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이해의 길 28

새해가 되면 어떤 이들은 점집이나 〈토정비결〉 등의 경로를 통해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지 운세를 점치곤 한다. 운세가 좋게 나오면 기쁘지만, 나쁘게 나오면 왠지 모르게 찜찜하고 불안한 마음이 일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는 자신의 운명이 정해져있다는 숙명론적 사유가 작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과연 정해진 운명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각자의 운명이 정해져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검증의 범위를 넘어서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업과 윤회가 운명론으로 인식되고 있는 현상은 지적하고 싶다. 업설(業說)은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은 스스로 창조해간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그게 다 팔자고 업보야.’라고 하면서 마치 지금의 상황이 정해진 것처럼 여긴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것은 불교의 업설과 전혀 관계가 없다.

붓다가 활동했던 당시에도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라는 인물이 숙명론을 주장하였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육사외도(六師外道) 가운데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부른다. 당시 사명외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소카 대왕의 비문에 의하면 불교, 자이나교와 함께 독립된 종교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정해진 운명에 따라 결정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착한 일을 권하거나 나쁜 일을 금하는 등의 윤리가 이곳에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역사는 이들의 교단을 아지비카(Ajivika)라 부른다.

붓다는 모든 것이 정해져있다는 숙명론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일부이긴 하지만 사찰에서 점을 치거나 사주를 봐주기도 한다.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적어도 불교라는 이름을 걸고 행해서는 안 된다. 특히 개인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그것은 주어진 운명이니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는다. 불교는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적극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이를 보여주는 붓다의 대표적인 교설인데, 업설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업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몸과 입, 생각(身口意)으로 수많은 행위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로 인한 에너지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에 저장되었다가 다음 행위에 영향을 주는데, 이를 업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저장되는 무의식의 공간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부른다. 쉽게 말하면 업장(業藏), 즉 업의 저장 창고인 셈이다. 이곳에 저장된 업의 에너지가 우리들 현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를 끊기 어려운 것도 오랫동안 마시고 피웠던 에너지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저장된 에너지가 금연의 결심을 무너뜨리고 때로는 금단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랜 흡연으로 인해 받는 업보라 할 것이다.

업보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인격이나 습관 역시 무의식에 쌓인 업의 흔적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흔적으로부터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업에는 두텁고 두터운 습기(習氣)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써온 사투리를 고치는 일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의 내 모습이 과거의 업보라면, 미래의 모습 역시 지금부터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업이란 숙명이 아니라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금단현상을 극복하고 담배를 끊거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사투리 발음을 교정한 사람들이 있다. 모두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창조한 주인공들이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그저 삶이라는 영화의 엑스트라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며 그에 따르는 결과도 마땅히 책임지는 것, 업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이러한 주인공의 삶에 숙명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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