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재를 시작하며


135개 소수민족 뭉친 자부심 아래
군부정권 이어 민주주의 꽃 피워
미얀마 언어 스님들이 가르치면서
문맹 퇴치 나서… 불교는 삶이다

최재희의 비긴어게인 미얀마를 통해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은 파고다의 전설과 역사, 문화, 그리고 현재의 미얀마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읽기 쉽게 전한다. 필자는 동국대 불교학과 학부시절 받은 장학금에 대한 작은 회향의 시작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한국에 더 이상 미얀마가 과거에 멈춰진 불교의 나라가 아닌, ‘미래의 발전을 위해 도약하는 황금의 나라 미얀마로 다가가기를 기원했다. <편집자 주>

15세기 건립된 불교사원 쉐다곤 파고다. 미얀마를 상징하는 대표 성지다.

익숙하지만 부족한 정보
미얀마(Myanmar)는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민주화운동’ ‘아웅산 수찌’ ‘불교의 나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 한국불자들에게는 위빠사나 명상으로 유명한 나라다. 201525년 만에 이루어진 자유총선으로 아웅산 수찌(Aung San Suu Kyi, 미얀마 국가고문 겸 외교부장관)가 이끄는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USDP(The 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를 압승하면서 반세기만에 군부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되었다.

군부독재가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외국인에게 굉장히 배타적이었기 때문에 국내에는 미얀마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위빠사나 명상을 다녀온 분들의 정보와 수행일기는 있었지만 그 외에 미얀마에 유학, 비즈니스를 하려면 어떤 준비와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2015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약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한국에는 미얀마의 여러 분야에 다양한 정보가 많지 않다.

미얀마는 우리나라에 버마(Burma)라는 이름으로 많은 분들에게 익숙하다. ‘미얀마라는 명칭은 1989년에 군부정권에 의해 바뀌었다. 미얀마는 미얀(Myan, 빠르다), (Mar, 강하다)’라는 뜻으로 빠르고 강하다는 뜻이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미얀마는 예전의 버마라는 명칭 대신 미얀마라는 국호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미얀마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13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국, 라오스, 태국,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다양한 민족이 있지만 미얀마라는 구심점으로 하나가 되어 굉장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갖고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미얀마는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이었다. 쌀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환경을 갖고 있어서 쌀의 품질과 생산량이 높았지만 1962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네윈(Ne Win)은 폐쇄 경제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쌀 가격을 정부가 낮은 가격으로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품질이 하락하고, 국제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미얀마의 쌀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6.25 한국전쟁 당시 미얀마에서 우리나라에 5만 달러에 달하는 쌀을 보내주었다. 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이 미얀마를 국빈 방문했을 당시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을 만나 한국전쟁 당시 미얀마가 지원한 5만 달러 규모의 쌀은 전쟁으로 고통 받던 한국 국민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왔다. 한국 국민들은 미얀마 국민들에게 그 고마운 마음을 딴요진(미얀마에서 을 뜻하는 말)으로 보답하려고 한다고 감사함을 표시했다.

미얀마는 한국과 6.25 전쟁의 과거 인연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높은 교육열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 오랜 전통을 가진 불교 역사라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다. 특히 미얀마는 한국과 같이 높은 교육열을 갖고 있다. 미얀마는 군부독재시절 학교가 거의 폐쇄되어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에서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문맹률이 낮다. 이러한 현상에는 미얀마 스님들의 역할이 크다. 절의 교육기관(Dhamma School)을 만들어 동네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미얀마 언어를 가르쳤다.

양곤대학교의 ‘Convocation hall’은 오바마 대통령이 미얀마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장소로 유명하다.

최초의 박사과정 유학
1950년대 초반만 해도 아시아권에서 양곤대학교(University of Yangon)는 굉장히 유명했고, 아시아의 인재들이 유학하고 싶은 학교 중의 하나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미얀마의 관심을 갖고 유학을 가고 싶었기 때문에 양곤대학교는 꿈의 학교였다. 민주화가 되기만을 꿈꾸었고 미얀마 사람들과 같이 열망했다. 2015년 마침내 미얀마는 총선거를 통해 군부정권에서 민주화정권으로 변화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학·석사를 마친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양곤대학교 입학준비를 시작하면서 미얀마 유학을 추진했다.

하지만 미얀마 유학준비는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아무도 양곤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구할 수 있는 정보는 아예 없었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미얀마는 아직도 외국인을 학생으로 받아주지 않는다는 무서운 소식만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미얀마 양곤대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학교에 전화를 걸면 연결이 안 되거나, 연결이 되더라도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양곤대학교 입학을 준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어 미얀마 양곤대학교에 입학하고 싶은 오리엔탈학과를 찾아갔다. 학과에 찾아가고 나니 한국에서 연락이 닿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통 한국 대학교에서는 교수를 비롯하여 조교들에게 개인 컴퓨터가 제공되고, 학교에 인터넷이 안 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미얀마에는 각 과의 공용 컴퓨터만 있었고 인터넷도 한국처럼 갖춰져 있지 않았다.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공부를 할 수 있는 쾌적한 환경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한국 대학교에는 모든 과와 강당과 강의실에 에어컨이 똑같이 설치되어 있지만 미얀마에는 각 과의 학장 교수실을 제외하고는 에어컨이 아직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한여름에 체감온도 40도가 웃도는 미얀마에서 지난 1년 동안 수업을 들을 때 에어컨이 없어 이마와 엉덩이에 땀띠가 나는 일도 겪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오리엔탈학과 학장 교수님과 입학허가를 묻기 위해 입학처를 찾아 간 적이 있는데 서류뭉치가 사무실에 쌓여 있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대학교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서류들이 여기에는 왜 이렇게 많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자세히 행정시스템을 살펴보니 아직도 모든 것을 수기로 입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얀마 정부부처도 똑같은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끝날 일이 미얀마에서는 여러 부서의 사람들을 거쳐야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학교 홈페이지도 2018년도이 되어서야 새로 리뉴얼 되었다. 민주화된 지 약 2년이 지난 2017년도의 미얀마의 환경을 한국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답답함을 느꼈던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고 부끄러웠다. 17살 때부터 미얀마에 관심을 갖고 10여 년 넘게 민주화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미얀마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순간마다 내가 알고 있다는 오만함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오만함을 깨고 자각하기 위해서는 유학하는 5년 동안 미얀마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면서 삶 속에서 미얀마 문화를 최대한 느껴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출신으로 미얀마에 유학을 하고 있다고 하면 불교 배우러 미얀마에 간 거예요?” “불교로 밥 먹기 살기 힘들 텐데요?” “미얀마 가지 말고 옆에 베트남, 태국이나 가지 그런 데를 왜 간 거예요?”라며 걱정하는 마음과 무시하는 마음을 섞어서 간간히 물어보는 분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불교는 제 삶 자체입니다. 그리고 미얀마도 불교가 삶 자체이지요. 미얀마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불교를 모르고 역사와 문화,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불가능하죠. 그리고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은 부처님께서 알아서 해줄 겁니다. 걱정 안 해주셔도 됩니다라고 웃음으로 받아치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가는 길에 대한 원력(願力)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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