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

사진 왼쪽부터 눈 속의 사냥꾼 (Jagers in de Sneeuw), 1565, 페테르 브뤼헐, 목판에 유채, 117 x 162 cm,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눈 속의 사냥꾼 세부 1, 눈 속의 사냥꾼 세부 2, 화가와 감식가, 1565, 페테르 브뤼헐, 소묘, (자화상으로 추정)  

 

고뇌가 길어지면 깨달음도 깊어질까? 가을 깊어 겨울로 이어지듯, 그렇게 조용한 깨달음과 평화에 이르게 될까? 메마른 이마를 유리창에 기대고 내려다 보는 12월의 거리에 하얀 눈이 내린다. 나뭇가지를 떠나 땅에 떨어지고도 여전히 붉은 낙엽 위로 쌓이는 눈꽃으로 인해, 차마 놓지 못하던 가을을 접고 겨울이 피어난다. 어쩌면 겨울은 첫 눈과 함께 시작된다. 

겨울풍경 관한 최초 풍경화
세계 대한 통찰·관념 보여
사계 순환의 ‘다시보기’ 작업

‘이 곳이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다 / 그의 집은 마을에 있어 / 눈 덮인 그의 숲을 보느라 / 내가 여기 멈춰서 있는 것을 그는 모르리라’

호젓이 깊어가는 겨울 저녁,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와 함께 떠오르는 그림 한 점이 있다. 

페테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 네덜란드, 1525-1569)의 〈눈 속의 사냥꾼(Jagers in de Sneeuw, 1565)〉은 겨울 풍경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풍경화로 알려진 그림이다. 이 작품은 1년 동안 변화하는 총 6개의 그림으로 구성한 연작 중 하나로 12월 혹은 1월 무렵의 정경을 표현한 그림으로 추정된다. 이 연작은 안트베르펜의 부유한 은행가 니클라스 용헬링크(Niclaes Jongelinck)라는 사람이 자신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브뤼헐에게 의뢰했던 작품으로, 애초에 이 시리즈가 모두 12점이었는지 6점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이후 곡절을 겪으며 현재는 5점만 전해진다. 

이 그림에서 언덕 위의 사냥꾼들은 저 멀리 흰 눈에 쌓인 마을을 내려다 본다. 앙상하고 검은 나뭇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몇 마리의 까마귀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거나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며 날아 오른다. 화가, 혹은 화가가 의도한 감상자의 시점은 언덕 위의 사냥꾼들 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기에 그림의 구도에서 사냥꾼 무리들과 언덕 아래 마을은 거의 동일한 수평선 위에 놓여 있다. 

페테르 브뤼헐은 플랑드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16~17세기에 4대에 걸쳐 활동한 네덜란드 남부 지역의 중요한 예술가 가문의 일원이다. 그는 네덜란드 북쪽 브라반트주 브레다에서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생의 전반에 걸쳐 주로 안트베르펜에 정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는 당시 유명했던 안트베르펜의 히에로니무스 코크(Hieronymus Cock) 공방에서 동판화의 밑그림을 그리면서 화가 수업을 시작하여, 1551년에는 안트베르펜의 화가 조합인 성 루카스 길드에 마이스터로 등록하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로의 여행길에 오른다. 

마을 뒤 개천 너머 원경의 너른 들판 오른쪽에는 정수리가 뾰족한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늘어 서 있는데, 마치 알프스의 산맥들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네덜란드는 높은 언덕이나 야산이 드물고 험준한 산맥은 없는 평평한 저지대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실제 존재하는 자연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의 마을의 모습과 브뤼헐이 여행지에서 보았던 자연 풍경을 하나의 화폭에 조합하여 구성한 작품이다. 눈 덮인 평지와 얼어붙은 호수의 풍경이 네덜란드 지형의 특색이라면, 원경으로 보이는 우편 상단의 뾰족한 설산은 브뤼헐이 1550년대에 이탈리아로 여행을 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알프스의 지형을 연상시킨다.

다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브뤼헐은 그의 길지 않은 대부분의 생애 동안 이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브뤼헐의 생애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1551년 성 루카 조합의 입회등록, 1563년에 스승인 피터르 쿠케 반 알스트의 딸 마이켄 쿠케 반 알스트와 결혼할 때 브뤼셀의 노트르담 드라샤펠 성당에 남겨진 결혼기록, 그리고 1569년에 같은 성당에서의 장례기록이 브뤼헐에 관한 공식기록으로 남아있다. 코크의 판화 가게에 출입하던 당시의 저명한 도덕사상가인 D.V.콜른헤르트와의 교류를 통해 브뤼헐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화가로 성장한다. 1559년부터 브뤼헐은 서명을 ‘Brueghel’에서 ‘Bruegel’로 바꾸고 본격적인 유채 화가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브뤼헐은 〈눈 속의 사냥꾼〉을 그린 같은 해에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스케이트와 새 덫이 있는 겨울 풍경 (Winter Landscape with Skaters and a Bird Trap, 1565)〉을 그리고, 이듬해에 또 다시 〈베들레햄에서의 호구조사 (Census at Bethlehem, 1566)〉에서 눈 덮인 겨울 풍경을 그렸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서양 미술사에서 겨울 풍경을 그린 작품은 뜻밖에도 흔하지 않다. 풍경은 회화에서 그 자체로 독자적이고 중심적 소재라기보다는 대체로 인물화의 배경, 역사적 주제, 신화, 종교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부수적인 차원의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브뤼헐은 계절 연작을 통해서 미술사에서 풍경화를 회화의 장르 중 비중 있는 분야로 끌어올린 작가로 일컬어진다. 그의 풍경화는 특유의 파노라마적인 화면 구성으로 세계에 대한 통찰력 있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슈 Hieronymus Bosch(1450~1516)의 영향으로 파악되는 브뤼헐 작품의 파노라마적 연출은 일종의 ‘인생극장(theatrum vitae humanae)’ 혹은 ‘세계극장 (theatrum mundi)’으로 제시된다.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은 얼어 붙은 못 위에서 얼음 썰매, 스케이팅, 하키, 컬링 등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겨울 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 눈길을 따라 짐마차가 지나가고, 못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위로 추운 날씨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줄 땔감을 지고 가는 사람도 보인다. 하키나 컬링을 올림픽과 같은 행사에서 스포츠 종목으로나 알고 있던 우리들에게는 수백 년 전 그림 속 북유럽의 민속 놀이로 묘사된 이런 모습은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브뤼헐은 북유럽 전통의 사실성과 이탈리아에서 배운 엄격한 선(線)의 묘사를 통한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화풍을 만들어 내었으며, 네덜란드 특유의 전통적 기법을 발전시키면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에 관련된 주제를 작품에 도입한 화가로 평가 받는다.

브뤼헐의 작품세계에서 그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도시 안트베르펜은 16세기에 접어들어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서 많은 부를 축적하면서 유럽 문화의 주요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당시 안트베르펜은 출판 산업의 센터로서 유럽 지식인의 주목을 받았다. 안트베르펜이 국제적인 출판 거래 센터가 됨으로써 저술가인 학자나 인문주의자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고, 자연스럽게 높은 지적 문화 수준의 환경이 형성되었다. 특히 이 도시는 당시 플랑드르 내의 우의 도상집(emblem books) 출판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한 문화, 사회적 배경은 브뤼헐의 작품세계를 꽃피운 풍요로운 토양이었다. 

사냥꾼 행렬이 지나가는 길 옆에는 여관이 있다. 화폭을 가득 덮은 하얀 눈과 여관 집 벽돌담의 붉은 색조가 명료한 대조를 이룬다. 여관 앞에서 몇 명의 사람들은 건초를 태워 돼지를 불에 그을리고 테이블을 옮기는 등 추운 날씨에도 일에 열심이다. 건초를 태우는 불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솟구치는 모습을 보면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 같다. 여관의 간판은 한쪽 고리가 떨어져 기우뚱하게 걸려 있다. 간판에는 ‘Dit is inden hert’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이것은 사슴 뿔 속에 있다’라는 뜻이다. 사냥꾼의 수호 성자인 성 후베르투스가 사슴 뿔에 나타난 십자가의 형상을 보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후베르투스의 개종을 의미하는 간판이 기우뚱하게 걸린 것은 실패한 사냥을 풍자하는 듯하다.

종교가 삶을 지배하는 규범이었던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세계관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다소 특이하다. 브뤼헐의 그림에서 인간은 신의 명령에 따라 군림하는 자연의 지배자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다. 어떤 평자들은 브뤼헐의 여러 작품에 나타난 상징, 은유를 통해 신플라톤주의 및 그노시스 주의의 영향을 읽기도 한다. 혹은 북유럽의 이교적인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무엇이 되었건 브뤼헐의 이 그림은 기독교적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으나, 그것은 순수한 기독교 교리의 해석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이라기 보다는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서 이해된다. 브뤼헐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맹목적 믿음의 반영이 아니라, 일종의 ‘저항’이었으며, ‘다시 바라보기’의 작업이었다. 

행렬의 주변에 여기저기 흩어진 토끼 발자국은 그들이 토끼 사냥에 실패했음을 알려주고, 사냥이 아니라 오히려 토끼에 의해 조롱 당한듯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러 마리의 사냥개를 데리고 간 사냥꾼들은 겨우 조그마한 여우 한 마리로 만족하며 지친 발걸음을 마을로 옮기고 있다. 거기에는 명시적인 지배의 이미지는 없으며, 결정적인 허무나 무기력의 상념도 없다. 다만 인간 삶의 조건이 그러할 뿐이고 겨울의 숲이 그러할 뿐,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이미지가 존재할 뿐이다.

〈눈 속의 사냥꾼〉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풍경화이지만, 세부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장르화적인 특성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사냥꾼과 사냥개 무리, 얼음 위에서 겨울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과 아울러 화폭 전체에서 작고 세밀하게 표현된 많은 세부 사항들은 460 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관객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구성된 화폭 전체에서 천천히 세부로 내려가다 보면, 대자연 속의 자그마한 마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보인다. 또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다양한 세부 이미지로부터 차츰 물러나서 다시 그림 전체를 보면, 이 작품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소우주처럼 느껴진다. 세부의 작은 부분들에 대한 묘사를 찬찬히 살펴 보면, 이 그림은 그 당시 북유럽 화단에 유행했던 ‘장르화’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이 전해주는 자연의 이치와 더불어 계절의 변화에 배우는 의미를 새겨보게 된다. 당대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는 〈수상록 (Essais, 1580)〉에서 ‘나는 인생의 어린 풀을 보고 꽃을 보았으며, 그리고 지금은 쓸쓸하게 시든 그 겨울철의 모습을 보고 있다. 행복하도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지금 걸린 병도 와야 할 때 와서 나의 긴 행복을 회상하게 해 주는 것이니, 나는 더욱 조용히 그것을 견디어내고 있다.’고 썼다. 지금 이 순간, 내게 다가오는 행이든 불행이든 모두 기꺼운 환대로 받아 들이고, 안으로 절로 깊어져 단단해지는 계절, 겨울이다.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은 묵묵한 침묵과 함께 걷는 자이고, 그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이 남아 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시간의 마디를 통해 ‘마지막’과 ‘다시 처음’의 참된 의미를 짚어보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을 견뎌야 향기로운 새봄을 맞는 이치를 배운다. 당시 북유럽의 역동적이고 과도기적 시대와 사회에 대한 냉철한 관찰자였던 브뤼헐의 작품 안에서 소우주와 사계의 순환과 겨울 풍경은 그 자체로 ‘무정설법(無情說法)’이 되어 말을 건넨다.

모든 존재는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며,
어디로도 생겨난 곳도 없다.
그러므로 분별할 수가 없다.
모든 사물은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고,
생 (生) 한 것이 아니니 멸(滅)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는 여래를 보게 될 것이다.

〈화엄경(華嚴經)〉 제 16장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設偈品) 중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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