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인문학 특강

정진원 연구교수는… 홍익대에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를 주제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동국대에서 삼국유사를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정 교수는 주로 〈훈민정음〉으로 이뤄진 불경에 대한 연구와 〈삼국유사〉의 대중화 및 세계화를 위한 국내외 강의, 저작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중세국어의 텍스트언어학적 접근 방법〉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삼국유사, 자장과 선덕의 신라불국토프로젝트〉 등이 있다.

 

주제 : ‘법련사와 월인석보’

정진원 동국대 세계불교학硏 연구교수

2019년 영화 ‘나랏말싸미’로 일어난 신미대사의 한글창제에 대한 논란은 세종과 세조 당시 훈민정음으로 지어진 경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12월 1일 법련사 대웅보전에서는 ‘법련사와 월인석보’를 주제로 한 불일인문학 특강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정진원 연구교수는 경복궁 내불당 위치와 법련사와의 연관성, 법련사 창건공덕주인 법련화 보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월인석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훈민정음 비사 규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정리=노덕현 기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법련사 불자이자 불일합창단원 정진원입니다. 평소 제 자리는 저쪽 합창단 자리이지만 오늘 영광스럽게 이 자리에 승진했습니다. 오늘 법련사와 인연이 된 제 책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에 앞서 법련지에 연재하였던 내용 중 함께 읽고 싶었던 내불당과 법련화 보살 이야기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자랑할 일이 있습니다. 이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는 책이 올해의 불서 우수상에 선정되었습니다. 모두 법련사의 가피입니다.

법련사와 경복궁 내불당

월인석보와도 관계가 있는 세종이 지었다는 경복궁 내불당은 지금 법련사 자리와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내불당은 세종이 경복궁 안에 지은 대궐 안 절이라는 뜻입니다. 곧 억불숭유의 조선에서 왕실의 불교신앙을 위하여 창건된 미스테리한 건축물인 것이죠. 내불당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 4매와 두골(頭骨)·패엽경(貝葉經)·가사(袈裟) 등을 흥천사(興天寺) 석탑에 안치하였는데, 1418년(세종즉위년) 세종이 내불당을 창건하고 이들을 옮겨 봉안하였다.’

억불숭유 시대, 왕실의 불교 관심
훈민정음 경전으로 분명히 드러나
뒷받침하는 역사 기록 부족하기에
훈민정음 비사 연구 불교가 힘써야

내불당은 억불숭유 시기였던 조선시대 왕실에서 불교의 명맥이 이어온 하나의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이런 상징성이 바로 현재의 법련사에도 이어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련사와 법련화 보살

서울에는 송광사 분원인 절이 두 군데 있습니다. 절묘하게 각기 동시대를 살다 간 두 보살의 보시로 이루어진 절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1996년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길상화 김영한 보살(1916~1999)이 창건공덕주가 된 길상사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주인공 법련화 보살(1920~1973)의 보시로 1973년 이루어진 법련사입니다.

이 법련화 보살의 이름은 김부전. 황해도 출신으로 1920년에 태어나 1973년까지 살다갔으니 54세의 짧은 생애였습니다.

전해지는 첫 번째 이야기는 김부전, 법련화 보살이 스물두 살 때인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금강산 정양사에 들른 법련화 보살은 〈금강경〉의 한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其心)’, 곧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한 마디에 평생 그를 실천하며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송광사 공덕비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끝난 1952년, 재산을 희사해 불교양로원을 설립했으며 2년 뒤에는 경기도 의정부에 광명보육원을 건립합니다. 양로원과 보육원은 각각 6~7년 운영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법련화 보살의 보살행은 1950년대 종단 정화불사 한축을 당당히 담당하는 데서 빛을 발합니다. 당시 불교계는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 치하 35년 동안 대처승이 대세를 이루는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청정한 전통 수행가풍을 지키려는 불교정화 운동은 ‘동산 스님, 청담 스님, 효봉 스님, 금오 스님’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절마다 대처 스님들이 주지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비구 스님들은 뒷방에서 참선 수행하시는 분들이 많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련화 보살은 정화 본부가 안국동 선학원에 있을 때 금강심 보살, 보현심 보살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후원을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세수 67세의 효봉 스님이 1년 동안 선학원에 주석하며 승단 정화불사에 전념할 때 법련화 보살과의 만남은 법련화 보살이 실질적인 발심을 하게 된 커다란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법련화 보살은 서울 선학원에 마야부인회를 발족해 승단을 외호하고 마지막 재산인 자신의 집을 희사해 법련사를 건립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법련사,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 일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경제력을 바탕으로 스님들을 적극 후원했습니다. 기록을 찾아보면 ‘숨은 알부자, 여걸, 여장부’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운허 스님께서 쓰신 ‘청신녀 김법련화 공덕비문’를 보면 법련화 보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공덕비문에는 ‘여기 남달리 신심이 견고하고 희사를 좋아하는 장한 청신녀가 있으니 그가 곧 법련화(法蓮華) 김부전(金富全) 여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법련화 보살은 이렇게 지나가던 길손이었던 저를 불러 법련사와 인연을 맺게 하고 이리저리 남순동자처럼 편력하게 한 뒤 다시 저를 불러 조근조근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시의 마음을 낼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 등등을 말입니다. 이 곳 법련사에는 법련화 보살이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곳곳에서는 수많은 법련화 보살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우리말 대향연 〈월인석보〉

처음에 이 강좌를 열고 연재를 할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성과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안 쓰는 글자들이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아 건성건성 넘어가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만 아니면 우리는 세종과 세조의 노벨문학상감 글을 육성으로 맛보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훈민정음에 대한 매뉴얼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었지만 우리는 그 문자의 원리나 체계의 정확한 가치는 정작 잘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한글이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라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사료가 훈민정음 창제 1년도 채 못 돼 만들어진 24권의 방대한 〈석보상절〉과 그를 시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들이 드물 것입니다.

이 둘을 수정 보완 합편한 것이 〈월인석보〉인데 세종과 세조의 합작품으로서 서두에 훈민정음 축약본까지 들어 있어 일석삼조의 공부를 할 수 있는 텍스트라 할 수 있습니다.

〈월인석보〉 발간의 원동력

소헌왕후는 세종의 부인이자 수양대군의 어머니입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를 위하여 남편과 아들이 극락왕생을 비는 것이 어쩌면 이 책을 출간한 직접 이유일 것입니다. 만든 기간은 1년이 채 안 되지만 조선시대까지 유통되고 가장 많이 회자된 불교 경전,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경, 율, 론’ 삼장을 망라하여 엄선 또 엄선한 요체들을 모아서 ‘각별히’ 만든 책이 바로 〈월인석보〉입니다.

〈월인석보〉 서문에 저간의 사정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12부 수다라를 섭렵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12부 수다라’는 〈12부경〉이라고도 하는 석가모니의 교설을 12가지로 분류한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세종과 세조도 불교에 조예가 깊고 세상이 다 아는 박학다식한 천재들이지만 〈석보상절〉 뒤에는 김수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월인석보〉 뒤에는 신미 대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김수온은 신미 대사의 동생으로 1446년 ‘증수석가보’(增修釋迦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월인석보〉에는 훈민정음 창제부터 깊이 관여하고 왕들이 스승으로 추앙해 신하들의 질시를 한 몸에 받았던 신미 대사의 자취가 남아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신중하게 앞으로 훈민정음 불경을 차근차근 천착하며 밝혀내야 할 우리의 숙제입니다.

법련사, 내불당, 〈월인석보〉

억불숭유의 시기에 세종은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가 되어 아들 세조와 함께 〈월인석보〉를 짓습니다. 이 모든 작업이 경복궁에서 이루어집니다. 내불당과 연관이 깊어보이는 법련사에 어쩌면 제가 찾아오게 된 것도 예정돼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법련화 보살의 자비희사로 이루어진 법련사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내불당이 되어야 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내불당이 되어 안팍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지켜주는 황룡사탑이 되고 외국인이 더 많이 다니는 중심사찰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삼청동 법련사에 〈훈민정음〉과 〈월인석보〉가 날개를 달고 대중들 곁에서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여법한 법당에서 기도하면 행복해진다는 주지스님 말씀대로 더 많은 도반님들이 날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법련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 힘닿는 대로 법련화 보살의 보시 정신을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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