 틀림없이 아무 데 아무 데 거기서 지금 이렇게 성장해 가고 있구나.’ 하는 거를 알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도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고 가는데 여러분이 그 도리를 보지 못하는 거뿐입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걸 보지 못할 뿐이에요. 전구에 불 들어온 것만 보지 전력이 들어오는 건 보이지 않으니까 못 보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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