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동서 문명 교차로 파키스탄을 가다
② 아소카왕의 고향, 탁실라

인도 통일한 피의 군주 ‘아소카왕’
전쟁 일으킨것 참회하며 불교 귀의
인도 전역에 사원·불탑 세우면서
지역종교 불교, 세계적으로 알려

탁실라엔 아소카왕이 남긴 유산과
쿠샨 왕조의 불교 유적 다수 있어
원형 보존된 유물은 많지 않지만
부처님 치아사리 비롯한 성보들이
파키스탄 찾은 불제자를 반겨준다

대한불교조계종은 파키스탄 정부 초청으로 1117일부터 23일까지 파키스탄 내 불교 유적을 순례했다. 탁실라는 순례 6일차인 21일에 방문했다.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탁실라는 기원전 마우리아왕조부터 쿠샨왕조까지 불교와 간다라문명이 번영한 곳이다. 특히 전륜성왕인 아소카왕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 불교적으로 의미가 크다. 아소카왕이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다르마라지카부터 고대 불교의 교육공간인 줄리안 사원, 이 지역 간다라유물을 한데 모은 탁실라박물관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비롯한 조계종 순례단이 다르마라지카 대탑 주위를 돌며 탑돌이를 하고 있다. 다르마라지카는 복합사원으로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었지만, 현재는 사원 터와 일부 훼손된 불상만 남아있다.

원형 파괴한 이교도 훼불에 ‘탄식’

석가모니 부처님이 슈라바스티(사위성) 제타숲에 있을 때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부처님은 제자인 아난과 탁발을 위해 성 안에 들어갔다. 길가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흙을 모아 집과 창고를 지으며 한창 소꿉장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멀리서 걸어오는 부처님을 바라보고 그 모습에서 무한한 공경을 느꼈다. 이 아이는 흙으로 지은 소꿉놀이 창고에서 곡식이라 이름 붙인 흙 한 줌을 쥐고 부처님에게 달려갔다. 보시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이끈 걸음이다.

부처님은 발우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며 아이가 건넨 정성스런 흙 한 줌을 받았다. 그리고 아난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내 처소 방바닥에 바르라.” 탁발을 마치고 돌아온 아난은 부처님 말씀대로 처소 방바닥에 흙을 발랐다. 그러자 부처님이 다시 말했다. “아까 그 아이는 이 공덕으로 내가 열반한 지 100년 뒤에 국왕이 될 것이다. 이름은 아수가, 나를 위해 84000개의 탑을 세울 것이다.”

<현우경> ‘아수가시토품의 이야기다. 부처님이 아수가라고 명명한 아이는 바로 기원전 3세기, 인도 마가다국 마우리아왕조의 세 번째 왕이자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소카(Asoka). 아소카는 불교에 귀의하기 전까지 피의 군주였다. 아버지 빈두사라왕의 장남인 수시마를 비롯해 99명의 배다른 형제와 자신을 반대하는 500명의 신하를 숙청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냉혈한이던 아소카는 동부 해안 칼링가국과의 전쟁에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자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이때부터 모든 인간이 지켜야할 윤리 다르마(dharma, )’를 정치 이상으로 삼았다.

다르마라지카 대탑은 기단부가 잘 보존돼 있지만 상단은 훼손이 심해 현재 수풀이 무성하게 덮여 마치 무덤을 연상케 한다.

진신사리 모신 다르마라지카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탁실라(Taxila)로 이동하며 잠시 아소카왕을 떠올렸다.

아소카왕은 불교사에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 왕, 즉 전륜성왕으로 평가된다. 인도를 통일해 전역에 사원을 건립하고, 부처님을 기리는 석탑을 세워 지역에 국한된 종교였던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거듭나도록 한 인물이다. 부처님은 어린 아소카의 장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불교사에서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세운 아소카는 어디서 태어났을까? 사실 기원전 3세기 인물인 아소카는 생몰연대조차 분명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아소카왕의 고향도 확실하게 알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기자가 탁실라를 아소카왕의 고향으로 표현한 이유는 아소카의 삶에서 탁실라가 갖는 의미가 어느 지역보다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아소카왕의 할아버지이자 마우리아왕조를 창건한 찬드라굽타는 어려서부터 탁실라에서 군사전술 교육을 받으며 용병을 모아 힘을 길러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그리고 아소카 역시 18세에 왕자 신분으로 탁실라를 다스렸다. 고위관료들의 편을 들던 수시마 왕자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킨 탁실라 백성들은 아소카 왕자의 등장에 적극 환영했다. 아소카는 왕위에 오른 뒤 탁실라를 제2의 수도로 천명하고 자신의 아들인 쿠날라도 탁실라로 보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계모의 계략으로 아들이 두 눈을 잃자 계모를 비롯해 탁실라 백성까지 몰살시켰다. 이처럼 탁실라는 아소카왕의 삶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주 무대다.

탁실라는 하나의 사원이 아닌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오래 전 학문의 도시로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고, 간다라시기 수많은 승려들이 수학한 곳이자 중국과 서양을 연결한 실크로드의 지류로 경제·문화의 도시였다. 지금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탁실라는 산스크리트어 옛 이름 탁샤실라(tak?a-?iras)’, 잘린 머리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다.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이었을 때 자신의 머리를 남에게 바쳤다는 의미에서 탁샤실라라는 이름을 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산스크리트어 표기를 takshaçila로 한다면 뱀족의 왕자라는 뜻이 된다. 유네스코는 탁실라를 뱀족의 왕자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마타 싯다르타를 낳은 마야부인이 뱀족인 코리야족 출신이고, 싯다르타는 어머니와 같은 코리야족 여인 야소다라와 결혼했으니 부처님을 기리는 의미라면 잘린 머리보다는 뱀족의 왕자가 올바른 해석일 것 같다.

다르마라지카에 남은 불상 족상. 이교도 훼불로 인해 발목과 가사자락의 밑 부분만 남아 순례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순례단은 아소카왕이 부처님을 기리며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대탑을 세운 다르마라지카를 찾았다. 이른 아침부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지만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순례단의 열의는 막을 수 없었다. 주홍빛 가사를 수한 채 계단을 오르는 스님들에게 현장견학을 나온 파키스탄 학생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자 저 멀리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무덤 형태의 대탑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좋게 표현해 이지 실제로 마주한 다르마라지카 대탑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다만 탑의 기단부 지름이 50m에 달해 과거 불교가 번성한 시기, 얼마나 위용을 떨쳤을지 짐작만 할 뿐이다. 대탑은 셀 수 없이 많은 돌을 하나씩 쌓아올려 만들었지만 지금은 무너진 채 수풀로 뒤덮여 알아보기 힘든 형태를 하고 있다.

순례단은 대탑 앞에서 간단히 예불을 올린 뒤 줄지어 탑돌이를 했다. 비록 탑은 파손돼 볼품없고 주위 시설은 무너져 내려 초라하지만, 순례단은 옛 수행자들이 진리를 추구하며 걸었을 길을 따라 한걸음씩 내디뎠다. 다르마라지카 대탑 주위는 작은 탑들이 둘러싸고, 그밖에 스님들이 수행한 암실과 불상을 봉안한 공간의 터가 너른 부지 위에 자리한다. 훼손 없는 원형을 마주한다면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르마라지카 곳곳을 돌아보던 순례단이 일순간 멈춰 섰다. 부처님의 발목만 남은 족상 앞에서다. 발바닥 길이가 청소년기 아이들 키쯤 되는 족상은 발목과 부처님의 가사자락을 표현한 밑 부분만 남았다. 어떤 연유로 발바닥만 남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탈레반의 바미얀 석불 파괴를 떠올리게 하는 아픔이 느껴졌다. 게다가 석회암으로 만들어져 자연적인 훼손을 입은 대부분의 불상들도 한결같이 불두만 잘린 채 보존되고 있었다. 마우리아왕조를 시작으로 쿠샨왕조까지 이어진 간다라불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한 이교도들의 소행 앞에 그렇게 스러졌을 것이다.

탁실라박물관이 순례단을 위해 특별히 공개한 부처님 치아사리에 예불을 올리는 스님들.

부처님 치아사리를 만나다

탁실라박물관이 소장한 불두. 전형적인 간다라불상이지만 어딘가 온화한 미소를 느끼게 한다. 불두는 줄리안 사원에서 발굴됐다.

아소카왕의 유산을 뒤로 하고 줄리안 사원으로 이동했다. 줄리안 사원은 2세기 쿠샨왕조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언덕에 위치한 줄리안 사원은 중앙의 대탑을 기준으로 20여개의 작은 탑이 둘러싸고 있다. 이곳의 대탑은 다르마라지카보다 더 많이 훼손돼 기단부밖에 남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존경받는 승려들의 무덤으로 지어졌다고 말하는데 바로 옆에 사원터가 남아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줄리안 사원은 탁트이바히, 다르마라지카처럼 언덕 위에 지어졌다. 2층짜리 건물로 각 층마다 28개의 방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2층이 파괴돼 남아있지 않지만 2층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은 보존돼 있다. 각 방에는 램프를 넣는 틈새와 자연광이 들어오는 창문 공간이 있다. 독특한 것은 이 창문이 벽 바깥쪽은 좁게, 안쪽은 넓게 만들어 야생동물 보호에 신경 썼다는 점이다.

파키스탄에서는 줄리안 사원을 인도 나란다대학에 견줄 만큼 불교적으로 오래되고 중요한 교육시설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 역사를 정리한 대규모의 나란다대학과 비교하려면 줄리안 사원에 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 같다.

줄리안 사원에서 ‘힐링 붓다’라고 불리는 약사여래. 배꼽 부위에 구멍이 뚫려 있어 청교도들은 손가락을 넣고 질병의 쾌유를 빌었다고 한다.

줄리안 사원 대탑 아래에는 훼손으로 배꼽부분에 구멍이 뚫린 약사여래불이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이를 힐링 붓다라고 부르는데, 근대 청교도들이 손가락을 약사여래 배꼽에 넣고 질병의 완쾌를 기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줄리안 사원을 소개한 카이버팍툰콰(KPK)주 고고학부 관계자가 스님들에게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권유하는 모습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불교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2년 전 대탑 주위에 보호구조물을 설치했다는 관계자 설명과 이슬람국가에선 중요문화재가 아닐지라도 불교도들에겐 성보인 약사여래에 손가락을 넣어보라는 아이러니라니.

다르마라지카와 줄리안 사원에 방문하기 전 순례단은 간다라불교의 산실인 탁실라 성보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탁실라박물관으로 향했다. 탁실라박물관은 부처님 치아사리 2과를 소장하고 있는데, 아소카왕이 세운 다르마라지카에서 발견된 것이다. 발굴 당시 총 4과가 나왔지만 2과는 발굴을 맡은 영국인 존 마샬이 인도에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탁실라박물관은 순례단을 위해 특별히 부처님 치아사리를 공개했다.

줄리안 사원 수행공간. 당시 2층 규모로 지어졌지만 파괴되면서 현재는 1층만 남았다.

치아사리 등장에 순례단의 이목이 쏠렸다. 우윳빛과 갈색을 띤 치아사리는 조금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뉘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금빛 보관함에서 치아사리가 나오자 순례단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스님들은 치아사리를 공개해준 박물관 측에 감사인사를 보내며 예불을 올리고, 불전을 모아 박물관에 전달했다.

탁실라박물관은 1~7세기 다르마라지카와 줄리안 사원 등 이 지역에서 조성된 간다라미술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다. 다만 이교도의 훼불 이후 발견된 것들이어서 머리 없는 불상이거나 불두만 존재하는 게 많다. 그래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부터 열반까지 일대기를 표현한 작은 조각들은 제법 잘 보존돼 있다.

이 박물관에서 눈길을 끄는 불상은 줄리안 사원에서 발굴된 2~4세기 불두다. 전형적인 간다라 조각이지만 다른 불상보다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느끼게 한다. 오뚝하고 갸름한 콧날을 따라 눈썹이 가늘게 이어지고, 눈은 45도 정도 아래를 보는 듯 살짝 감겨있다. 크지 않은 입은 가볍게 닫혀 있는데 입꼬리가 살짝 패여 사실감을 더한다. 나발(螺髮)은 그리스양식의 바닷물결 무늬로 정수리 머리카락을 묶은 느낌의 육계가 도드라진다.

다르마라지카에서 발굴된 부처님 치아사리. 전륜성왕 아소카가 봉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탁실라박물관 소장 불상. 이 불상은 나발이 소라모양이고 귓불이 더 길어져 간다라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탁실라박물관은 수많은 불상을 통해 간다라미술의 시대변화를 엿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간다라초기 인물의 사실적 묘사와 석가모니 부처님을 단독으로 표현한 불상은 시간이 흐르며 신비주의가 조금씩 가미된다. 머리카락을 묶은 것 같은 바닷물결 모양의 나발은 다른 간다라불상에서 소라모양으로 변하고, 부처님의 귓불도 한층 더 길어진다. 또한 머리 뒤쪽에 커다란 광배가 조성되고, 그 안에 작은 화불(化佛)도 표현된다.

한동안 박물관을 둘러본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1987년 중국 산시성 법문사에서 발굴된 부처님 지골사리가 2005년 우리나라에 전시된 적이 있다. 스리랑카 불치사에 있는 치아사리도 친견했었다아소카대왕이 전 세계에 진신사리를 보급하면서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을 기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탁실라박물관의 치아사리도 한국불자들이 친견했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에 압둘 나시르 박물관장은 탁실라는 기원전후 불교가 가장 번성한 곳으로 불법 전파를 위해 많은 불상이 이곳에서 제작됐다“1999년 서울과 부산에서 3개월간 박물관 소장 유물을 전시한 적이 있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대여를 희망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화답해 간다라유물의 한국전시 기대를 높였다.

탁실라박물관에 전시된 간다라불교 유물. 많은 불상이 머리가 잘린 채 발견돼 아쉬움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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