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이해의 길 25

불교에 입문하여 처음으로 사찰 수련회에 참여하였다. 명상 시간이 돌아왔는데, 지도법사는 5분 동안 호흡에 집중하기도 힘들 것이라 했다. 온갖 번뇌, 망상이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깟 5분 집중하는 일이 뭐가 힘들지 하는 생각으로 명상에 들었다. 정말 그랬다. 호흡에 집중하려 했는데, 어제 먹은 짜장면이 생각나더니 갑자기 어린 시절 친구와 말다툼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명상하는 동안 수많은 망상들이 떠올랐다 사라진 것 같다. 그때 알게 되었다. 나란 존재가 번뇌, 망상 덩어리라는 사실을.

번뇌, 망상은 우리의 삶을 괴롭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이나 절, 염불 등의 수행을 통해 이를 제거해야 열반, 마음의 평화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를 부파불교에서는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깨친다는 단혹증리론(斷惑證理論)으로 정리하였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 같은데, 대승에서는 심하게 태클을 걸었다. 번뇌는 끊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자리가 보리(菩提), 곧 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찌 된 것일까?

대승불교는 중생이 아니라 붓다의 관점에서 설한다는 특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번뇌를 끊고 깨달음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깨친 자리에서 바라본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煩惱卽菩提)’라는 것도 바로 이를 보여주고 있다. ‘생사가 곧 열반(生死卽涅槃)’이라는 입장이나 ‘중생이 곧 부처’라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생사와 중생은 버리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본래 열반, 부처와 ‘하나’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상에 눈뜨는 것이 대승의 목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연꽃이다. 연꽃은 결코 허공에서는 필 수 없다. 그 청정하고 아름다운 꽃이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진흙 밭이다. 사람들은 더럽다고 생각하여 피하려고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열반, 보리, 붓다라는 맑고 향기로운 꽃이 피는 것이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처럼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가 본래 다르지 않다는 것이 대승적 사유다. 다만 그것을 모르고 내가 서있는 자리를 버리려는 소승적 태도를 대승에서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개봉해 큰 화제를 모았던 영화 〈달마야 놀자〉는 이러한 대승적 사유를 유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세속적으로 가장 오염된 깡패들이 성스럽고 청정한 사찰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그곳 승려들은 주먹패들이 수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쫓아내려 한다. 이를 위해 다섯 번에 걸친 내기를 하지만, 결국 3대 2로 승려들이 지고 만다. 어쩔 수 없이 함께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을 내보내려는 시도는 계속된다. 이러한 수행승들의 모습은 번뇌를 버리고 진리를 깨치려는 소승불교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눈뜬 스승의 가르침으로 제자들은 번뇌, 세속의 공간에 살고 있는 깡패들 역시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품고 가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성(聖)과 속(俗)은 본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후속 편인 〈달마야 서울 가자〉 역시 내용만 다를 뿐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영화는 절을 지키려는 승려와 절을 허물고 빌딩을 세우려는 깡패 사이의 치열한 대결과 갈등을 보여준다. 이들 간의 극적인 화해는 마지막 한 장면으로 압축되는데, 바로 높은 빌딩 위에 절을 짓는 것이었다. 이로써 세속, 번뇌를 상징하는 빌딩과 열반, 보리를 상징하는 사찰이 한 몸이 되었다.

우리들은 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거나, 힘든 일이 닥치면 피할 생각부터 한다. 그래서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승의 눈뜬 선지식들은 힘들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진리와 붓다라는 꽃이 핀다고 역설하였다. 구상 시인도 ‘우음(偶吟) 2장’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그러니 피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내가 걷는 지금 이 길이 바로 꽃길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