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이해의 길 26

요즘 파키스탄이라는 나라가 주목을 받고 있다. 라호르 박물관에 모셔진 붓다의 고행상 때문이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은 한국인의 심성을 닮아 포근하고 넉넉한 모습이지만, 당시 붓다는 살집은 별로 없고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다. 고행상은 붓다의 모습을 사실에 가깝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포교에 전념했던 그의 고단한 삶이 느껴진다. 붓다의 고행상이 한국에서 전시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가까이서 친견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불상은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진리를 깨친 여래의 형상은 표현할 수 없다(如來像不表現)는 인도의 전통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여래는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인도의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윤회하는 존재다. 그런데 여래는 진리를 깨치고 생사의 세계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윤회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처럼 존재의 세계에서 벗어났는데,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표현은 존재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붓다의 입멸 후 조성된 불탑에 그의 형상 대신 발이나 법륜(法輪), 보리수, 우산 등이 조각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싯다르타가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는 모습이나 출가를 위해 궁을 몰래 빠져나오는 장면은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여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에 이르러 불상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파불교는 법(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불교다. 부파불교를 ‘법(法)에 대한 연구’라는 뜻을 지닌 ‘아비달마(Abhidharma)’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각 부파마다 경(經)에 대한 논서를 만드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가운데 법이 중심이 되었다. 물론 부처님에 대한 예경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각 부파는 법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붓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그들에게는 법이 아니라 붓다가 중심이 되는 강력한 상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불상이었다.

불상은 지금의 파키스탄에 속한 간다라 지방과 중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마투라 지방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다. 대략 1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알려졌는데, 불상의 양식은 매우 다르다. 간다라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 만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불상도 서구인, 특히 그리스인을 많이 닮았다. 간다라 불상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 신을 떠올릴 정도로 서구적이라면, 마투라 불상은 전형적인 인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투라는 당시 인도의 정치와 군사,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파키스탄에서는 간다라가, 인도에서는 마투라가 최초의 불상 조성지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불상이 만들어질 당시 파키스탄은 인도에 속해있었다.

마투라 지역에서 만든 불상에서 주목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분명 여래상인데도 불구하고 보살상이라고 새겨진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래의 형상은 표현할 수 없다는 전통 때문에 여래상이라는 이름을 자신 있게 붙이지 못했던 것이다. 마투라는 그만큼 전통이 지배하는 지역이었다. 반면 간다라는 인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서구와의 교류가 잦은 곳이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불상을 제작하였고 여래상이라는 이름도 쓸 수 있었다. 문화의 차이가 많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대승불교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불상은 신앙의 상징으로써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곧 법 중심에서 붓다 중심의 불교로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대중들은 오래 전 열반에 들었던 붓다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힘든 일이 있으면 불상 앞에서 하소연도 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참회하는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이렇게 불상은 없어서는 안 되는 불교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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