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를 돌아보게 만든 세 사람

잘 알면서도 잘 몰랐던 것들

얼마 전 내가 속한 화전매구보존회 어른 몇 분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오랫동안 매구로 단련된 분들이고, 누구보다 남해와 매구를 사랑하고 아끼는 분들이다. 한 해를 마치면서 보존회는 그간 공연을 하느라 고생한 단원들에게 공연비로 받아 적립된 금액을 수고하신 만큼 배분해 주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한 고마움을 전하고자 한 일이었다.

불교주도개혁의 반발
불교 ‘요승’ 오해 생겨
새로운 혁신 인식 필요

나는 행사에 빠진 적이 없어 가장 많은 액수를 수령하게 되었다. 올해가 1년 차라 그런 배려가 있는 줄도 몰랐다. 어쨌든 갑자기 거액의 공돈(?)이 생긴 셈이다. 받은 돈을 어떻게 쓸까 함께 궁리했다. 몇 가지 우스개 농담 끝에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나를 위해 마음 써 주신 분들에게 작은 보은(?)의 자리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내년이면 벌써 2020년이라는 감회가 흘러나왔다. 자연스럽게 새 천 년이 시작될 즈음의 회상들이 쏟아졌고,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할 2002년 월드컵 때의 감격도 술잔 위로 떠돌았다. 그리고 그 시절이 참 좋았다는 야릇한 감상(感傷)의 말도 이어졌다.

그때 내 머릿속에 “가장 좋은 시절은 바로 지금이고, 가장 좋은 사람들은 오늘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말을 꺼내고 보니 나 자신도 수긍이 되었다. 오늘을 막 살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홀대하거나 외면한다면, 나는 소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주변에서 나와 함께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남해에서 산 지 7년째인데, 정말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서 만났다. 몇몇을 빼고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돌아가신 분도 있고, 병환에 시달리는 분도 있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서울에 살 때도 잘 알던 분들(그때도 모두 작고한 분들이었지만)이 남해 출신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작곡가 이봉조와 소설가 정을병, 국문학자 정병욱이 그 분들이다.

이봉조(李鳳祚, 1832-1987)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 드물 듯하다. 색소폰의 명인으로, 〈안개〉, 〈꽃밭에서〉, 〈무인도〉 등 지금도 애창되는 명곡을 남겼다. 그가 연말 TV무대에 나와 색소폰을 연주하고 자작곡으로 기억되는 “아아, 오늘도 떡국 한 그릇 더 먹어야지”하며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그의 고향이 남해였다. 이후 그가 더 좋아졌다. 남해에 이봉조 기념관을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정을병(鄭乙炳, 1934-2009)은 내가 작가를 꿈꾸던 고등학교 시절 가장 즐겨 읽었던 소설가였다. 그는 발표한 작품은 한결같이 비범했고, 진지한 고민거리를 내게 안겨주었다. 〈육조지〉와 〈까토의 자유〉 〈받아들인다는 문제〉 〈개새끼들〉 〈유의촌(有醫村)〉 〈아테나이의 비명(碑銘)〉 〈말세론(末世論)〉 등은 지금 읽어도 신선하다.

특히 〈육조지〉는 법원 주변에서 벌어지는 세태를 시니컬하게 폭로해 당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형사는 때려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지고, 간수는 세어 조지고, 죄수는 먹어 조지고, 집구석은 팔아 조진다”는 소설의 한 구절은, 요즘 검찰과 법원 주위를 망령처럼 떠도는 부조리와 적폐를 떠올리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정을병은 고향 남해에서 그리 인기 있는 사람은 아니다.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그가 생전에 고향을 두고 한 발언 때문에 그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학관도 남해에 세워지지 못했다. 사람이란 죽으면 고향에 와서 휴식하는 법인데,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정병욱(鄭炳昱, 1922-1982)은 내가 막 대학에 들어와 문학과 관련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을 때 눈을 번쩍 뜨게 만든 저술의 저자였다. 그때 내가 읽은 그의 저서는 〈한국고전시가론〉을 비롯해 〈한국고전의 재인식〉 〈한국의 판소리〉 등이었다. 당시 정병욱은 서울대 교수로 있었는데, 대학 2학년 때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훗날 대학원에 들어가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공부하면서 나는 정병욱과 같은 학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정병욱은 시인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 원고를 보존해 시인 윤동주를 있게 만든 장본인으로도 유명하다. 만약 그 원고가 분실되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정병욱은 여섯 살 무렵 남해를 떠나 하동에서 살아, 지금도 어떤 글에는 그의 고향을 하동이라 표기하는 오류가 보인다. 그는 고작 60년을 살다 갔지만, 국문학에 남긴 업적은 천 년의 세월에 견줄 만하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의 고향이 남해라니, 그들이 남긴 훈김이 지금도 남해를 떠돌고 있을 것 같아 더욱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그들은 정말 요승(妖僧)일까?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잘못된 편견이 정설인 것처럼 알려진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요승(妖僧)’이라는 해괴한 지칭이다. 사전 상의 뜻으로 보면 요승은 ‘정도(正道)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러운 승려’로 되어 있다. 그런 요승이 물론 있긴 할 것이다. 역사와 세상을 망가뜨린 요유(妖儒)만큼 많지는 않겠지만.

우리 역사에서 요승으로 불린 스님은 셋이다. 고려시대의 묘청(妙淸, ?-1135)과 신돈(辛旽, ?-1371), 조선시대의 보우(普雨, ?-1565)가 그들이다.

묘청은 수도를 개경에서 평양으로 옮겨 국정을 쇄신하자고 하면서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金國征伐)을 내세워 고려가 자주국임을 선포하고자 했다. 개혁에 앞장섰고 국왕도 찬동했지만, 김부식을 비롯한 보수적인 유가 세력의 반대에 밀려 좌절되었다. 이에 평양에서 의거를 일으켰는데, 김부식이 앞장서 이를 진압했다.

김부식은 반란의 싹을 뽑는다면서 고구려나 발해와 관련된 사료들을 깡그리 없앴고, 자기 입맛에 맞는 역사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이 책에서 발해와 가야의 역사는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묘청은 세상을 어지럽힌 ‘요승’으로 낙인이 찍혔다.

신돈 역시 공민왕과 함께 고려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승려이면서도 성균관 재건에 힘을 실었고, 외세에 의존하려는 썩은 유림(儒林) 권력자들과 당당히 맞섰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오래 가지 못했고, 권모술수에 능란했던 유림들의 농간으로 공민왕의 신임마저 잃고 말았다.

결국 신돈은 역모를 꾸몄다는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쓰고 수원으로 쫓겨났고, 거기서 살해 당했다. 왕의 심기를 흐리게 한 ‘요승’이라는 굴레는 당연히 씌었다. 유림들의 모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민왕 사후 등극한 우왕과 창왕이 모두 신돈의 자식이라면서 퇴위시키더니 둘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다.

조선은 철저하게 불교를 배척했다. 그 결과 조선의 불교는 쑥대밭이 되었다. 씨가 말라가는 조선 불교에 소생의 비를 뿌린 이가 보우였다. 어린 명종의 섭정을 맡은 문정왕후가 병 때문에 경기도 천보산 회암사에 머물러 있던 그를 불러 불교 융성의 임무를 맡겼다. 보우는 뜻을 받들어 3백여 개의 사찰을 국가가 공인한 정찰(淨刹)로 정했고, 도첩제를 실시해 2년 동안 4천여 명의 승려를 선발하는 한편, 승과시(僧科試)를 부활시켜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같은 인재들을 발탁했다.

그렇게 꽃을 피우나 했던 불교는 문정왕후가 죽자 다시 철퇴를 맞았다. 유신(儒臣)들의 상소로 제주도로 귀양을 간 그는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당연히 보우는 ‘요승’의 반열에 올랐다. 승과에서 뽑았던 승려들이 주축이 되어 임진왜란 때 승의군(僧義軍)을 조직해 나라를 구한 일을 생각하면, 보우를 ‘요승’이라 비난했던 유신들이야말로 ‘요유’였음이 자명해진다.

이렇게 ‘요승’으로 지목된 세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유가들에게는 눈엣가시 같던 인물이었다. 그들은 변화와 개혁을 꿈꾸었고, 기득권이었던 유가들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오로지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고도, 그 죄악을 면하고자 세 스님에게 ‘요승’이라는 고깔을 씌웠다.

지금도 이 세 스님을 두고 ‘요승’ 운운하는 사례가 없지 않다. 이들을 복권하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청백리를 우대했던 조선?

500년 넘게 이어진 조선시대를 한 마디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나에게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라고 묻는다면 조선시대는 ‘우리 역사의 암흑기’였다고 말하는 데 주저할 생각은 없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해 망했어야 했다. 억지로 목숨을 연장하더니 나라를 이민족에게 빼앗기는 참상을 빚어냈다. 조선 후기 실학(實學) 운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개살구’의 빛만 보고 떠드는 상찬(賞讚)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천은 없이 한문(漢文) 제일주의에 눈이 멀어 탁상공론을 펼쳤다고 나는 본다.

조선시대 때 청렴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올곧은 자세로 백성들을 돌본 관리들을 일컫는 말이 있다. 이들을 뭉뚱그려 ‘청백리(淸白吏)’라 부른다. 청백리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여럿 있다.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책에는 조선시대에 표창된 청백리 218명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와! 그렇게나 많나! 놀랄지도 모르겠고, 이 숫자보다 더 많았다고 여겨지지만, 5백 년 역사에 2백 명이 조금 넘으면 2년에 한 명 꼴로 나왔다는 소리다. 쉽게 말해 조선시대 청백리는 아주 희귀한 존재였다.

청백리에 대척되는 자리에 선 관리를 우리는 ‘탐관오리(貪官汚吏)’라 부른다. 이도저도 아닌 관리도 있었겠지만, 조선은 탐관오리의 나라였다. 노자(老子)는 “세상에 불효가 판을 치자 효자(孝子)란 말이 나왔고, 역적들이 바글거리자 충신(忠臣)이란 말이 나왔다”고 갈파했다. 얼마나 탐관오리가 많았으면 청백리를 떠받들었겠는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개고생 끝에 나라를 열고 황제가 되었다. 평민 시절 탐관오리의 만행을 목격한 그는 자기 왕조에서는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작정해 발각 되는대로 처형을 시켜버렸다. 그러나 그래도 끝없이 탐관오리들이 창궐하자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공무원들이 청백리인지 탐관오리인지는 판단을 보류하자. 그러나 정직하지 못하고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들이 눈에 거슬린다고 해서 가까운 곳에 항상 있는 소중한 사람, 성실한 ‘머슴’들까지 잊어서는 안 될 듯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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