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칭찬의 기술과 효과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잘한 것을 잘했다고 칭찬하지만
그 속엔 행위가 강화되길 바라는
칭찬하는 사람의 의도가 담긴다
판단 없이 관심을 주는 게 중요

사람은 칭찬에 목마르다. 다른 이에게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남을 칭찬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칭찬할 것인가. 목탁소리 지도법사 법상 스님은 1215일 부산 금련사 일요법회에서 보현행원 제2 칭찬여래원을 중심으로 칭찬의 기술을 설명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법상 스님은…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동국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부터 인터넷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으며,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현재 부산 금련사 주지 소임을 맡아 불교아카데미를 열고 불자들의 마음공부를 돕고 있다.

오늘은 화엄경 보현행원품 제2 칭찬여래원입니다. 먼저 경전을 읽어보죠.

선남자여. 부처님을 찬탄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시방삼세·모든 세계의 낱낱 티끌 가운데 극미진수의 부처님이 계시고, 낱낱 부처님 계신 곳마다 한량없는 보살들이 둘러싸 모심에, 내가 마땅히 깊고 수승한 지혜와 눈앞에서 확인하는 지견으로.”

경전에서 모든 여래를 칭찬하고 찬탄한다고 했는데요. 이는 단순히 절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경전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세계에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티끌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이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불상, 탱화만이 아니라 물과 바람, 햇살, 풀 한 포기, 식물, 동물, 사람들 등 일체 모든 것이 전부 다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2,500년 전 태어나신 부처님은 화신이지만, 참된 부처님은 법신(法身) 부처님입니다. 법신불은 곧 우주법계 전체가 부처님의 몸임을 뜻합니다. 삶은 이대로 완전합니다. 일체 만유가 전부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분별망상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진실이 안 보일 뿐이죠.

또한 경전에서는 낱낱 부처님 계신 곳마다 한량없는 보살들이 둘러싸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탱화만 보더라도 중간에 부처님이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과 팔부신중, 사천왕 등이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죠. 이 말도 중요한데요, 티끌 티끌, 중생 중생이 전부 부처일 뿐 아니라, 그 부처님 주변에는 무한한 자비의 화신인 보살님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보살이란 하화중생이라고 해서 일체중생을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돌보는 분입니다. 즉 보살이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은, 내가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내 주변을 무한한 자비와 사랑, 지혜가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보호해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무한한 보살님의 자비로운 가호와 가피를 매순간 받고 있습니다. 우주 전체에 나를 돕는 무한한 손길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나에게는 가피가 없다고 말합니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 넘쳐나기 때문이죠. 불보살의 가피는 반드시 자비롭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웅전에 후불탱화를 보면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는 분들 중에는 무서운 표정을 지닌 사천왕이나 팔부신중도 계시고, 보살님 또한 예를 들어 십일면 관세음보살님 같은 분은 화내는 표정, 자비로운 표정, 익살스런 표정 등 다양한 표정의 얼굴을 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부처님 주변을 다양한 표정의 존재들이 에워싸고 보호하듯 내가, 우리가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도 자비로운 손길도 있지만, 때로는 괴롭고 힘든 일들도 있고 나에게 화내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성내는 표정으로 나타난 나를 에워싸는 보살님의 화신입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하고, 업장을 소멸시켜 주고, 삶을 배우게 하며 지혜를 전해주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별없이 바라보면, 지관(止觀)하면, 울고 웃을 일들 모두가 전부 그대로 부처님의 화현이며, 우리를 돕는 무한한 자비의 손길이고 가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삶에서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괴롭다고 느끼는 건 왜일까요? 냉정하게 돌아보면 머릿속에서 남들과 비교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분별의 눈으로 볼 땐 나와 남의 다툼이 끊임없고,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 같고, 세상이 나를 공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를 공격할 실체적인 적은 내 외부에 없습니다. 이 온누리는 그대로 법신불의 장엄한 세계일 뿐입니다. 내 안의 분별이 유일하게 나를 괴롭다는 환상으로 빠지게 만들 뿐이지요.

이처럼 삼라만상이 전부 부처님 아닌 게 없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오늘의 주제인 칭찬여래원이 그 답입니다. 나를 에워싼 모든 불보살의 화신인 구름, 하늘, 바다 등 온 우주와 내 주변 사람들까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것들에 감사하다는 칭찬을 보내고, 또 공덕을 찬탄하고, 그 무한한 공덕 덕분에 내가 매순간 살아간다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수희찬탄(隨喜讚嘆)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의 기쁜 일을 내 일처럼 기뻐하는 것이죠.

<대지도론>에서는 수희찬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떤 사람이 공덕을 지을 때 그것을 보는 이가 마음으로 더불어 기뻐하면서 참으로 장하구나라고 마음 내는 것이라고요.

우리는 흔히 보시를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돈이 없는 내가 자괴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의 재력이 부럽기도 합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끼기도 하죠. 그런데 칭찬여래원, 수희찬탄에는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방법이 담겨 있습니다. 잘난 사람을 보고 진정으로 내 일처럼 함께 기뻐해주면 나도 그와 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공부입니다. 사실은 유심연기(唯心緣起)라고 하듯, 모든 것은 마음에서 연기하는 것입니다. 독자적인 바깥 경계란 건 따로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에서 일으킨 공덕이 현실로도 구현됩니다.

얼마 전 종단불사에 50억 원을 보시한 보살님들이 계셨는데요, 그분들의 공덕을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고 찬탄한다면, 나에게도 50억을 보시한 것과 다르지 않은 공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이처럼 칭찬하고 수희찬탄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위대한 공덕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놀라운 마음공부 실천법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無爲
이제 고등학생들의 수능시험도 끝나고 다들 대입합격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남의 자식들이 다 좋은 대학에 진학했는데 우리 자식이 못 가면 배가 아프겠죠. 그런데 아까 설명했듯이 진정으로 기뻐하면 나에게 같은 공덕이 옵니다. 그러니까 남이 잘 되는 걸 내 일처럼 축하해주면 나의 현실에서도 이뤄지기 쉽습니다. 부처님 법을 찬탄하면 내가 그 법을 구현할 확률이 커집니다.

그럼 칭찬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칭찬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칭찬이 무조건 좋은 줄 알지만 역효과를 가져올 확률도 상당히 높습니다. 십일면관음보살님의 표정에 화내는 모습도 있죠. 큰스님들이 누군가의 잘못에 버럭 화를 내다가도 자비로울 때는 또 한없이 자비로운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항상 입바른 칭찬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사회는 유위(有爲) 상태를 중시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법은 무위(無爲)를 강조합니다. 명상에서도 행위(Doing)가 아닌 존재(Being)를 말하죠. 참되고 올바른 칭찬은 그 사람이 잘한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라는 존재 자체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부모는 자식을 내 뜻대로 통제, 조종하기 위한 방편으로 칭찬을 활용합니다. 지금 그것을 잘하니까 계속 더 잘하라는 것이죠. 이런 칭찬을 받은 아이는 기쁘기보다, 부담감,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 뿐 아니라, 칭찬의 결과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불안해집니다. 외부의 권위자, 부모의 인정에 쩔쩔매고, 칭찬받기 위해 눈치 보는 아이로 커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실험에서도 증명됐는데요. 단어를 외우게 하고 너무 잘 한다고 칭찬을 해 준 뒤에 외운 단어를 칠판에 최대한 적어보라고 하고 선생님이 나갑니다. 칭찬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적을 수 있는 만큼만 적고 자유롭게 뛰어놀지만, 칭찬을 받은 아이는 불안해하다가 결국 70% 정도가 선생님이 두고 간 단어카드를 컨닝합니다. 선생님의 칭찬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칭찬할까요? 먼저 잘 한 행위를 칭찬하기보다 아무 것도 안 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칭찬해 줍니다. 두 번째로 통제 조종하기 위한 칭찬이 아닌, 그저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말이 좋습니다.

아이가 그림을 그렸을 때 화가 기질이 있다든가, 그림을 잘 그렸다고 칭찬하는 것 보다는 분별없는 시선으로, 아이를 판단 없이 지켜본 것을 말해줍니다. “그림 그리고 있구나” “파란색으로 그렸네라고 판단 없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아이는 부모가 판단하지 않으니 부담 없이 마음껏 자신을 표현합니다. 잘못했다는 말을 들을까봐, 칭찬을 못 받을까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파란색으로 그렸구나. 어떤 의미니?”라고 질문을 던져주세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답을 주려는 이유는 너는 모르고 나는 안다는 분별심 때문인데요, 질문을 하는 것은 너라는 부처님은 어떤 의미를 여기에 담았니 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정해진 답이 없기에, 그의 답을 존중해 주는 것이 질문인 것이지요. 이것은 아이와 부모를 분별된 수직적 상하관계로 보지 않고, 너도 온전한 부처님, 나도 부처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중생이 못난 중생에게 가르치는 건 칭찬여래원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를 바라보고, 같은 여래로서 칭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위를 살펴보세요. 가족, 친구, 동료, 반려동물, 내가 먹는 밥, 입는 옷까지 세상의 어떤 것들이 나와 연결돼 있는지 느끼고 찬탄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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