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이해의 길 27

‘불성,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이는 199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비판불교’의 시각이다. 이들은 대승불교의 불성과 여래장은 붓다가 강조한 연기,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에 불교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였다. 붓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고 했는데, 불성과 여래장은 힌두교의 아트만(Atman)처럼 불변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불성, 여래장을 불변하는 실체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점에서 비판불교의 대승불교 비판이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정말로 불성, 여래장을 아트만처럼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공사상이 대승초기에 유행했다면 불성, 여래장은 대승중기 대략 300~650년 사이에 발달한 사상이다. 모든 생명은 붓다(佛)가 될 수 있는 가능성(性)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불성사상이며, 일체가 여래(如來)의 씨알(藏)이라는 것이 여래장사상이다. 용어는 다르지만, 비슷한 의미와 맥락을 지닌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붓다의 성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를 잘 가꾸어 실현하면 깨친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공사상이 ‘~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방법을 통해서 존재의 실상을 드러냈다면, 불성사상은 이를 매우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공사상은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연기의 대승적 해석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공사상은 현상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오해받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면 인연이 만들어내는 현실세계를 모두 부정하는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사상으로 흐를 수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사상이 필요했는데, 불성과 여래장이 보완 역할을 한 셈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여래장경〉과 〈열반경〉, 〈승만경〉 등은 이러한 요청으로 역사에 등장한 경전이다.

불성, 여래장을 영원불변하는 실체로 해석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비판불교의 지적처럼 이렇게 되면 무아의 가르침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그렇게 비좁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불성사상은 인간의 존엄성을 외치고 있는 불교의 휴머니즘(humanism)이다. 인간은 피부나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존엄한 존재다. 왜냐하면 모두가 붓다의 성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열반경〉에서는 이를 ‘일체의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입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로 〈법화경〉에 등장하는 상불경(常不輕) 보살을 들 수 있다. 이 보살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언제나(常) 가볍게 여기지 않는(不輕)’ 인물이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당신은 거룩하십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해서 상불경 보살을 때리기도 했지만, 그는 진심을 다해 모든 사람을 붓다처럼 예경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사람은 붓다의 DNA, 즉 불성을 지닌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함부로 하거나 해치는 일은 다름 아닌 불성 모독죄에 해당된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휴머니즘을 영원불변하는 아트만이나 영혼, 윤회하는 주체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불성, 여래장 사상이 비록 대승 중기에 등장했지만, 그 바탕은 붓다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본래 마음이 청정하다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나 붓다의 마지막 유훈인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自燈明)는 가르침이 대승에 이르러 불성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다.’는 붓다의 탄생게 역시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선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존엄한 불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붓다의 아들(佛子)로서 해야 할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이 주인인 세계,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결정되는 헬(hell)조선의 사회에 살고 있다. 불성, 여래장은 이를 부정하고 모두가 본래부터 금수저임을 밝히고 있는 사상이다. 이것이 곧 헤븐(heaven)조선을 지향하는 참다운 인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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