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선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선어(禪語)이다. 글자 그대로는 ‘본 모습’, ‘본 얼굴’ 정도지만, 그 심의(深意)는 ‘너는 누구냐?’, ‘너의 본성’ 또는 ’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냐’고 묻는 말과도 같다.

본래면목은 ‘본래 가지고 태어난 모습’, ‘전혀 꾸미지 않은 모습’, ‘순진무구한 모습’, 혹은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지 않은 모습’ 등을 말한다. 그런데 그 의미를 우리말로 정확히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철학적으로는 ‘본래적 자기’, ‘진정한 자기’, ‘진실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를 한글로 옮기는 데는 많은 고충이 따른다. 특히 본래면목과 같이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언어들의 경우 다양한 표현을 이중 삼중으로 동원해야 한다. 그래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한자는 고작해야 네 자에 불과하지만, 우리말로는 3배에서 4배 이상 언어를 동원해야 한다. 이것은 표의문자인 한자와 표음문자인 한글이 갖고 있는 언어의 특성 혹은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설명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화장과 성형기술이 뛰어나다. 이 분야에서는 적어도 세계적 수준인데, 예술적, 고혹적인 반면 ‘생얼’, ‘민낯’, ‘민얼굴’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민낯’, ‘생얼(生얼)’이 바로 ‘본래 얼굴’, ‘본래면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10년 전 여러 사람과 함께 여행을 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찍 화장실 길목에서 생얼을 보고는 순간 모르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디서 보긴 봤는데’하고는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평소 얼굴과 비슷하기는 해도 이미지는 전혀 다른 분이었다. 화장의 효과가 그렇게 기막힌 줄은 처음 알았다. 그 뒤로 나는 나의 집사람에게도 부지런히 멋있게 화장을 하라고 권한다.

본래면목은 ‘너의 본 모습은 무엇이냐’는 말인데 이는 곧 ‘부처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불교의 진리인가’라고 묻는 정형구로서 ‘어떤 것이 깨달음의 세계인가?’, ‘무엇이 진리인가?’라고 묻는 말과 같다. 의미상에서는 ‘본성’, ‘자성(自性)’, ‘불성’, ‘법성’ 등과 동의어이고, 본지풍광(本地風光)이나 자기본분(自己本分)과도 같은 말이다. 본성이란 번뇌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 즉 깨끗한 마음, 청정한 마음(淸淨心)을 가리킨다. 육조단경에서는 이러한 청정심이 곧 불성이라고 한다.

‘본래면목’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화두가 있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으로,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父母未生前)의 모습’, ‘나’라는 형체가 만들어지기 이전 모습으로서 곧 ‘너의 본질’을 가리킨다. 분별의식이 생기기 이전인 ‘근원’, ‘본질’ 등을 뜻한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란 ‘분별 이전’,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이전’을, 그리고 본래면목은 ‘진실한 나의 모습’ 또는 ‘본래적 자기(我)’를 뜻한다. 두 어휘가 결합된 말이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으로서 근원적인 자기에 대한 강한 반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너)의 본모습은 무엇인가?’, ‘나(너)의 실체는 무엇이냐?’ 또는 ‘나(너)는 누구냐?’고 묻는 말과도 같다. 다른 사람이 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묻는 것(自問)이다. 스스로 자문과 반문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본래면목’은 ‘너의 진실한 모습은 무엇이냐?’, ‘너의 참모습은 무엇이냐?’ 또는 더 넓게는 ‘영원히 변치 않는 나(我)란 무엇인가?’, ‘무엇이 선의 진리인가?’, ‘무엇이 부처인가?’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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