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만법귀일(萬法歸一)

천 년 전 일이다. 어떤 수행승이 조주선사에게 질문했다.

“선사, 만법(모든 존재)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입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 (이 수행승은 상당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이것이 만법귀일의 발단이다. 이 날카로운 수행승의 질문에 조주선사는 엉뚱하게도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옷 한 벌을 만들어 입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라고 대답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도 어려운데, 조주선사의 답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솔직히 말해 해석은 커녕 추측도 불가능하다. 정답 없는 정답.

‘만법귀일(萬法歸一)’은 ‘모든 존재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선불교의 세계를 드러낸 선어(禪語)로 ‘일귀하처(一歸何處)’,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와 환상의 세트를 이루고 있는 사자성어이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필자가 20세 때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쿵했다. 무언가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주제나 질문 같은 것을 던져 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죽게 되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내 나름대로는 기막히게 풀이하고 나서 오랜 시간 그 말이 가슴에 맴돌았다.

‘만법귀일’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것 같은데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은 ‘일귀하처’였다.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아직도 모른다. 하나는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알려고 덤벼들지 않는다. 영원한 주제로 문제의식 속에서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만법(萬法)은 ‘모든 것,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만(萬)이란 꼭 1만 개라는 숫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 ‘많다’는 의미로 ‘모든 것’을 가리킨다. 만수무강, 만사형통도 ‘만세를 살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죽지 말고 오래 무한하게 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만상도 그런 뜻이다. 만법 속에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 모든 존재가 다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귀일(歸一)은 귀결처, 종착점이다.

‘모든 존재는 결국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수행자가 아니더라도 평소 철학적 사색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던 주제일 것이다. 인간, 모든 존재(萬法)는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歸一)? 존재의 귀착처. 그것은 곧 존재에 대한 탐구인 동시에 모든 철학의 주제이며 시작이다. 선(禪)도 사실은 존재, 실존에 대한 탐구이다. 그 주제가 바로 만법귀일, 일귀하처이다.

선은 무심, 무념이다.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모든 존재를 관찰한 끝에 제행무상이라고 했다. 제행무상은 부처님이 발견한 존재론인데, 이 ‘제행무상’의 진리처럼 형체를 가진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 어린 아이가 70년 흐르면 백발이 되고 그 백발은 무(無)로 변하고 공(空)으로 변한다. 일체는 모두 공이다.

〈대승기신론〉에 따른다면 ‘만법귀일’은 ‘일심(一心)’ 즉 마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일심이 만법, 만물의 발원지이다. 일심에서 존재, 비존재가 탄생한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일체유심조라고 했다. 만법 즉 이 현상세계는 모두 우리의 의식, 인식 세계의 작품인 것이다. 결국 일귀하처의 귀결처도 마음, 즉 일심(一心)일 수밖에 없다. ‘진공은 공이 아니고 유(有)’라고 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일체는 마음으로 귀착하고 그 마음으로부터 모든 현상들이 일어나고, 만물, 삼라만상이 생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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