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희양산 봉암사 수좌 적명 대종사는 1939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제주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학적 고뇌로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하셨다. “그러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을 치른 후 묘소를 잘 꾸며드린 후에 가겠습니다.” 하니, 어머님이 묵연히 허락하셨다.

선지식을 찾아 뭍으로 나와 나주 다보사 雨華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1960년 해인사 자운 율사에게 사미계를, 1966년 해인사 자운 율사에 의해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사형인 眞常 스님의 권유로 관세음보살을 관하는 관법 수행에 매진하던 중, 어느날 삼라만상 극락 지옥이 눈앞에 보듯이 뚜렷한 것을 체험하고, 진상 사형의 권유로 당시 선지식인 범어사 동산, 통도사 경봉 스님 등을 참알하였으나 그분들의 법어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환의심에 들떠 자부에 매몰해 있었기 때문이다.

26세에 토굴에서 우연히 보조국사의 절요를 읽다가 수행을 하려면 모름지기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는 구절을 보고, 마음에 크게 느껴 무자화두를 들기 시작하였다. 28세에 해인사로 가서 1967년 해인총림이 개설되자 50대 방장 성철 스님이 방장에 추대되어 선풍이 일기 시작하자 가행정진한 이래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 선지식인 전강, 경봉, 성철, 서옹, 향곡, 구산 스님 등 문하에서 법을 묻고 정진하였고, 능엄경 42변마장의 내용이 낱낱이 사실임을 체험하고 화두선에 더욱 매진하였다.

영축총림 통도사 선원 선원장, 고불총림 백양사 선원 선원장, 수도암 선원 선원장, 은해사 기기암 선원 선원장 등을 역임하고, 전국수좌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9년 정월 구산선문 중 하나이자 봉암사 결사의 전설적 청정도량인 봉암사에 주석, 대중의 추대로 수좌 소임을 맡은 후 입적하는 날까지 대중과 함께 정진, 운력, 공양하는 등, 후학에게 수행자의 본분을 보였다.

간화선 선풍을 진작하고자 외호 대중의 도움과 문경시와 협의 아래 국제선센타를 발원하여 2015년 선원수좌회와 공동으로 문경세계명상마을 건립을 본격 추진하고, 평생 청빈한 삶으로 돌보는 이 없이 쓸쓸이 죽어가는 수행자를 위해 수좌복지회를 만들 것을 제의 성사시켰으며, 봉암사에 원로 수좌를 모시기 위해 원로선원을 건립하였다.

스님은 오로지 본분사에만 매진하고 선방 밖의 일에는 거의 돌아보지 않았으나, 간혹 법을 묻는 이가 찾아오면 다양한 비유와 유창한 설법으로 대중을 감통케 하되, 중도교의가 불교의 근본임을 설파하며 화두선이야 말로 중도를 바로 체험하고 깨닫는 가장 지름길임을 강조하고 설사 화두 타파를 하지 못하더라도 일상 생활을 활기차게 영위할 수 있는 공능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2018년 종단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하고, 20191224(동짓달 스무여드레)에 입적하니, 세속 나이 81, 법납은 59세였다. (봉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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