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寶流轉] 1. 흥천사 동종, 어디로 갔을까
[聖寶流轉] 1. 흥천사 동종, 어디로 갔을까
  • 이상근/ 불광출판사 편집주간
  • 승인 2020.01.1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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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부침 속 떠돈 흥천사 세 동종

신덕왕후 능침사찰이던 흥천사
연산군·중종代 화마로 사라져
사찰 전소되며 동종 역시 수난

‘동대문 등 거쳐 덕수궁 안착’은
동종이 하나라는 착각서 비롯돼
본래 동종은 3개… 첫 동종 묘연
박물관 야외전시장·수장고 아닌
본래 자리인 흥천사로 돌아와야
흥천사의 주불전인 극락보전. 1854년(철종 4)에 세워졌다. 문창살의 포도와 다람쥐 문양 등은 당시 사찰 건축의 유행을 잘 반영하고 있다.
흥천사의 주불전인 극락보전. 1854년(철종 4)에 세워졌다. 문창살의 포도와 다람쥐 문양 등은 당시 사찰 건축의 유행을 잘 반영하고 있다.

조선 초기 사대문 세 사찰
절은 이름만으로 내력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흥(興)’ 이나 ‘봉(奉)’이 들어간 사찰은 대부분 왕실과 관련이 있다. 조선 초 사대문 안에 있었던 세 개의 사찰 이름은 모두 흥(興) 자를 첫 글자로 사용했다.

물론 나중에 원각사가 된 흥복사(興福寺)는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사찰이었지만 조선 개국 후 최초로 사대문 안에 지어진 흥천사(興天寺)는 조선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덕왕후의 능 옆에 세워진 능침사(陵寢寺)였고, 지금의 혜화동 자락에 있던 흥덕사(興德寺)는 태조 이성계가 태상왕이 된 뒤 자신의 사가를 사찰로 만든 경우다.

태조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세조에 의해 중창되었던 조선 초 사대문 안 3대 사찰은 때로는 호불(세종, 세조) 왕들에 의해 때로는 선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이유(문종, 예종, 성종)로 번창하거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연산군 때 세 사찰 모두 사달이 나고 만다. 1년 사이 화재로 모두 소실된 것이다. 화재 당시에는 특이한 기록이 없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종실록〉에 사실 고백이 있다. 흥천사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사리각에 화재가 발생하자 이전 유생들의 행패가 드러난 것이다. 흥천사 사리각 방화 조사결과 유생이 불을 지른 것이 밝혀지자 중종이 이들의 강력한 처벌을 지시한다. 하지만 신하들이 발 벗고 나서 유생들의 구명에 나선다. 이때 중종이 ‘폐조(연산군) 때 흥천사와 원각사에 불을 지르더니 이제 또 반복되었다. 처벌을 면해 줄 수 없다’며 강력한 처벌을 지시한 것이다. 

여하튼 조선의 3대 사찰은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원각사는 연산군의 유흥을 위해 흥청으로 변했고, 흥복사는 조선 중기 이후 세도가(송시열 등)의 사저로, 흥천사는 월산대군 일가의 집터 자리로 변했다.

숭유억불 시대, 흥천사의 고난
이중에 실록에 그 기록이 다시 등장한 건 흥천사다.

흥천사는 조선의 첫 번째 왕비 신덕왕후의 능 옆에 있던 사찰이다. 신덕왕후 강 씨는 비록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었지만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가 조선 건국 전에 사망하자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른다. 물론 살아 있었어도 이런 사실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신덕왕후 강 씨는 정도전, 이방원과 함께 조선 건국의 3대 조력자로 일컬어질 만큼 안팎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몽주를 때려죽인 이방원을 앞에 두고 이성계가 노발대발하자 이방원이 강 씨를 보며 “어머니는 왜 모른 척 가만히만 계십니까”라고 큰소리 쳤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몽주 타살 배후에 강 씨도 있었다는 방증이다.

정릉은 현재 덕수궁과 담을 맞대고 있는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이어 능의 동쪽에 능을 관리할 사찰을 세우게 지시하니 바로 흥천사다. 옛 흥천사 터는 현재 덕수궁과 조선일보 사옥 사이에 있는 서울특별시의회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정릉과 흥천사의 거리는 거리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흥천사 일주문을 나서면 바로 정릉이었을 것이다. 

기록에 흥천사의 규모는 건물만 170여 칸이었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규모 정도의 건물이 10채도 넘었다는 말이다. 여하튼 한동안, 그러니깐 태조가 물러나고 정종이 형식적인 왕위에 오르기까지 흥천사는 능침사찰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차, 2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이자 세자였던 방석을 비롯해 관련자들이 모두 죽자 정릉도 멀리 옮겨지게 된다.

보물 제2호 보신각종. 1468년 혹은 1469년 주조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개에서조차 원각사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사실은 흥천사에 걸려 있던 것을 원각사로 옮긴 것이다.
보물 제2호 보신각종. 1468년 혹은 1469년 주조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개에서조차 원각사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사실은 흥천사에 걸려 있던 것을 원각사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능침사였던 흥천사는 어찌 되었을까? 정릉이 옮겨졌지만 흥천사는 한동안 원래 자리에서 사찰의 기능을 계속했다. 중국의 사신들은 사행길에 늘 흥천사 방문을 원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연산군 때 큰 화마를 맞았고 중종 때 사리각마저 불타면서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결국 ‘사대부들에게 땅을 나누어주라’는 명령에 따라 잠시 역사에서 사라진다.

흥천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들어갈 준비를 한 건 선조 2년(1569년)이다. 중종 7년(1512년)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신덕왕후 강 씨 가문 사람이 선조의 행차를 가로막고 정릉의 누차함을 호소하자 왕실에 다시 정릉의 위치가 알려진 것이다. 이후 지난한 논의 끝에 현종 대에 와서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결정이 되고 정릉이 복구된다. 지금의 성북구 정릉이다. 당연히 능침사에 대한 논의도 나왔다. 하지만 이미 정릉 옆에는 신흥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 현종 10년(1669년) 능이 절과 너무 가깝다는 건의가 있었고 합취정(合翠亭) 옛터로 절을 옮겨짓게 한다. 이후 절의 이름은 한동안 신흥사였다.

현재 흥천사 자리로 또 절이 옮겨진 건 정조 임금 대다. 성민(聖敏) 스님과 경신(敬信) 스님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다.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은 건 1865년이다. 흥선대원군의 후원으로 대방을 지었고 흥선대원군이 직접 대방의 현판도 썼다.

흥천사 동종은 세 개였다. 그런데 실록 등에 나타난 흥천사의 기록 중에 동종의 행방이 흥미롭다.
1504년(연산군 10년) 12월 화재가 나서 절이 불탔고, 1510년(중종5년)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을 때 ‘흥천사의 대종은 동대문(흥인지문)을 거쳐 광화문의 종루로 옮겨졌다가 일제하에는 창경궁으로 옮겨졌었으나 그 후 덕수궁으로 옮겨졌다.’ 여기까지가 흔히 흥천사 동종의 행방을 연구한 기록이다. 사찰의 안내문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흥천사 동종 중에 한 개의 행방만을 말하고 있다. 실제 흥천사 동종은 세 개였다. 이 세 개의 종이 여기저기로 옮겨 다녔는데 이걸 하나로 착각하면서 실제 종이 행방이 뒤섞여 버렸다.

첫 번째 종에 대한 기록은 세종 7년 4월 19일자 기사에 나온다. “흥천사(興天寺)의 종(鍾)을 옮겨다가 남대문에 달게 하였다”는 것이다. 흔히 흥천사 동종은 세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지만 이미 세종 때 흥천사에 종이 있었으며 그 종을 남대문에 달게 했다는 것이다.(실록에 나온 남대문이 사대문 중의 남대문인지 경복궁의 남대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이후 이 종의 행방은 묘연하다.

두 번째 종은 세조 8년(1462년) 주조된 동종이다. 지난 3월까지 덕수궁에 놓여 있었으나 최근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두 번째 종에 대한 기록이 ‘동대문·광화문·창경궁·덕수궁’을 유전한 종일 것이다.

하나가 더 있다. 보물 제2호 보신각종이다.(원래 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졌다.) 세조 14년(1468년) 만들어진 이 종은 흔히 원각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흥천사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흥천사명 동종. 1462년 주조된 것이다. 지난해 3월까지 덕수궁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졌다.
흥천사명 동종. 1462년 주조된 것이다. 지난해 3월까지 덕수궁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졌다.

세종 대에 남대문에 걸렸던 종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지만 덕수궁에 걸려 있던 종과 보신각에 걸려 있던 종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실록에 실려 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18년 기사에 왕이 “흥인문·숭례문 안에 둔 두 개의 큰 종을 내수사에 주라”고 명령하는 대목이 나온다. 원래는 종을 녹여 화포를 만들자는 신하의 주장에 명종이 반대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신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이 두 개의 종이 원래 원각사와 정릉사에 있었던 유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는 보신각종 하나는 덕수궁에 모셔져 있던 종일 것이다.

조선 초 파란의 역사와 함께 했던 흥천사 그리고 그에 따라 서울 시내 곳곳을 맴돌던 흥천사의 종들은 현재 그 소재를 알 수 없거나(최초의 흥천사 종)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보신각 종)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흥천사명 동종)에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동종이 하나라는 가정을 하고 역사를 기록하다 보니 종의 유전은 이리저리 혼재돼 제대로 기록되고 있지 못하다. 차제에 연구자들이나 사찰에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해 기록할 필요가 있겠다.

하나 더, 덕수궁에서 박물관으로 흥천사명 동종을 옮길 때 한번 정도 사찰 측과 상의는 있었는지 궁금하다. 수장고나 야외박물관에 놓일 거였으면 지금의 흥천사로 돌려주는 논의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나 최근 사찰 불사가 한창이고 또 점점 여법해지는 흥천사를 돌아보며 생긴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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