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왜 채식을 해야 하는가

산천어축제·공장식 밀집사육은
대중 자각 없이 자행되는 살육
불교도가 불교적 삶 지향한다면
식탁에 오르는 고기, 진실 알자

사진제공=한국불교문화사업단/하지권 작가

올겨울에도 각종 지역 문화축제는 빠지지 않고 살육제의 광고가 한창이다.

어느 해인가 겨울 방생법회를 강원도로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가는 길에 잠시 들르게 된 화천에서 산천어 축제를 잠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멀쩡한 물고기들을 가두어 놓고 재미로 살생을 즐기는 모습은 비단 불살생과 방생을 하는 불교인이 아니어도 충분히 보기 불편했다. 좁은 공간에서 살기 위해 퍼덕거리는 산천어를 손으로 잡아 마구잡이로 주물러 터뜨려가면서 사냥놀이를 하는 어른과 아이들의 모습은,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후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물고기들의 시체를 보는 것 이상으로 괴로웠다. 한쪽에서는 방생을 위해 물고기를 차에 싣고 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물고기들을 재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유로 살생을 저지르는 모습이 공존하는 실상을 보면서 진정한 방생이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10여 년 전 구제역으로 수백만 마리의 돼지가 산채로 매장당하는 모습이 그대로 언론에 노출되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는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생명이었다는 것을 그전까지 크게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매장당한 이후에도 살기 위해서 버둥거리고 구덩이에 깔아놓은 비닐을 온몸으로 찢는 동물의 모습은 살처분을 담당하는 공무원과 군인들에게 트라우마를 갖게 했고, 방송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먹거리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그 당시 많은 사찰에서는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을 위로하는 천도재를 지내고 이웃종교에서도 죽은 돼지의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해마다 구제역과 조류독감 같은 질병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예방적 살처분이란 이름 아래 해마다 살처분되는 가축들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심지어 매해 반복되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미안함과 충격은 무뎌져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모든 가축의 질병은 가축이 다뤄지는 환경에서 오는 이유가 대부분이고 우리가 육식을 줄이지 않는 이상 가축을 키우는 환경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삼정육, 육식문화가 아니다
부처님은 사실 탁발을 하면서 음식에 대해 정확한 규율을 정하신 게 없다.

경전에는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의 육신을 먹는 것과 같다는 생각으로 모든 음식을 귀하고 여기고 음식에 대한 탐심을 버리며, 단지 공부하는 육신을 버티게 하는 약으로 삼아 음식을 주는 사람들의 공덕을 생각하면서 공부와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먹을 수 있는 고기에 대한 설명이 삼정육(三淨肉)’이란 표현으로 <사분율(四分律)>에 나오지만, 요즘 들어 일부에게는 불교 수행자도 육식이 가능하다는 이유 아닌 핑계로 이용되기도 한다.

삼정육은 자기 눈으로 직접 죽이는 것을 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이는 소리나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였다는 의심이 가지 않는 세 가지의 깨끗한 고기는 먹을 수 있다는 규정이다. 요즘처럼 공장식 축산으로 식품이라기보다 거의 공산품에 가깝게 마트에 진열된 고기는 어찌 보면 모두 삼정육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익명의 다수를 위해 키워지고 살육되는 가축은 꼭 집어 나를 위해 죽인 게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육식에 대한 규정이 딱히 정확하게 필요하지 않았던 건 그 당시 인도의 사회 모습과 관련이 있다. 이미 고대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는 불살생과 비폭력을 강조하는 아힘사(ahims)’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한 정신적 지도자 대부분은 오늘날 락토베지테리언(lacto-vegetarian)에 해당되는, 우유나 치즈만을 허용하는 채식인들이었기에 따로 육식을 엄격하게 금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탁발의 전통을 가진 불교는 탁발을 하면서 까다롭게 음식을 고를 수 없는 까닭에 보시자가 주는 대로 감사히 받아먹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육식에 대한 최소한의 규칙을 잡아 놓은 것이 바로 삼정육이다. 물론 이 규율도 출가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규칙일 뿐이다. 오히려 육식이 터부시된 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 인도에서 일반적인 전통이었던 희생제를 강력하게 금하고 비폭력을 강조한 아쇼카 대왕에 이르러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초기불교에서는 비록 엄격한 채식이 아닌 개량주의적이거나 중도적인 채식을 선택했지만 불살생의 계율을 전면에 내세우고, 깨달음을 위해 요구되는 단계인 계((()의 삼학 중 가 제일 앞선다고 이야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불살생의 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이룰 수 없는 기본 교리를 갖추고 있다.

육식 금지의 교리가 더욱 강력해지고 보편적 규범이 된 것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였다. 인도와 달리 사계절이 뚜렷한 중국의 기후에 걸식의 전통은 적합하지 않았고 이에 걸식의 전통에서 직접 음식을 해먹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사찰 안에 공양간이 생기고 음식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지면서부터다. 특히 양무제(464~549)에 이르러 술과 고기를 일체 금하는 단주육문(斷酒肉文)은 불교 수행자에게 반드시 엄격한 채식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이후 대승불교로 일컬어지는 동북아시아의 불교 전통에서 채식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규범이 되었다.

당장 불국토를 이루는 방법
요즘 학대받는 동물의 권리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기후위기의 대응책으로 채식을 지향하거나 비거니즘으로 대표되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채식은 이제 특별한 소수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문화로 거듭났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채식 급식권을 부여하는 지자체도 하나둘 생겨나고, 군대에서도 채식 선택권을 주지 않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이야기되는 형편이다.

물론 일부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들이 채식이 무슨 특권인양 행동하는 것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있고, 먹는 것이라는 게 단순히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닌 역사와 문화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기에 대체로 육식문화가 발달한 한식에서 완전한 채식은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에서는 먹는 것도 일종의 교육이라는 신념 아래 아이들에게 채식 교육을 하는 것처럼, 교육을 통해 우리의 식습관은 충분히 개선 가능하다. 매 끼니 채식을 하는 게 어렵다면, 육식을 조금 줄이는 것만으로도 채식을 향한 걸음의 첫발을 뗄 수 있다.

해마다 이상 기온으로 명명된 비상식적 기후의 징후가 늘어나고, 미세먼지는 노약자에게 치명적 질병 요인이 된 지 오래다. 또한 항생제로 범벅된 먹거리로 구성된 우리의 식탁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불교적 삶에서 찾아보는 건 어떨까?

김현진 아카마지 대표

예를 들어 방생같은 경우, 단순하게 물고기 몇 마리 강에 풀어주면서 복을 비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비폭력과 자비의 적극적 행위이고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에게 적용되는 행동이다. 죽음을 앞에 둔 생명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위기에 직면한 지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씩을 실천해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넓은 의미의 불교적 삶인 방생일 수 있다.

또 모든 음식이 우리 식탁에 오르기 전에 하나의 생명이었음을 잊지 않고 음식을 귀하게, 그리고 감사하게 여기는 것. 그 방생의 태도야말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국토를 머릿속에서만이 아닌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 이루는 방법이 아닐까?

특별한 날 차를 타고 방생법회에 동참하는 일도 의미 있지만, 일상에서 매일매일 방생하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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