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한 발 한 발 떼 놓는 거 다 주인공에 몰락 몰락 맡겨 놓으세요

질문 벌써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네요. 참으로 시간은 빨리도 흐릅니다. 시공이 없는 공부를 하고 있지만 저희 범부들은 아직도 시간의 흐름 속에 마음이 흔들리곤 합니다. 올 경자년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다짐으로 다시 발심하고자 하오니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새삼스럽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새해를 맞이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을 해서 잘 돌리고 있는지 한 번 더 생각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잘못된 건 고치고 잘되는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사계절이 간다 하더라도 모두 초월해서 돌아가는 걸 본다면 그날이 그날이고 우리네 마음들도 항상 그대로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함으로 해서 마음도 새록새록 달라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해가 지났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새로이 해가 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죠. 그러니까 마음은 변화무쌍하게 조절이 되고 화하게 되고, 그 어떤 것으로 마음을 쓰느냐 하는 것을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이 되는 거죠. 여러분께서 이 공부를 하시면서 어떠한 것을 느끼고 어떻게 생활을 하고 또 어떻게 실천을 하면서 가야 하는지 그걸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앞뒤 없는 불바퀴 속을 들락날락할 수 있다면
저승과 이승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롭게 발심하고자

우리 몸은 바로 부처님의 법당과 같습니다. 내 마음을 깊이 이해해서 법당을 잘 지키면서 법당 속의 모든 자생 중생들을 제도하고 한마음으로 조복을 받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근본 행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한층 더 육신 법당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그 법당 속에 바로 자부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근본으로 봐서는 죽고 사는 생사가 둘이 아니요, 영원한 것이지만 그 자부처가 없으면 내 몸뚱이가 움죽거릴 수도 없거니와 보고 듣고 행할 수도 없고 모든 게 침체해 들어가게 됩니다.

자기 몸뚱이 법당은 명이 다하면 다시 헐고 또 짓지마는 마음의 근본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내가 어떻게 살아나가고,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말하며, 진실하냐 진실하지 않으냐 하는 모든 것에 따라서 대뇌에, 즉 누진의 컴퓨터에 입력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입력이 돼서 모든 게 현실로 차근차근히, 피할 수도 없이 감겼던 것이 풀어져 나오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생활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입력되어 풀려 나오는 업과 고를 어떻게 요리하여 오히려 나를 밝히는 재료로 쓸 것인가 하는 것도 오직 여러분의 한 마음의 선택에 있을 뿐입니다.

참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질문 우리가 진짜 참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답변 여러분이 진짜 사람이 되려면, 눈 없는 진짜 마음의 눈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을 얻는다면 들음이 없이 듣는 귀를 얻을 것입니다. 냄새라는 것이 그냥 우리가 음식이나 냄새 맡고 썩은 내나 맡고 이러는 냄새가 아닌, 한계가 있는 냄새가 아닌, 삼세의 그 돌아가는 이치의 그 냄새는 향으로써 바로 그 이름을 붙였던 겁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고 그러는 세계의 마음의 향이 온 누리를 돌고도 남음이 있으니 꽉 차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모든 것은 우리가 놓고 가는 것이 진리거늘, 여러분은 어찌 놓고 가려고 하질 않고 놓을 데가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항상 말을 하지만 내 몸이 지수화풍 사대로 뭉쳐져 있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지수화풍으로 뭉쳐졌다 이겁니다. 그러면 우주 전체의 물체가 다 지수화풍으로 합쳐졌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하여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겁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항상 살고 있는 이, ‘돌아감도 없고 돌아옴도 없는, 이 삼각 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런 뜻을 생각할 때 우리가 생명과 마음과 몸을 한데 합쳐서 원형을 이루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우리 생활에서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한 찰나 한 찰나 놓고 가는 것입니다. 놓고 가는 것이 없이 놓고 가고 있죠. 그런데 쳇바퀴 돌듯 하고 있습니다. 어저께 밥을 먹었다고 해서 어저께 밥을 먹은 것을 생각을 하고 있기 이전에, 그거는 벌써 똥이 돼서 없어지고 오늘 또 밥을 먹어야 하는 그런 이치죠. 어저께 먹은 게 그대로 있고 그렇다면 오늘의 먹을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저께 먹은 밥이 체해서 꽉 위를 메워 가지고 있다면 오늘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결국은 죽는다고 병원에 갈 겁니다. 그러니 어저께 먹은 밥이 오늘에 없을 것이고 오늘 먹은 밥이 내일에 없을 것이니, 그것이 바로 삼세가 공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은 공했다면, 없다면 없다고 하는 말이 그게 해당한 말이냐고 하겠죠. 여러분이 사시는 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사람을 만나도 한 번도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붙잡고 있는 법이 없습니다. 식구들도 번갈아 가면서 만나죠. 또 만남도 그렇지만, 만날 때의 생각이 번갈아 가면서 딴 생각으로써 말을 합니다, 환경에 따라서. 애를 만나면 ‘해라’가 나오고 어른을 만나면 존대가 나옵니다. 그건 자기가 스스로서 그렇게, 지금 과학이 발전이 됐다고 하지만 아주 스스로서 자동적으로 영원하게 돼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그래서 영원하게 자기가 돼 있는 자체가 잠재의식 깊은 속의 테이프와 같은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테이프에 녹음을 금방 했는데 금방 그 녹음한 데다가 또 녹음을 하니까 그 앞서 녹음한 거는 없어지지요? 그러니까 연방 그 테이프에 자꾸 녹음을…. 억겁을 거쳐 오면서 자꾸 생활을 하면서 놓고 가다가 보니까, 전자에 짐승으로 있었던 것도 바로 화해서 인간으로 됐으니까 짐승은 찾을 것이 없죠. 그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녹음테이프에 자꾸 녹음을 하는 것을, 불가에선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릇을 비워야 담는 대로 바로 담아질 수 있는 거지, 그릇을 비우지 않는다면, 어쭙잖은 거, 아상과 모든 아만과 집착과 욕심 그런 것이 차근차근 담아져 있으면 새로 오는 그 계발적이고 생동력 있는, 지금 현실에 다가오는 문제를 담을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항상 먹으면 싸고 먹으면 싸 버리듯이, 그래야 위가 시원하고 살 멋이 있듯이, 우리는 그릇이 항상 담으면 없어지고 담으면 없어지고, 우리 녹음테이프처럼 그렇게 돼 있는 것이 진리라 이겁니다.

그러니 집착을 하지 마라. 욕심을 부리지 마라. 아상을 갖지 마라. 모든 점에서 그렇게, 일체의 살아나가는 생활이 바로 길이자 없는 길이다. 없는 길이면서도 당당히 이렇게 보이고 걷고 있는 것이다. 걷고 있으면서도 그건 한 발 떼 놓으면 한 발 없어지고 한 발 떼 놓으면 한 발 없어지기에, 나는 이날까지 걸음을 걸어왔다고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는 떼어 놓지 않았으니까 걸음을 걸어갈 거라고 말할 것도 없다 이겁니다.

이게 말이 이해가 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생활에 근본적으로 있는 것을 말을 하지, 없는 것을 갖다가 조작해서 말하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이겁니다. 우리가 지금 없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있는 것대로 고대로 사실대로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보이는 거, 색상으로만, 물질로만 치달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좋은 걸 보면 좋다 그러고, 금방 울 일을 가지고. 금방 좋다고 그것을 웃고 즐겼다가 그 물건이 없어졌을 때는 금방 울 것을 왜 웃고 좋다고 합니까? 금방 또 울 것을 좋다곤 왜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좋아도 좋다고 할 게 없고 언짢아도 언짢다고 할 게 없다는 얘깁니다.

그 반면에 생활이, 모든 것이 그 내 잠재의식 속에서, 하나의 테이프 속에서, 모든 것이 거기서 테이프 소리가 나오는 거니까 거기다가, 바로 내가 지금 현상계에서 살아나가는 그 자체 모든 걸 거기다 맡겨 놓고 돌아간다면, 과거의 인과응보나 유전성이나 모든 악보 같은 문제들이 얽히고설킨 게 다 무너지고 없어진다는 얘깁니다. 어저께 한 일을 생각을 해 놓고 있고, 어저께 한 것을 집착을 하고 욕심이 있고 그렇다면 분별을 지키지 못하고 분수를 지키지 못한 채 건너뛰게 되니깐 물에 풍덩 빠지면 울고불고 야단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이자 불교고 불교자 생활이고, 그 생활을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느라고 사십구 년을 설했답니다. 사십구 년을 그렇게 설했어도 여러분이 여직껏 그 이치를…. 길 없는 길을 우린 발 없는 발로 광대무변하게 우주 천하에 어디에고 아니 닿는 데가 없이 닿을 수 있는 그런 참자유인이 되라고 가르치셨는데 오늘날까지 기복으로 헤매고 돈다면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둘로 보지 않고 관한다는 것은

질문 둘로 보지 않고 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듯하면서도 확연해지지가 않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둘로 보지 않는 게 관하는 거지요. 관한다 이러는 거는 내가 이 사물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모든 것을 용도에 따라서 내가 주인공에 딱 맡겨 놓고 그거를 지켜보는 게 바로 관이에요. 예를 들어서 왜, 요새 이렇게 물질적인 연구라든가 정신적인 연구라든가 어떠한 연구를 한다, 또는 병고가 났다 또 어느 짐승이 지금 죽게 됐다, 개가 죽게 됐다 뭐, 이런 것도 실험하려면…. 실험하려면이 아니라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를 한번 한생각 내서 딱 넣어 놓고선 지켜볼 때에 그게 관이에요. 모든 것을 이렇게 둥글게 해서는 전체 거기다 맡겨서 놓고, 자기가 뭐, 용도에 따라서 온 거 있으면 거기다가 딱 놓고 지켜보는 거, 그게 관이에요. ‘해 주십시오’ 가 아니에요.

‘해 주십시오’ 하면 노예가 돼 버려요! 자기 주인공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기 주인공과 자기가 둘이 아니라는 점. 자유스럽다는 점. 자유인이 되고자 해서 우리가 지금 이런 공부를 하는데 부처님께서도 49년 가르치신 것이 바로 그게 자유인이 되라고 한 거거든요. 왜냐하면 유(有)에서는 유의 법으로 물질적인 이 몸이 움죽거리고, 보이지 않는 데 무(無)의 법은 무의 법대로 내 마음이, 체가 없는 마음의 한생각이 만약에 이 소용돌이, 우주 전체의 소용돌이에, 지금 네 군데고 다섯 군데고 허공에도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앞뒤 없는 그 불바퀴 소용돌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 소용돌이를 나왔다 들어갔다 하려면 이 지금 우리 마음이 착을 두지 말고 욕심 두지 말고 모든 것을 놓는 작업을 해야 내 인식이, 즉 말하자면 불에 ‘아유, 내가 불은 뜨거워서 타 죽지.’ 하고 못 들어가지마는 그 인식이 살아생전에 내가 마음은 불에 들어가도 타 죽을 염려가 없다는 걸 상식적으로 배운다면, 그게 완전히 배워졌다면 착이 뚝 떨어진 거죠. 이 인생의, 이 물질의 착이 뚝 떨어진 거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움죽거리게 되면 이 육체도 움죽거리게 되고, 그 마음이 움죽거리게 되는 건 무의 쪽에서도 쓸 수 있고 유의 쪽에서도 쓸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 불바퀴, 앞뒤 없는 불바퀴 속을 들락날락할 수 있다면 그거는 저승과 이승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된다 이런 소리죠. 그러니 어느 소용돌이 속이라도, 이 땅속을 들어가도 이 마음은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 깊이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한순간에 깊이를 알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지구가 표면적으로 얼마나 되고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그런 것도 자기가 알 수 있고, 그 속이 어떻게 어떻게 된 것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속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거, 과학이나 의학이나 이런 것도 정신계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지금 앞으로는 살 수가 없다 이겁니다. 지금 정치라든가 의학이라든가 또는 회사의 공업이라든가 또는 물리학이라든가 이런 것도 전부, 과학도 전부 정신계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아니 되는 시대가 점점점점 지금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금 물질계로 이론적으로 이게 그르고 이게 옳고 이게 정법이고 이게 저거고 그런다면 어떻게 그 세계에 따라설 수 있으며 앞장설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이 몸으로 뛰는 거는 한계가 있고 지금 연구를 해서 뛰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만약에 어느 인공위성을 띄워 놨다 하더라도 악의 의식이 점령을 하면 그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고 이쪽에서도 그거를 또 못 쓰게 되는 거죠. 하지만 우리 마음의 인공위성은 항상 어디고 지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디고. 그리고 항상 한생각을 내서 쓸 수 있는 것이 마음의 도리란 말입니다.

육신에 대한 집착 놓고 싶어요

질문 육신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싶은데 몸이 많이 힘들 때는 오만 가지 생각으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생사 없는 이치를 배우면서도 이렇게 나약한 자신에 속상합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나는 이렇게 늙을 때까지도 병이 나서 어디를 가서 어떻게 해 보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응신이라는 보살이 즉 자긴데, 자기가 자기 모습을 형성시켜 놓고 어떡할 거예요? 자기 모습을 형성시켜 놨으니까 둘이 아닌데, 자기가 몸을 움죽거리고 다니려면 몸으로도 다녀야 되고, 몸 아닌 자기로도 다녀야 되고, 갖은 각색으로 다 움죽거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잖아.’ 할 때에 그게 결국은 해결이 되는 거죠.

나는 사람들더러도 그러거든요. 어디가 아프다고 하소연을 하고 찾아오면, 당신이 이 마음의 공부를 해서 해결을 보려면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아프면, 즉 자기 주인공에다가 그렇게,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하고 관하면 바로 약사보살이 돼 준다고, 즉 말하자면 일등 가는 의사가 돼 준다고 말해 줍니다. 또 좋은 데로 못 가면 ‘저 사람 좀 좋은 데로 가게 하는 것도 너뿐이잖아.’ 이렇게 하면 또 지장보살이 돼 주고 이러니까, 어느 것이든 어느 이름이든 다 될 수 있고, 이름 아닌 이름도 될 수 있고, 뭐 하나 아니 되는 게 없으니까, 그 이름은 보살이지만 부처님의 도리를 보살들이 다 하잖습니까? 용도대로 말입니다.

예전에 산으로 다니며 공부할 때 말입니다, 가야지 하고 딱 나서서 길을 걷고 있으려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길을 어디까지 걸어야 되는가.’ 그러다가 ‘어디까지 걸어야 하는가도 없지.’ 그러면서 계속 길을 걷다가 어떤 길인지를 몰라서 발이 딱 묶였는데, ‘어떤 길로 가야 합니까.’ 하고 내면에 물으니 아주 천야만야한 낭떠러지, 천야만야한 산 두메, 길도 아닌 그냥 억새풀이 만장한 그런 곳을 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이구, 죽으나 사나 거기가 길이라니 가야지.’ 그러고 반쯤 가다 보니 억새풀에 모두 그어지고 그러니까 찢어져서 피가 나고, 날은 다 저물고 캄캄해지고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무(無)의 길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그랬죠. 그랬더니 웃음이 나잖아요. 그러고선 ‘아, 길은 천지가 다 길이지만 그 천지가 길이라는 걸 알고 네가 실천할 때, 구태여 나더러 묻지 않아도 된다.’ 그러는 겁니다.

우리 사는 것이 어떤 때는 좋고 평탄한 대로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주 억새풀이 빽빽한 소로, 길도 없는 길인 때도 있겠지만 그게 모두가, 깨달으면 한 걸음이고 깨닫지 못하면 천리만리인 거죠. 그래서 나는 그랬습니다.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리라 그거죠. 그래도 나중에 이 스승이 가르쳐 준 그 길을 보면, 세상에 이렇게 편한 것을 가지고 그랬다고 허허 웃음도 짓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아둥바둥거리고 악착스럽게 매달려 있는 바로 그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이쪽 저쪽의 맛을 다 알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길 아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잘못을 해도 관하면 해결되나요?

질문 모든 걸 주인공에 맡기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관하면 해결이 될 수 있는 건가요?

답변 그건 억지죠. “잘못하는 것도 거기다 놓기만 하면 됩니까.” 하는 건 그거는 말이 안 되죠. 그런데 도둑질 열 번 하고도 신부한테 고하면 된다고 그랬거든요. 신부한테 고하면 다 죄가 사한다고 그러니까 아, 이건 잘못해 놓고 만날 고하네요. 그게 나는 모두 시원치 않았다고요. 고하면 뭘 합니까. 찌끄러기는 연방 남아 있는 거를.

그러니까 남한테 얘기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나한테, 나한테서 나온 거니까 나한테다 놔 버려라 이겁니다. ‘나한테서 잘못된 거니까, 잘못되게 한 놈도 너니까 이제는 앞으로 내가 이렇게 잘못되지 않겠다.’ 하는 거를 다짐하면서 또 거기다 놓는 거거든요. 그러니깐 이건 잘못될 일이 없는 거죠. 그게 정말 고해성사지, 내가 잘못한 걸 타인에게 고한다고 해서 그게 고해성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잘못하기 이전에 잘못하지 않으면 고해할 것도 없잖아요.

우리 인간은 고등 동물이 돼서 사회 상식이나 인간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나쁘고 좋은 것을 안다는 겁니다, 본래. 그렇기 때문에 모르고 저지른 죄가 있다면 회개를 하게 되는 겁니다. 회개를 하게 되면, 그 모르고 저지른 것을 테이프에 녹음해 놨으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녹음된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을 바로 지금 현재의 회개하는 마음으로써 지우라는 얘기입니다. 이왕 저지른 걸 어떡하느냐 이겁니다. 이왕 저지른 거라면 다시는 앞으로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왕 저지른 거라면 바로 앞으로 저지르지 않는다는, 거기에서 순수하게 깨달았으면 가면서 그 녹음테이프에다 다시 녹음을 한다면 그것은 모든 게 없어진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겨 놔라. 안되는 건 믿고 놓고, 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모르는 거는 몰라서 놓고, 그래서 모든 것을 몰락 몰락, 자기가 한 발 한 발 떼 놓는 거를 다, “잘한 것도 감사하게 놔라.” 이랬는데 하물며 잘 안된 거를 갖다가 놓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녹음테이프는 24시간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일 초도 못 돼서 또 그 녹음에 또 녹음이 되고 또 일 초도 못 돼서 그 녹음이 또 되고 그러니깐 앞서 녹음된 건 자꾸 없어지면서, 또 자꾸 녹음이 되면서 없어지면서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도 그렇게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할 때, 그놈의 거는 그렇게 해서 내가 가슴에 못이 되고 그것이 여직껏 몇 해를 두고 10년 20년이 가도록 있다는 겁니다. 그거는 자기 생각이지, 자기가 그렇게 붙들고 있는 대로 세월이 그렇게 가만히 있나요? 그러니깐 걸리는 거죠. 그러니 세월 가는 대로 그것도 놔라 이겁니다. 어차피 잘못된 거를 알면 벌써 잘해 나갈 것을 예약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거기다 놓고 그러면은 그것은 없어지고 또 그게 들어오고, 앞으로 잘해 나간다면 잘해 나가는 것이 녹음이 또 되고 말입니다. 그러면 잘하겠다는 것이 또 녹음이 죄 지워져 버리고 잘하는 것이 녹음이 될 것입니다. 또 남이 잘못한 걸 보고 원망한다 하면 또 그놈의 잘된 녹음이 또 지워지고 원망하는 것이 또 녹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원망하고 잘못되고 잘되고 하는 것 모조리 놔요. 그리고 자기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내 마음의 근본인 그 상식을 알아야 하고, 나와 더불어 이 세상이 돌아간다는 걸 알고 모든 것을 겸손히, 자기 위로 부모를 섬길 줄 알아야 하고 아래로는 자기 아래 사람들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몸으로 비유한다면 바로 자기 육신을 올바로 잘 끌고 다닐 줄 알아야 하고 자기 마음을 잘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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