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있는 자리에는 부처가 항상 계십니다

오늘은 이렇게 함께 한자리를 하게 됐습니다. 누구한테 감사하다고 하기 이전에 서로가, 각자 자기가 자기 발견하는 데 목적을 삼는 공부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했던 말을 또 되하게 됐습니다마는 우리가 생활하는 것도 만날 되풀이하고 있는 거니까요. 불교다 하면 불은 영원한 생명을 뜻하고 교라는 건 아주 옳고 바른 말씀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고 하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한 지구 안에서, 즉 독 안에서 같이 살고 있는 거라고 평이 됩니다.

남이 나를 잘못되게 하는 게 아니라
내 탓이라고 생각을 한번 해 보시면서
겸손하게 잘 나가실 수 있다면
그게 아주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조차도 모르고 사는 것이 아마 인간인 것 같습니다. 지붕에서 벌레가 하나 뚝 떨어지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까.’ 하니까 뭐가 됐느냐 하면 매미가 됐거든요. 그런데 그 매미는 전자에 자기가 벌레로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또 자기가 매미가 됐다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인간도 자기가 전자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는지 또는 앞으로 어떠한 모습을 해 가지고 또 이 세상에 어떤 옷을 입고 나올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우리는 지금 한 발 한 발…, 평소에 사람들은 죽는다고 그러죠. 그러나 저는 옷을 벗는다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옷을 벗으려고 한 걸음 한 걸음, 이 세상에 생겨났다면 벌써 “나는 옷을 벗기 위해서 생겨났다.” 즉 죽기 위해서 생겨났다, 또 죽는다면 “살기 위해서 죽는다.” 이렇게 하겠지마는 그걸 첨보해서 둘이 아니게 생각을 한다면 생사윤회도 벗어날 수 있다고 보죠. 끄달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러면 어떠한 말을 해서 여러분한테 이해가 가도록 말을 하느냐? 첫째 내 몸, 둘째 가정, 셋째 사회, 넷째 국가, 다섯째 세계 전체에 우리가 너무도 하는 일도 많지만 오늘은 우리 몸으로부터 얘길 잠깐 해 드리죠.

우리가 이 세상에 몸이 태어날 때는…, 보통 우리가 말을 할 때 삼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삼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의, 즉 말하자면 나 자체, 그러니까 모든 이 마음의 근원이라고 할까요? 그 근원 자체가 한데 합쳐져서,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지면 어린애가 되듯이, 이렇게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져도 씨가 없으면 안 되는 이치가 있다고 봅니다. 삼합이 한데 합쳐지니까 인간 하나가 나온다고 보는데 그것을 일컬어 삼신이라고 우리가 전자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태어날 때 말입니다, 물주머니에서 터져서 나오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지수화풍에서부터 이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지니 그것이 바로 큰 성을 이루었고, 성을 이루었으니 온기가 거기 등장을 했고 모든 것이, 이 삼라만상이 벌어졌다고 보는데, 거기에서 생명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우린 지금까지도 지수화풍을 떠나서는 못 삽니다. 지금 몸도 지수화풍이니까요. 그러면 우리 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물질이 무엇인가? 내가 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태초에 생긴 자체가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에, 바로 여러분의 그 몸속에 있는, 갖은 각색으로 해 가지고 있는 세균, 그 생명들입니다. 그 생명, 모습이 바로 태초의 자기라고 볼 수 있겠죠. 하나로 인해서 생긴 것들이 그렇게 각각 제 모습을 해 가지고 지금 수만 개가 돼 가지고 이 인간의 별성 하나가 형성이 됐다고 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나왔는데, 내가 나오고부터 이 세상은 생긴 겁니다.

그래서 내 태초의 모습이 하나가 수만 개가 돼 가지고 지금 몸에서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체들이 운행을 하고 있는 그 겹겹의 세포의 모든 것이 있는데, 선장은 누구냐 하면 자기의 모든 마음, 즉 말하자면 공생이다. 우리가 전체 합치면 공생이다, 공용이다, 공체다, 공식하고 있다 이겁니다. 이것을 따져 본다면 내 몸 하나가 은하계도 될 수 있는 건가 하면 바로 혹성이기도 하고 별성이기도 하고, 우리가 지금 한시반시를 그냥 머무르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 지구가, 이 세상 우주가 전체 돌아가는 것이 우리 몸이 자도 깨도 항상 올라갔다 내려갔다 운행을 하고 있죠. 여러분이 그건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는 이런 게 있습니다. ‘자기의 그 마음 하나를, 한생각을 잘하면 자기 몸을 잘 끌고 다닐 수가 있고, 한생각을 잘못하면 자기 몸을 구덩이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런 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차를 운전하고 가실 때에 잘 끌고 가면 차도 성하고 일이 잘 성사가 되고, 잘못 끌고 가면, 어디 꼬라박기라도 하면 몸이 다치고 이러듯이 사람 몸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어떠한 쇼크를 받았다거나 이래도 그 몸은 망가질 수가 있습니다. 화기가 치밀어서 말입니다. 병이 들 수가 있죠.

그래서 사람이 마음 자체를 어떻게 먹어야만 되느냐? 내가 나고서부터 세상은 일어난 거니까 나로부터 화두가 되며 나로부터 근원을 밝혀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사대 성인이 이렇게 말을 했죠. 자신을 알라고요. 자신을 알아야 남을 알고, 남을 알아야 서로 공생하는 거를 알고 공용하는 거를 알죠. 그럼으로써 한마음이 선장이라고 한다면 모든 이 중생들을 지금 배에 태워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다면 어느 종교를 나누어서 찾을 게 아니라, 전체 우리는 바로 공생이며 공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밥이나 해 놓고 떡이나 해 놓고 비는 것이 불법이냐?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고등 동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은 90%, 99%가 부처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걸 보면 불쌍하게 여길 줄 알고 생각을 낼 줄 아니 그게 부처가 아니고 뭡니까. 그러니 몸으로부터 마음을 움죽거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몸을 움죽거리면서 오관을 통해서 우리가 움죽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태초도 내 몸에 있고 화두도 내 몸에 있고, 참선이라는 것은 생활에서 똥을 누든 밥을 먹든 자든 깨든 참선입니다, 그대로.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한다 하고 펜대를 붙들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참선입니다. 그건 자기 주인공으로 인하여 자기가 움죽거리고 있는 겁니다. 자긴 바로 자기 주인에 의해서, 즉 운전수에 의해서 차가 움죽거리듯 그럴 뿐입니다. 인간은 이 오온으로써 바깥 경계를 보고 안으로 들입니다. 안으로 들여서 또 가미해 가지고 안에서 만법을 또 냅니다. 그럼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이렇게 찰나찰나 우리가 쉬지 않고 가는 그 도리, 하나도 고정됨이 없이, 눈도 고정된 게 없고 귀도 고정된 게 없고, 말도 고정된 게 없고 만남도 고정된 게 없고,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된 게 없습니다. 그런 관계상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내가 어느 때에 걸어갈 때에 나라고 할 수 있으며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날 때 내가 만났다고 할 수 있으랴. 그래서 이름해서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옛날부터 이런 예가 있죠. 사회에서 일을 하시려면, 또 가정에서 내 몸, 내 가정, 사회를 이끌고 나가시려면 이런 것쯤은 알아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세상에는 무(無)의 세계와 유(有)의 세계가 교류되지 않고 회전이 되지 않는다면 부딪칩니다. 에너지가, 내 에너지가, 내 마음먹은 것이 저분 상사한테 말을 하지 않고는 절대 올라가지 못하거든. 그러나 여기 이런 게 있습니다. 예전에는 오신통이라고 그랬습니다. 천체 무전통신기, 이거는 뭘 뜻하느냐? 이것은 즉 듣는 것 천이통, 요 부분 하나를 쥘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은 보는 거 있지 않습니까? 천체망원경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건 무전 망원경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이 마음의 눈. 육의 눈이 아니라 마음속의 눈. 또 컴퓨터라고 그러면 숙명통을 말합니다. 요건 시쳇말로 그냥 이렇게 옮겨 놓는 겁니다. 또 탐지기는 타심통이라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육신통이다 하는 거는 주인공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움죽거리는 이 지금 우리 육신 자체, 즉 무에서 움죽거리는 거, 유에서 움죽거리는 거, 우리가 마음을 내면 그대로, 즉 말하자면 내 모습 없는 모습이 그대로 움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체가 그 하나만 있는 줄 알지 마십시오. 선생님이 한 분일지라도 한생각을 낸다면 두 개도 되고 만 개도 될 수 있고 천 개도 될 수 있는 그런 보배가 자기한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망원경이니 통신기니 탐지기니 컴퓨터니 이러한 문제, 또 영사기니 책정기, 이 책정기는 어떠한 거를 말하느냐. 누진통을 말합니다. 이것을 정한다, 이렇게 ‘정한다’ 이런 걸 말합니다.

그럼 오신통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우리 마음속에 스스로 자연히 생동력 있게 지금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있고 듣고도 있고, 눈이 간 데 귀가 가고 귀 간 데 눈이 가고, 눈 간 데 코, 냄새, 맛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이고 내고 이러는 것이 그대로, 공장에 피레가 돌아가면 베어링 돌아가듯 이렇게 돌아갑니다. 그렇게 돌아가서 그렇게 되는데 내가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내가 집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요걸 요렇게 요렇게 해서 집을 지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자 바로 설계가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설계가 나오면, 그때까지도 중간 지점에서는 저이가 집을 지었는지 모릅니다. 설계를 떠서 바로 허가를 내서 집을 짓게 되면 바깥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 지금 생활이 전부 과학입니다, 생활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그렇게, 자기가 보배를 가지고 있는 걸 모르고 실험도 안 해 보고 연구도 안 하죠. 해 볼 생각도 안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맛을 모르거든요. 무슨 음식을, 이 세상에서는 그 음식을 보지도 못했고 먹어 보지도 못했고 맛도 모른다 이거야. 그러니 생각을 해 봤어야 뭐, 연구를 하든지 실험을 하든지 그러죠. 그런데 도저히 해 보질 않았기 때문에 불법은 그저 가서 빌고, 잘되게 해 달라고 비는 건 줄만 알고 계신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만들지 않고, 하지 않고, 연구 안 하면 그것은 계발이 되지 않습니다. 불이란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 들이고 내는 그 베어링처럼 돼 있는, 스스로 작동을 하고 스스로 자기가 자동적으로 지금 움죽거리고 있는 게 얼마나 묘합니까.

그런데 더 묘한 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생각을 했는데 생각을 한 그 자체가, 여기 내 전화통이 있는데 저 집에 전화통이 또 있거든. 고걸 비유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 내 아우가 죽게 됐는데 어디가 고장이 나고 또 어디가 잘못되고, 승진을 해야 할 텐데, 뭐 어째야 할 텐데…, 이런 사단이 허다히 많죠. 살림에서요. 그런데 걔도 전화통이 있고 나도 전화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시는 데 얘깁니다. 그러면 전화번호를 아시죠? 비유하는 겁니다. 동생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 이겁니다. 이건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방침을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동생의 전화번호를 안다. 그럼 내 전화번호는 동생이 알고 있어.

그런데 그 전화번호가 뭐냐 하면 ‘아이고, 우리 동생이 지금 승진을 못했대.’ 이렇게 된다면 ‘몇 해가 되어도 남은 다 하는데 못했대.’ 이걸 형이 알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통신망의 무전통신으로 갈 수 있고 올 수 있는 그 근본 자체의 전화번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게. 그래서 내 전화통에 그 전화번호를, 자기가 전화통이라면, 주인공이 전화통이라면 걔가 그렇게 된 걸 알고 있으니까 내 전화통을 돌립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가는 줄 모르게 그리로 가서 거기서 벨이 울리게끔 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바로 또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상사나 모든 걸 운행을 해 가지고 나가는 그 도리가 바로 무전통신기로서 항상 그렇게…. 하나만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 다섯 가지를 다 운행을 할 줄 알아야만이, 한데 합해서 굴릴 줄 알아야만이 회사가, 저 기계가 돌아가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도 마음이 스스로 내가 생각도 못 했던 것이 생각이 났어. 물리가 터지는 거야. 그래서 연결이 되고….

지금 여러분은 그게 무슨 소린가 하지마는 무의 법 유의 법이,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보이는 물질로만은 지금 막이 내리게 돼 있단 소립니다. 왜?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모든 점이 지금 발달이 돼 가고 있는데 삼천 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이 과학이 그냥, 생활이 과학이니라. 연구들 잘하라. 자신을 알라. 그러면 스스로 알게 되느니라.” 이렇게 해서 팔만사천법문을 해 놓으시고도 거기 묘한 것이 뭐냐 하면 “나는 한 마디도 안 했노라.” 하신 그 한마디에 그 뜻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거를 어떤 때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휴, 스님. 참 고맙습니다.” 우리 청년회장이, 지금 회장이 그래요. 언젠가 “제 사촌동생이 폐병을 앓아서 아주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얘야, 네가 할 수 있는 일 네가 해야지, 네 밥을 내가 먹어 줄 수 있겠느냐?” 그랬습니다. 근데 어느 때에 가서는 “아휴, 정말 스님! 제가요, 제 전화통을 돌리니까요, 걔 전화의 벨이 울려서 그 병이 나았습니다. 그 불쌍한 동생을 건졌습니다.” 그러거든요. 한 일을 보면 열 일을 알고 한 일을 할 줄 알았다면 수만 가지를 할 줄 알아요. 하나가 물리가 터지면 전체가 터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앞으로 그 도리를 모른다면 점점 더 급박하지 않을까 이렇게 봅니다. 의학이 과학이라고 하지마는 지금 의학적으로 할 수 없는 게 너무도 많습니다. 또 물질로써 광대무변하게 이렇게 할 수 없는 건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물질이 허망하다는 게 아닙니다. 물질과 생각과 그 무의 광대무변한 근본 자체와 더불어 삼위일체가 회전이 된다면, 우주의 근본도, 하늘과 땅, 모든 것의 근본이 인간의 한생각의 근본입니다. 그러니 요런 거를 한번 생활의 지침이 될까 하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우리가 예전에는 그런 거를 몰랐는데 지금 새삼스럽게 이렇게 듣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번 해 보지도 않고, 생각해 보지도 않고 실험을 통해서 안 해 봤으니까 그러실 테지마는 불교는 이 절의 불교가 아니라 전체가 불교입니다.

사람이 연구해서 비행기를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렸겠습니까? 몇십 년이 걸렸겠습니까? 수없는 나날이 걸려 왔습니다. 처음에는 쪼그만 걸로, 또 그다음에 조금 더 나은 걸로 이렇게 해서 수없는 나날을 거쳐 온 역사가 있듯이 말입니다. 또 조그마한 수레로 인해서 지금은 얼마나 많은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판국이 됐으며, 지금 차도 별의별 차가 다 나왔지 않습니까? 구루마로부터 말입니다. 그렇게 했듯이 사람이 연구해서 만들 때 시일이 걸리고 그랬는데, 우리가 공부한 시일도 있겠지마는 우리는 수없는 광년을 거쳐서 실험을 통해서, 살아나오던 그 습에 의해서 얽히고설킨 그 자체가, 살면서 다리가 짧아서 남한테 쫓기다가 죽고 다리가 길어서 남한테 쫓기다가 죽고, 잡아먹히고 쫓고 쫓기고, 우리 일체 만물이 다 그렇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만물만생이 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도 사람이 동작을 움죽거려서 하는 겁니다. 만약에 아, 난리가 나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폭탄을 떨어뜨려서 우리를 다 죽인대.” 한다면 선생님, 가만있겠습니까? 그 날아오는 것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날아오는 것을 막는 것은, 지금은 이런 데서 6·25처럼 이렇게 전쟁이 나는 게 아니에요. 전쟁이 날까 봐 그러는 것도 아니고요. 이건 상식적으로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마음과 둘이 아닐 때, “둘이 아닐 때” 하는 건 크고 작고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닌 것을 알았을 때, 즉 오온의 그 베어링이 스스로 돌아가서 거기 가서 딱 그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그것이 뭐냐 하면, 둘로서 조절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그리로 그냥, 그냥 들어가 버리고 마는 거죠. 내가 되는 거죠. 그렇죠? 일할 때는 내가 그 사람이 되고 또 내가 일할 때는 그 사람을 나한테다 집어넣고 하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쪽으로 가도 하나요, 저쪽으로 가도 하나죠. 그랬을 때에 그것은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게 마음에 의해서만 움죽거리게 돼 있으니까요.

자기는 그 도리를 모르니까 그저 이 마음속에서 이렇게 틀려면 트는 겁니다. 틀어서 저쪽으로 가든지 여기에 해를 입히지 않고 돌아가든지 그럭하게 되죠. 즉 말하자면 태풍이 온다고 하는 것도 또는 인공위성이 떠가다가 잘못되는 이치가 있다 하더라도 이 모두를 한생각으로 움죽거릴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이것은 장난으로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급할 때 우리가 다, 난리가 나면 칼 빼듯이, 강도가 들어와서 죽인다고 할 때 여러분이 급하면 아무거나 들고 맞히게 돼 있죠. 그와 같이 그건 자기가 죽고 사는 걸 모를 때, 그렇게 급할 때 쓰는 도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활에도 그런 일이 꼭 그렇게, 어떠한 문젯거리만 생기는 게 아니라 조그마한 일이나 큰 일이나 그 집에 있어서는 큰 일입니다. 여기 여러 분들이 오시는데 우린 이런 일 또 딴 집은 저런 일 하고많지만, 이런 집은 작고 이런 집은 크고 이렇겠지만 크나 작으나 그 집에 있어선 똑같다 이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사는 그 자체 살림이 바로 종교기 때문에 참선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자도 참선이요, 깨도 참선이요, 일을 해도 참선이요, 똥을 눠도 참선이요, 자기가 있는 자리에는 부처가 항상 계시다는 얘깁니다. 그건 뭐냐 하면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자기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기 주인공이라는 보배, 그 자체를 잃지 마십시오.

반드시 내 주인공에서 일체 만법이 나올 때 그 일체 만법은 여기서 하는 거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이 속 눈을 통해서 겉 눈으로 봐서 나쁘고 좋고 그르고 옳고 이런 거를 안으로 들이면 들이는 대로 거기에서 또 바깥으로 나오게 돼 있는 거죠. 그러니 그 들이고 내는 것을, 모든 것은 내 주인공이 이날까지도 해 왔지만 앞으로도, 지금도 현재 해 가고 있으니까 나는 믿고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놓으시라는 얘깁니다. 맡겨 놓게 되면 나중에 그게 다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았을 때 바로 새 물건이 생산되듯이 참나가 생산이 돼서 발견이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럴 때 진짜 공부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더 말을 해서 될 일은 아니고 여러분이 생활하는 데, 우리가 지금 사회 나가서 일을 하고 직장에서 일을 하고 이러는데,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공부입니다. 한번 실험을 통해서 ‘야, 이런 거 모든 게 주인공이 하는 거지, 나는 지금 주인공에 의해서 움죽거려 주기만 하는구나.’ 이런 걸 한번 생각해 보시고요, 주인공, 당신이 하는 거니까 저 사람이 저리로 좀 옮겨서 앉았으면 좋겠다든가, 옮겨서 섰으면 좋겠다든가 이런 생각을 주인공에 맡기고 참 믿고 이렇게 하면서 모든 걸 실험해 나가다 보면, 그러한 것도 한번 실험해 보고 그런다면 그게 바로 연구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끄만 데서부터, 내 생활에서부터 말입니다. 어디가 아파 보십시오. 벌써 어디가 탁 부딪쳐서 아프면 대뇌에까지 다 통과가 됩니다, 이 몸에. 몸에 어디가 찌르르하면 벌써 여기까지 다 통해요. 그러니까 내가 아프다는 걸 알죠. 그러면 그것을 주인공에 다시 되놓을 땐 벌써 이 속에서 다, 그것이 도로 그리로 가서 다 이게 명령이 하달이 되는 겁니다.

이 모두가, 인간의 이 문제 자체가 무의 법을, 즉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부딪치는 이 자체를 회전시키면서 우리가 계발해야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앞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옷깃을 다시 한번 여미면서 연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이익이 있고 지침이 되고 공덕이 있고, 앞으로 생활하시는 데도, 자녀들을 기르는 데도 뿌리가 썩지 않게끔 이끌어 줄 수 있는 그런 문제가 되고, 또 여러분도 뿌리가 썩으면 가지나 이파리가 시들시들해집니다. 그리고 열매도 맺지 않고 익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나무뿌리는 싱싱하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싱싱하게 제 나무에서 열매가 열려서 제 나무에서 무르익었을 때 남들이 우러러보고, 그 열매의 맛을 보려고 모두 여러분을 우러러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나를 잘못되게 하는 게 아니라, 내 탓이라고 생각을 한번 해 보면서 겸손하게 잘 나가실 수 있다면 그게 아주 자동적이고도 활용적이고 연구적이고 지름길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7년 1월 24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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