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법련사

경복궁 동십자각 사거리에 위치한 법련사 전경. 법련화 보살의 보시와 김우중 회장의 후원으로 지어졌다.

법련화 보시와 재벌 후원 콜라보

안국동에서 경복궁을 향해 걷다가 동십자각을 보고 오른쪽으로 돌아 삼청동 쪽으로 가다 보면 법련사가 있다. 이곳은 1973년 11월 김부전(법련화) 보살이 종로구 사간동의 대지와 건물을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로 희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재벌의 후원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하였다.

1922년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한 김부전은 1940년 금강산 정양사에서 설법을 듣고 발심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거처를 옮긴 그녀는 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서울 도봉산에 불교양로원을 설립하였고, 1953년에는 경기도 의정부에 광명보육원을 설립하는 등 신앙심이 바탕이 된 복지활동을 시작하였다.

1954년 이후 정화운동을 지지하면서 만난 효봉 스님의 ‘수행자는 될 수 있는 한 가난해야 하며, 물건을 적게 가져야 조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무소유 가르침을 받고 자신이 모은 재산을 불교와 사회를 위해 나누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보조사상硏 두고 학술연구
불교사상 비교·발전 토대
한국불교 대중화 이끌 터전

사업에 수완이 있던 그녀는 1957년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 사장이 되었고, 재산을 모으면서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58년 마야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조계사 불교정화운동 기념회관 건립 등에 큰 공덕주가 되었다. 이어 1959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의 섭외부장과 부회장을 맡는 등 여러 공적활동을 이어나갔다.

효봉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그녀는 송광사와 많은 인연을 지었다. 중창불사는 물론 효봉 스님의 다비식과 사리탑 건립에 큰 공덕주가 되었다. 그리고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립되자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한편 후원단체인 서울불일회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73년 11월 세연의 다함을 느낀 보살은 종로구 사간동 자택을 조계총림 서울분원으로 할 것을 유언하였다. 송광사로 내려간 그녀는 17일 구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수행자로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오후 3시 눈을 감았다. 자택은 그녀의 법명을 따라 법련사가 되었다.

1974년 송광사 서울 포교당된 연 법련사는 오래된 한옥인 탓에 1990년대 이르자 많이 낡은 상태가 되었다. 이곳이 지금의 대웅보전이 들어서 도심포교의 장이 된 것은 얼마 전 타계한 김우중 회장과 부인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

김 회장은 천주교 신자였지만 부인 정희자 여사는 독실한 불자였다. 그들에게 슬픔이 있었다. 1990년 미국에서 유학하던 장남 선재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 한 것이다. 23세의 금쪽같은 아들을 잃은 내외는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부인의 마음을 위로할 겸 송광사를 찾았다. 불일암에 있던 법정 스님을 만난 내외는 서울에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서울 법련사에서 김 회장 내외와 법정 스님, 현호 스님이 재회하였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히 낡은 법련사 재건이 화제가 되었다. 이야기를 듣고 독실한 불자인 정희자 여사가 남편에게 “우리 선재를 위해서 절을 지어 드리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즉석에서 재건축을 약속한 김 회장의 후원과 오래 동안 법련사를 원찰로 신행 할동을 한 불자들의 동참으로 1996년 현대식 디자인의 법련사가 건립되었다. 김 회장은 사돈인 금호그룹 일가와 함께 범종을 조성하였다. 3층 대웅전 앞에 걸려 있는 종이 그것이다.

작은 사찰에 담긴 큰 의미

법련사의 시작이 1974년이고 1996년 5월 지금의 대웅보전을 갖추었으니 연혁 만으로 보면 서울의 여느 사찰보다 미약하다. 그러나 법련사에 담긴 시대적 의미를 음미하면 결코 작지 않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수많은 수행자가 배출되었다. 고구려의 승랑, 백제의 겸익, 그리고 신라의 원광 자장 원효 의상. 이름만 들어도 그들의 활동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고려와 조선시대 역시 많은 수행자가 배출되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한국불교는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현재까지 이르렀다.

오래전부터 한국불교사를 공부하면서 고승 가운데 어는 분이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을까 고민해 봤다. 처한 시대와 활동이 모두 다르고 당시의 영향을 생각하면 모두가 강호의 맹장이라 구별이 어렵다. 그러나 중생의 분별심을 동원해 구분하면 현재까지 전해지는 영향력에 있어 보조국사 지눌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구분은 절대적으로 필자의 개인적 생각이다.

송광사를 중심으로 계승된 보조사상을 보면 역사적 유구함이 크다. 고려시대에는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을 시작으로 면면히 이어져 200년이 넘도록 계승되었고, 배불이 심했던 조선조에도 불교의 규범만큼은 보조국사를 따랐다. 중기까지 서산 휴정에 의해 보조국사의 선교일치 등이 계승되었다.

근대불교에서 보조국사의 사상을 재흥하고자 노력한 수행자는 경허 스님이었다. 그는 근대불교의 중흥조로 쓰러져 가는 불맥을 유지하기 위해 1899년 해인사 조실로 주석할 때 수선사를 결성하고 선의 중흥을 도모하였다. 그에게서 법을 배운 만공 스님과 한암 스님 역시 결사를 조직하고 선풍을 진작시켜 보조국사의 결사정신을 계승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종풍 계승은 면면히 이어졌다. 그 중심인물이 효봉 스님이었다. 그는 불교의 중흥과 선풍진작의 뜻을 세웠고, 필요한 수행자를 양성하기 위해 제2의 정혜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일에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3년의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 이런 결사정신을 계승한 구산스님은 송광사에 수선사를 재건하여 결사의 정신을 되새기데 주력하였다. 고려, 조선, 근·현대를 걸친 영향이 아닐 수 없다.

보조국사 지눌 이외에도 한국불교에 영향을 끼친 고승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조국사를 가장 먼저 꼽은 것은 국사의 행적과 사상이 현대화되어 그 누구보다도 대중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보조국사의 현대화 대중화에는 법련사의 역할이 크다.

법련사는 송광사 서울분원이다. 송광사가 어떤 곳인가? 한국불교의 승보사찰이다. 보조국사 지눌 이후 16국사가 배출되어 한국불교 수행의 대명사가 된 곳이다. 이런 까닭에 법련사 역시 그 연원은 짧지만 보조국사의 사상적 유훈을 널리 알리려 노력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보조사상연구원의 활동이다. 연구원은 1987년 2월 송광사에서 창립되었지만 활동 대부분 이곳 법련사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까닭에 송광사가 고려, 조선, 근대를 거쳐 지속된 전통을 계승한 곳이라면 법련사는 그런 보조사상을 현대적 언어로 표현하고 그 내면을 성찰하는 학술적 꽃을 피운 곳이다. 작은 사찰이지만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법련사와 보조사상연구원

1987년 2월 22일 송광사는 보조사상연구원을 개원하였다.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불일보조국사의 사상과 가풍을 연구 계발하여 정신문화창달에 기여하고, 한국불교의 중흥으로 불국토 건설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을 통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구도적 자세였다.

연구원은 그런 취지를 살리기 위해 사업방향에 있어 첫 번째 보조국사의 사상과 종풍의 연구계발 및 선양을 위한 일과, 보조국사 전서의 간행과 연구논문집의 간행 및 번역 학술발표 등을 하였다. 그 결과 1989년 <보조전서>가 간행되었다. 이때 간행된 전서는 지금까지 간행된 보조 저술의 여러 판본을 대조 교열하고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아 하나의 정본을 만들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특기할 것은 수많은 전적을 들추어 가면서 본문에 나오는 인용문의 출처를 밝혀 보조사상 연구에 깊이를 더했다.

1987년 11월 제1집이 발간된 학술지 ‘보조사상’은 현재 제55집으로 이어졌다. 매월 진행된 월례발표회는 133회에 이르렀고, 매년 가을 개최하는 정기학술대회도 27차에 이르렀다. 그리고 창립 이후 격년으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 역시 보조사상은 물론 한국불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법련사가 보여준 새로운 지평

이와 같은 보조사상연구원의 활동으로 보조국사에 대한 연구는 그 양과 질에서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1990년대에 이르면 보조를 연구하는 학자의 층이 두터워져 박사학위 논문이 12편이 제출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연구논문 역시 152편이 발표되어 한국불교계에 보조 연구의 정점을 이루었다.

연구된 내용을 보면 선사상이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불교사상의 비교, 돈오점수, 보조의 역사적 위상, 보조와 다른 사상과의 비교연구, 정혜결사, 그리고 조계종 법통에 관한 연구 순이다. 이때 연구의 담당자 대부분이 젊은 연구자였다. 이들은 1987년 설립된 보조사상연구원이 젊은 회원들을 모집하여 1990년대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한 결과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젊은 학자들이 보조국사에 대해 왕성한 연구를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불교 내에서 보조사상의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 현대에 이르러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와의 논쟁에서 보조의 선이 돈오점수를 지향하였다고 해서 그 가치를 하향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조국사는 현대 불교 학자들에게 영향을 줄만큼 사상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1990년대 이르러 한국불교에서 일어난 비승가적 모습에 대한 반성적 의미에서 보조국사의 가르침이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보조국사는 무인정권 시대에 권력지향적인 불교계에 자정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런 가치는 800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가장 절실한 가치로 인식되어 미래에도 한국불교의 좌표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불교가 현대화되고 대중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화, 대중화는 옛 전통을 박제된 모습으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적 언어로 그 내면의 세계를 성찰하고 대중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재탄생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법련사는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800년 전 인물인 보조국사 지눌을 현대의 대중들에게 새롭게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한 사찰이다.

한국불교사에는 고승이 많다. 그가 활동한 사찰도 많다. 어느 곳이던 30년 지속해서 연구하면 현대화, 대중화 된다. 어떤 불사보다 뛰어난 불사이고 한국불교가 반드시 가야할 방향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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