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차 문화 주체 승려·사원

구산선문 중 하나인 실상산문 실상사. 마조·서당 스님의 법을 이은 승려들이 7개 선문을 세운 만큼 당시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토가 익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차와 선 수행의 융합은 불교문화 발전뿐 아니라 차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차에 밝았던 수행승들이 차를 만드는 법(제다법)과 차를 다리는 방법(탕법)의 변화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는데, 세상에 알려진 명차(名茶)의 대부분이 사찰에서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한··일 차 문화사에서 불교와의 연관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처럼 차 문화를 풍성하게 이끈 자원의 동력을 제공했던 불교계는 무슨 연유로 차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된 것일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는 달마대사다. 그의 좌선 수행법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 수행법의 최대 장애인 수마(睡魔)를 해결하기 위해 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이와 연관하여 설화(說話) 한 편이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달마대사가 면벽 수행 중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을 잘라 던진 것이 차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분명 논리적으로 많은 허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이는 달마대사의 좌선 수행에서 수마(睡魔)는 최대의 걸림돌이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를 응용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국내 도입된 건 6세기 후반
왕실 권위 상징하는 하사품서
9세기 들어 점차 문화로 정착
수행하며 차 마신 수행풍토로
불교계가 문화 확산 주도해

알려진 바와 같이 차는 머리를 맑게 하고 갈증을 해소하며 몸의 기활(氣活)을 원활하게 할 뿐 아니라 소화나 술을 깨게 하는 해독 기능이 탁월한 음료였다. 이런 차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응용했던 건 도가(道家). 이들은 차를 불로초의 일종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초의선사의 동다송에도 술을 깨고 잠을 적게 한다(解礎少眠)”고 말한 바가 있다. 이러한 차의 효과에 대한 인식이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신라에 차가 들어온 시기는 대략 6세기이며 차 문화가 널리 퍼진 것은 9세기 무렵이다. 중국에도 차가 일상생활에 습윤(濕潤)된 것은 당·송대다. ·촉 지역은 차 문화의 발원지인데, 이는 왕포(王褒)동약(墓約)무양에서 차를 사 오게 하였다(武都買膚)”고 한 것이나 서진(西晉)의 정치가 손초(孫楚)강계차는 파·촉에서 나온다(姜桂膚?出巴蜀)”고 한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염무(顧炎武, 1613~1682)일지록(日知錄)에서 차는 진나라 사람들이 촉에서 취한 이후에 비로소 차를 마시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是知自秦人取蜀而後始有茗?之事)”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듯 차는 파·촉 지역이 원산지이지만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도 차를 마시는 풍속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므로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은 남북의 문화교류에 획기적인 물꼬를 터준 계기를 마련하여 당나라의 번성과 운하 건설로 인해 남방의 차 문화가 북방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특히 8세기에 남방의 선종 사찰에서는 보편적으로 차를 마시며 수행하였다. 이런 사찰의 수행 풍토가 북방 지역으로 퍼진 것은 8세기 중반인 개원년간(開元年間, 713~741)이다. 이런 사실은 당대(唐代) 봉연(封演)봉씨견문록(封氏見聞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쪽 사람은 차를 마시길 좋아하지만, 북쪽 사람은 처음에 많이 마시지 않았다. 개원년 간에 태산의 영암사에 강마 스님이 있었는데, 선교를 크게 일으켜 선을 닦으면서 잠을 자지 않는데 힘썼고 또 저녁을 먹지 않고 모두 차를 마시는 것에 의지하였다. 사람들이 품에 (차를) 끼고 도처에서 차를 마셨는데, 이로부터 점점 더 본받아 마침내 풍속이 되었다.(南人好?之 北人初不多? 開元中 太山靈巖寺有降魔師大興禪? 學禪務於不寐 又不夕食皆恃其?茶 人自懷挾到處煮? 從此轉相倣? 逐成風俗)

개원은 당 현종 때의 연호로, 713121일에서 7411222일까지 사용하였다. 당시 태산 영암사의 강마 스님은 남방에서 유행했던 선 수행을 북방에 알렸으며 다른 한편으론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토를 정착시켰다는 것을 나타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에 차가 소개된 것은 6세기 후반으로, 일찍이 백제는 남조(南朝)와의 교류를 통해 양나라의 차 문화를 도입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헌적인 근거는 또렷하지 않다. 다만 고고학계에서 발굴한 유물을 통해 그 개연성을 추정할 뿐이다.

7세기 도당구법승(渡唐求法僧)들에 의해 차가 들어온 흔적은 삼국유사에서 보질태자 형제가 매일 배례하고 이른 아침에 우통수를 길어다 차를 달여서 1만 진신 문수에게 공양하였다(兩太子?禮拜 每日早朝汲于筒水 煎茶供養一萬眞身文殊)”는 내용이나 남산 삼화령의 부처님께 차를 올렸던 충담선사의 고사(古事)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 무렵 수행승들이 들여왔던 차는 당나라에서 만든 차를 수입한 것으로, 차 문화가 널리 확산하지 못한 채 겨우 부처님께 올리는 귀한 공양물이었다. 차 문화가 어느 정도 확산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9세기 이후다. 당시 왕실 귀족층과 관료 문인으로 음다(飮茶)가 확산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여전히 차는 귀한 물품이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사품이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흥덕왕 3(828) 입당사(入唐使) 대렴이 중국에서 차 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入唐廻使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智異山)”고 한 것은 차 문화의 위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인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9세기경엔 차의 필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신라에서 차를 생산할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려면 차에 밝은 계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라 말 도당구법승의 귀국은 차를 잘 아는 전문가를 확보한 셈인 것이다.

특히 수행 중, 음다(飮茶)가 일상화되었던 도당구법승(渡唐求法僧)은 다사(茶事, 차를 만들고 다리는 전반적인 일)에 밝았고 차를 생산할 수 있는 정보와 능력을 갖췄던 전문인이다. 물론 당나라의 신문물인 차를 접할 수 있었던 계층으로는 숙위(宿衛)학생, 사비 유학생 및 사신들, 상인계층이 있었다. 대개 이들은 해로를 통해 당나라로 들어갔다. 9세기경 일본 승려 엔닌(圓仁)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구법승들은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나 절강의 명주(明州)에 도착하여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는데, 신라방은 구법승들의 구법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도당구법승은 당나라로 유학했던 승려들을 말하는데, 이들의 역할론은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여야 하지만 먼저 신라 왕실의 구법승들에 대한 관심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왕실의 불교문화 수용은 적극적이었다. 그러므로 당나라에서 새로운 문물을 익힌 주체자로, 국가 발전에 도움을 줄 지혜를 갖춘 구법승에 대한 대우가 극진했다. 특히 왕이 몸소 구법승을 맞이하고 왕사로 대접하는 등 이들에 대한 대우가 극진했던 것은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신라 왕실의 열망이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뿐 아니라 도당구법은 구법승 개인적인 학구열로 인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교, 정치, 문화적인 발전의 필요에 따른 국가사업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6~8세기 도당구법승들은 천태, 율학, 화엄학, 유식학, 밀교 등 다양한 종파에 관심을 두었다. 원광국사(圓光國師, 555~638),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등은 신라에 돌아와 불교 발전에 이바지한 승려였고, 귀국하지 않은 채 당나라에서 불법을 선양한 원측(圓測, 612~696), 무상(無相, 680~756), 지장(地藏, 695~794) 등과 같은 수행자도 있었다.

대개 이들은 6~8세기경 구법을 통해 신라 불교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승려들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차와 불교의 융합이 초기 단계였고 승단(僧團)의 음다(飮茶) 문화가 아직 단단하게 정착하지는 못했다. 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수행의 토대를 구축한 건 9세기 무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차 문화 유입과 직접 관련이 있는 구법승은 선불교에 영향을 받은 수행승인 것이다. 특히 혜능선사(慧能禪師, 638~713)가 개창한 남선종에 영향을 받은 구법승들이 차 문화 유입에 적극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나말여초(羅末麗初)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새로 세웠던 구법승 중에 7선문이 마조(馬祖, 709~788)와 서당(西堂, 735~814)에게 법을 받은 승려들이다. 이들은 수행 중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토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귀국 후 이들은 차 문화를 확산한 구심점으로써 차 문화를 주도한 그룹으로 부상된 것이다.

고려가 건국된 후, 차 문화는 사원과 승려들은 차 문화를 이끌 명분과 기반, 그리고 실력을 갖춘 것이다. 고려시대가 차 문화의 융성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힘은 이렇게 자라나고 있었다. 더구나 사원의 풍부한 경제력도 차 문화를 아름답게 꽃피운 요인이었다.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