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화륜(旋火輪)

어렸을 때 틈만 나면 충남 아산 노로지[장곳리]에 있는 외가에 내려가곤 했다. 정월 대보름이나 첫 쥐날[上子日] 밤에는 벼를 베어낸 그루터기들이 줄지어 서있는 논바닥이 놀이터가 되었다. 마른 짚단을 묶은 홰에 불을 붙여 들고 다니며 논두렁을 태우는 쥐불을 놓기도 하고, 줄을 맨 깡통 안에 관솔불을 담아 깡통을 돌리면 불바퀴인 선화륜(旋火輪)이 생긴다. 여러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선화륜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눈을 감아도 잔상이 남아 선화륜이 보인다.

논 밖에 없는 평야지대라서, 오리나 십리쯤 떨어진 이웃마을의 쥐불과 선화륜들도 지척인 듯 선명하게 잘 보여 온 들판이 불꽃놀이장이었다. 지금 같은 가상현실 게임의 시대에는 잘 볼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능엄경〉에 선화륜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난아! 네가 말한 바와 같이 사대(四大)의 화합으로 세간의 갖가지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난아! 만약 그 (사대의) 성품과 바탕이 화합되는 것이 아니라면, 사대가 서로 화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치 허공이 물건들과 화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사대가) 화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변화하는 것과 같아서 시종 서로 변화되어 생멸이 상속된다. 태어났다가 죽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등, 거듭되는 생사가 마치 선화륜(旋火輪 - 횃불 등을 돌릴 때 생기는 불바퀴)과 같아서 쉴 틈이 없다. 아난아! 그것은 마치 물이 얼음으로 변하고, 다시 얼음이 물로 변하는 것과 같다.”

〈楞嚴經卷第三 T0945_.19.0117b24- b29〉

사대가 화학적으로 영구히 결합하는 것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모이면 태어났다고 하고, 흩어지면 죽었다고 한다. 지수화풍(地水火風) 각각의 성품인 견습난동(堅濕暖動ㆍ단단함, 젖음, 따뜻함, 움직임)은 사대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관계없이 없어지지 않고 사대의 바탕을 이룬다.

불깡통이 불바퀴 원둘레 360도 모두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불바퀴를 시계에 비유한다면 불깡통이 12시 위치에 있다가, 3시 위치에 있다가, 6시 위치에 있다가 9시 위치에 있는 등, 불깡통의 위치가 계속 변한다. 순간순간을 정확히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매순간 불깡통은 불바퀴로 보이는 원둘레 상의 어느 한 점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불바퀴는 실재가 아니고 잔상효과(殘像效果)에 의한 착시현상(錯視現象)일 뿐이다.

이 잔상효과 자체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달리는 말을 사진 찍으면, 사진 속의 말은 멈추어 있다. 그러나 연속사진을 찍어 1초에 24장을 돌리면 말이 달리는 것으로 보인다. 활동사진은 이 잔상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활자문명이 영상문명으로 바뀌면서 잔상효과는 더욱 중요해졌다.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십육관법(十六觀法)의 첫 번째인 초관(初觀)은 일상관(日想觀)이다. 극락세계를 관(觀)하기 전에 관법(觀法)을 확립시키기 위한 관(觀) 연습인 셈이다.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서 마음을 굳게 간직하고 오로지 해 생각에만 전념한다. 지려는 해가 서쪽에 매달린 북과 같음을 본다. 그래서 눈을 감거나 뜨거나 그 해의 영상이 명료하게 보이도록 한다. 이 역시 잔상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지는 해를 보도록 한 것은 해가 크게 보일 뿐 아니라, 눈을 상할 염려가 적기 때문이다.

생사가 되풀이되는 윤회도 선화륜과 같아서 윤회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의 전도(顚倒)된 착각에 따른 망상(妄想)일 뿐이다. 청화 스님의 은사이신 금타(金陀) 대화상께서 말씀하셨다. “한 티끌을 잘못 보면 망녕된 생각이 되고, 바로 보면 참깨달음이 된다. [일미(一微)를 오견(誤見)하면 망상(妄想)이 되고, 정견(正見)하면 진각(眞覺)이 된다.]

〈金剛心論 제4편 宇宙의 本質과 形量 序文 중에서〉

                                                         <배광식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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