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사는 게 부처님 유훈 실천

화두 들고 견성성불하는 것은
근본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다.
경전공부·염불·봉사 하는 것은
계정혜 터득 ‘취’ 절제하는 것
취의 절제 ‘무명 타파’ 지름길

그림. 강병호

육입이라는 것
육입(六入, salayatana)은 육근으로 하여금 육경을 느끼게 하는 환경이다. 육입은 안·이·비·설·신·의하고는 다르다. 그런데 분명 안·이·비·설·신·의는 아닌데 안·이·비·설·신·의가 나타날 수 있는 근거가 육입에서 생기게 된다.

6근인 안·이·비·설·신·의는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인식기관,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인식기관, 맛을 볼 수 있는 인식기관, 들을 수 있는 인식기관, 볼 수 있는 인식기관,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의 형성, 이런 것들이 다 명색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육입단계이다.

육입이 만들어지면 촉을 느낄 수 있는 단계가 된다. 육입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이다. 육입 중에서 보는 기능이 없는 동물은 형상을 볼 수 없는 동물이 되며 또 들을 수 있는 기능이 없는 동물은 들을 수 없는 동물이 되는 것이다.

육입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은 고등동물인 인간과 포유류이다. 또 동물들의 진화속도에 맞춰 어떤 동물들은 네 가지 혹은 세 가지를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 중에 육입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촉이라는 것
육입이 만들어지고 나면 주위에 있는 것과 부딪침으로써 촉(觸, phassa)이 일어난다. 여섯 가지 인식할 수 있는 기관이 명색으로부터 진화되어 육입이 만들어지고 이 육입을 통해서 부딪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촉을 느낄 수 있다. 촉은 중요한 사안이다.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근본출발이 바로 촉이다. 그래서 6근과 6경과 6식이 부딪혀서 촉이 만들어진다.

기억이 깨어지는 단계가 바로 촉이다. 촉의 단계에 오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깨뜨리고 앞에 선행했던 것들을 새롭게 인식한다. 6경과 6근과 6식이 항상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새롭게 부딪침이 일어나는 단계이다. 기억이 깨어지는 단계가 촉이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항상 머릿속에 한 번 일어났던 것은 다 기억한다.

그러나 세포들도 점차 늙어가고 생각이 많이 축적됨으로 인해 이것이 일어났던 것인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지, 있었던 것인지 없었던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살아 있다가 죽는 단계, 하나의 상태가 새롭게 바뀌는 과정이 촉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나는 상황이다. 촉에서 기억들이 깨어지는 것은 살아 있다가 죽는 것이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났을 때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생에 있었던 것을 기억 못하는 것이 바로 촉 때문이다.

참선을 하면서 생각을 가라앉혀 보라. 번잡하게 일어나고 있는 생각들을 가라앉히면 전생도 기억날 수 있고 전전생도 떠오를 수 있다. 깨어졌던 것을 다시 재구성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생이라 하는 것은 촉이 깨어져서 깨어지기 전의 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힘에 의해 얼마든지 내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전생을 볼 수 있게 된다. 끝없이 나를 정화시킴으로써 깨어진 촉을 재구성하여 전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수라는 것
촉이 있고 난 다음엔 항상 수(受, Vedana)가 일어난다. 느낌이 있고 나면 애욕이 생긴다. 촉과 수와 애에서 시간연기는 끝나버렸다. 그러나 12연기는 여기서도 계속 상황이 이어진다.

눈으로 TV 속의 김태희를 본다고 하자. 근이 경으로 나아가 즉 눈으로 김태희를 보는 순간 촉이 이루어지며 항상 느낌, 수가 일어나게 된다. 수가 구체화 되면 애욕으로 넘어가게 된다. 수에서 알아차림으로 느낌을 정제시키고 객관화 시키면 애욕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자기화가 되지 않은 객관적인 애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예쁜 데, 마음에 드는 데 등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이 어떤 형태로의 거기에 해당하는 상을 만들어 저장되며 식으로 인식이 된다. 그러면 애욕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수의 단계에서 느낌을 알아차려 애로 넘어가는 회전을 멈추게 하여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이때 알아차리는 것이 알아차림의 공부이다. 먼저 편안하게 합장한 자세로 눈을 지긋이 감고 오른발을 들어 놓고 다음 왼발을 들어 놓고 교대로 한다. 이때 생각을 들어나가는 발 끝에 모으며 발을 들고 나가고 놓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애라는 것
애욕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형상에 대한 애욕, 감정에 대한 애욕으로 결국 취를 만들어낸다. 애욕은 자꾸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 한다.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 하는 애욕에 의해 물질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 감정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취하게 된다. 애욕이 생김으로써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애(愛, tanha)는 느낌과 감정의 결과로 생기는 갈애이며, 느낌에 의해 좋은 감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갈애가 생긴다. 애는 욕애, 유애, 비유애가 있다.

욕애는 색·성·향·미·촉·법에 대한 욕망이며, 유애는 인간의 정의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욕망으로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다. 비유애는 그 밖에 일어나는 생명에 대한 욕망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연기가 회전한다. 이것은 순간의 윤회가 계속되는 것이다. 부처나 아라한이 아닌 모든 생명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끝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느낌이다. 그런데 이 느낌을 그대로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좋은 느낌을 원한다. 이렇게 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 바로 갈애이다.

그래서 깨달음(알아차림)이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느낌과 갈애, 두 가지가 소멸되어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집착을 하고 업을 생성하여 미래에 태어날 조건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윤회를 하는 것이다.

또 눈으로 대상을 보고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일어났을 때 미워하거나 싫어하는지 살펴보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모르고 계속 미워하면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는 갈애가 생긴 것이다. 계속 미워한다는 것은 미워하는 것을 좋아해서 집착하는 것이 된다. 무엇인가 좋아서 계속하는 것이다. 싫으면 어떤 것도 계속하지 않는다.

갈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이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에 부딪쳤을 때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말한다.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에 부딪쳤을 때 느낌이 일어나고, 이 느낌을 좋아해서 더 좋은 느낌을 갖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이다.
두 번째는 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내가 있다는 유신견을 가지고 더 예뻐지고, 더 부자가 되고, 더 좋은 곳에 태어나고 싶고,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바로 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취라는 것
취(取)는 산스크리트어로 ‘upadana’이다. 다나(dana)는 ‘주다’의 뜻이며 ‘어(a)’가 붙어 부정의 뜻이 된다. 주다에 어가 붙었으니까 주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이다. 압(up)은 ‘가까이’라는 뜻으로 취라는 것은 가까이에서 받는 것을 말한다.

애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눈에 보이고 몸이 부딪치고 가까이 있는데서 일어나서 ‘취’하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것을 ‘취’하는 것이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취하지는 않는다. 애라는 것은 6근을 통해서 인식되어 애욕이 생기고 애욕에 따라 자기에게 좋은 것은 자꾸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취가 생긴다.

유라는 것
취가 생기고 나니까 유(有, bhava)가 온다. 유는 욕망이 충족되는 행위이다. 결국 존재라 하는 것은 유로 표현된다. 가까이 있는 것을 자꾸 자기 것으로 하려는 취가 이루어짐으로써 이것을 지속하려는 유가 생기게 된다. 살아있는 존재가 유가 되는 것이고 살아있음으로써 새로운 행위를 하고 새로운 업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유가 된다.

유에는 생유·본유·사유·중유가 있다. 생유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며, 본유는 생에서 죽기 전까지 살아있는 것이며, 사유는 삶에서 상태가 가장 급격하게 바뀌는 죽음의 상태를 말한다. 중유는 죽어서 새로운 생명을 받기까지의 기간 동안의 삶의 형태이다.  

불교의식에는 49재가 있다. 죽고 난 다음 중음신으로 있다가 염라대왕의 심판을 거쳐 다시 몸을 받는데 49일이 걸린다. 중음신으로 있는 기간이 49일이다.

유는 생명이 머무는 것이며, 행을 하며 다시 업을 짓게 된다. 명색을 갖고 있는 본유에서만 행을 하게 되고 행에 대한 업이 쌓이게 된다.

생이 라는 것
유의 업장으로 미래에 받게 될 과보가 생긴다. 즉 죽음 후에 오는 내세의 출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생이 있게 된다. 생(生, jati)이라는 것은 각각의 중생 부류에 있어서, 각각의 중생이 생겨나는 것이며, 출생하는 것으로 출산, 탄생, 여러 가지 구성 요소가 출현하는 것이며, 모든 기관이 완비되는 것이다.

노사, 老死(jara-marana)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이루어진다. 삶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모든 고뇌가 여기에 속한다. 살아가면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다. 늙음. 즉 변화의 끝이 사, 죽음이며, 죽음 이후에는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돌아가서 12연기가 된다. 12연기를 인식하게 되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인 인과응보를 알게 된다. 인과응보는 착한 행위를 하면 착한 과보를 받고 나쁜 짓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 것이다.

화두를 들고 견성성불한다는 것은 바로 근본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다. 경전공부를 하거나 염불을 한다거나 기도를 한다거나 봉사를 하는 것은 계정혜를 터득함으로써 취를 절제하는 것이다. 취가 절제되면 애욕에서 자유로워지고 수, 촉으로 돌아가서 무명까지 타파하게 되는 것이다. 참선하는 것은 직행버스이고 염불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취부터 시작해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완행버스와 같은 것이다. 정류장마다 서는 완행버스는 목적지까지 가지 못해도 남는 것이 많다.

부처가 되는 길은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인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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