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사라지고 미움만 남아
극단의 진영서 지구별 불탄다
불을 완전히 끌 수는 없어도
관리하고 제어하는 힘 길러야

해법은 연기법 따른 팔정도에
부처님 전법의지를 되새길 때
새해 모두가 전법여정 나서자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왔단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제야의 종을 치고, 새해 첫날의 해돋이를 보기 위해 바다와 산에서 야단법석을 했다. 연기의 광장에 법석을 마련한 것인가? 근래에 양자 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가 지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책을 읽으면서 붓다의 지혜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로벨리는 시간이 객관세계에 균일하게 흐르는 실체가 아니라 물질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의 관계라고 본다. 즉 시간이 장소에 따라, 사건들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2500년 전에 붓다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생멸 변화를 할 뿐이며, 따라서 물질의 행()이 없으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결국 인간이 만든 시간은 제행무상의 변화 흐름 속에서 인간이 만든 틈이다. 새해의 야단법석도 이 변화의 틈을 통하여 스스로를 성찰하고 뜻있는 시간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일 것이다.

지구별 전체가 불타고 있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로 인해 지구의 생명체는 불길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낙원으로 불리는 호주에서 5개월째 지속되고 있는 참혹한 산불은 단순한 산불이 아니라 생태계의 종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서로 증오와 갈등으로 불타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는 극단적인 진영의 불길 속에서 미움의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TV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난다. 새삼 붓다의 산상수훈이 생각난다. 어느 날 붓다는 제자들과 우루벨라 지방의 가야시사산에 올라 붉은 저녁노을을 보면서 이렇게 설법했다. <잡아함 8197권 시현경>.

사람들도 저와 같이 불타고 있다. 사람의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눈이 타고 눈의 인식 대상인 물질()이 타고 있다. 의식이 타고 있고 의식의 인식대상인 생각()이 타고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에 불타고 있는가. 그것은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 때문에 불타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모든 불타는 것과 그 원인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열반 즉, 빨리어로 닙바나(nibbana)는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불을 완전히 끄지는 못할지언정 불을 관리하고 제어할 수 있는 지혜와 실천의 힘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지혜와 실천 방향을 제시한 것이 바로 붓다의 가르침이다. 우리를 태우는 불의 원인은 바로 집착과 욕망, 증오와 분노, 이리석음과 무지의 삼독(三毒)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삼독의 구덩이에 빠진 줄도 모르고 불길 속에서 춤을 추고 있으니.

이제 그 불길을 잡아야 한다. 그 불길을 잡는 방법은 오직 연기법과 중도 사상에 바탕을 둔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이것을 전할지 말지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깨달은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냥 입을 다물고 입멸할까하며. 그러나 붓다는 위대한 전법선언을 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갖고서, 천신과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전도하라. 두 사람이 한 곳으로 가지 마라.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웰라의 장군촌으로 갈 것이다.”

그렇다. 전법 없는 불교는 없다. 전법은 중생 구제의 길이다. 붓다에게 간곡하게 설법을 부탁한 범천의 말이 새삼스럽다. “세상에는 번뇌에 적게 물든 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붓다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깨달을 것입니다.” 새해는 모든 불자가 전법을 위해 길을 떠나는 위대한 여정이 시작되기를 기원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