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전하는 종교 화합의 원찰
‘무소유’ 전하는 종교 화합의 원찰
  • 김경집 교수
  • 승인 2019.12.0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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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길상사
길상사는 한 여인의 깨달음과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만나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됐다. 사찰이 아니었지만 사찰로, 현재는 사찰을 넘어선 유형공간으로 변화하는 곳이다.

대원각과 길상화 보살

어느 시인이 표현하였듯 성북동 비둘기는 채석장 소리에 놀라 그곳을 떠났고, 인간은 그 공간에 큰집을 세웠다. 그런 집들 사이로 절인 듯 절이 아닌 듯 들어선 사찰이 있다. 10년 전까지 법정스님이 회주로 있던 길상사이다.

이곳은 처음부터 사찰로 지어진 것이 아니어서 일반 한옥풍이다. 사찰로 변모하기 전까지 매일 밤 음주가무가 질펀하게 열렸던 요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과 이권을 쫓아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인간의 탐욕이 사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고 이익과 출세를 위한 술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서로의 의리를 치켜세우며 결의를 맹세했지만 또 다른 탐욕으로 등 돌리며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치를 떨은 사연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길상화 보살의 참 깨달음
무소유 정신 만나며 변화
승속·종교간 不二 알려

불교에서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삼독(三毒)이라 한다. 그 가운데 탐욕이 제일 앞선 것은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눈, 귀, 코, 입, 몸, 그리고 마음에 드는 대상을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남들 보기에 이미 충족한 삶이지만 제어하지 못한 탐욕 때문에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부처님은 교단을 세운 후 사의법(四依法)으로 수행자들을 이끌었다. 식사는 걸식을 하고, 가사는 시신을 쌌던 헝겊인 분소의였으며, 잠은 나무 밑에서 자야 했다. 수행자가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소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진기약 뿐이었다. 모두 탐욕을 경계한 무소유의 실천이었다. 그렇지만 부처님 열반 후 이 법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결국 지키려는 보수파와 바꾸려는 진보파로 나누어졌고, 분열은 20부파가 생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간사에도 탐욕은 분쟁을 야기한다. 예전 어른들은 조상 제사를 모신다는 명분으로 장남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상속은 형제들의 분별심을 자극한다. 지분을 요구하는 아우들의 청을 거절한 형 때문에 송사로 가는 일도 많다. 분쟁은 결국 형제들의 왕래를 끊어버린다. 창업한 재벌가의 노쇠와 죽음으로 상속문제가 시끄러운 것도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주지육림이 난무하던 대원각이 부처님을 모신 사찰로 변모하였다. 이곳 주인은 김영한이었다. 뒤에 길상화(吉祥華)란 법명을 받았다.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난한 탓에 15살에 시집갔지만 남편이 일찍 죽었다. 살길이 막막했던 그녀는 1932년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미모가 뛰어난 덕분에 금방 서울의 권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기생이었지만 삼천리문학에 글을 발표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글씨는 물론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의 재주를 눈여겨 본 신윤국이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공부하던 중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함흥 감옥에 갔으나 스승은 만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평생 가슴에 품은 사랑을 만났다.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 교사 백석을 만나 것이다.

달콤한 사랑은 운명적으로 시작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운명적이고 달콤한 사랑은 대부분 가슴 아픈 사연을 끝나고 만다. 백석은 부모가 반대하자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하였다. 그녀는 백석을 생각해 가지 않았다. 잠시 떨어져 있으면 될 줄 알았던 헤어짐이 6.25사변으로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기 위해, 또한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음식점을 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이 되었다. 대원각을 드나들던 남자들은 미모가 출중한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넌지시 전해보았다. 늘 백석뿐이었던 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다. 1999년 83세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랑하는 남자 만을 그리워하며 삶을 보냈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을 법정 스님에게 맡겼다. 아무런 조건 없이 천억에 가까운 재산을 넘긴 것이다. 그녀는 천억이란 돈이 백석의 시 한줄 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이 정도면 방하착의 경지이다.

무소유 정신이 깃든 길상사

이런 거액을 받은 법정 스님 역시 무소유의 수행자였다. 1932년에 전남 해남에서 출생해 목포에서 성장하였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를 시작하였다. 1953년 전남대 상과대학에 입학하였지만 공부가 들어오지 않았다. 진리의 길을 찾아 떠돌아다니다 1954년 효봉 스님을 만났다. 대학 3년 수료 후 1956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부처님 법답게 살고 싶었던 그는 세간의 소유를 떠나 출세간에 왔는데 출세간에서 소유한다면 그건 불교의 수행자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찰의 주지를 비롯하여 이익에 탐하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겠다고 서원하였다.

그의 이력을 보면 그 흔한 사찰 주지를 지낸 적이 없다. 비구계를 받고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 스님과 역경사업을 시작한 이래 1970년대까지 그 일에 헌신했다. 세간에서 말하는 직책을 가져본 적도 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및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이다. 세칭 돈 되지 않는 자리였다.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였지만 세상과의 소통은 지속하였다. 4.19와 5.16을 겪으면서 독재화가 지속되자 여러 사회 인사들을 가까이 하면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하였다.

바뀌지 않는 사회와 자신의 출가에 대한 검증을 위해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지어 20년을 홀로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속세를 멀리하자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으로 느낀 자연에 대한 서정을 글로 세상과 소통하였다. 그런 마음이 모아져 1994년 순수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 수 있었다.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그에게 최대의 고비가 찾아왔다. 1997년 대원각 주인이 무주상 보시를 한 것이다. 천억에 이르는 재물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성북동에 쏠렸다. 평생 무소유로 살았던 스님은 보란 듯이 시주받은 대원각을 길상사로 탈바꿈 시키고 회주로 지냈다. 2003년 12월 그마저 던져버리고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참선하며 지냈다. 한 달에 한번 법회 때만 길상사를 들렀다.

2010년 3월 입적한 그는 생전에 남긴 유언에도 무소유를 강조하였다. 첫 번째가 상좌들 수행이었다. 깨달음에 이르도록 열과 성을 다해 이끌어주지 못함을 미안해하며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맏상좌는 앞으로 10년 동안 제방 선원에서 수행에 전념하며, 해제 때에는 불일암에서 수행하여 사제들을 이끌 것을 당부하였다. 상좌들 모두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할 것을 바랐다.

또한 평소 성격대로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며,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고 하였다. 말미에 어리석은 탓으로 자신이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할 것을 부탁하였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기를 당부하였다

종교화합의 상징 길상사 관음상

준 자와 받은 자 두 분이 떠난 길상사에는 미소를 머금은 관세음보살상이 불자들을 반긴다. 가만히 보면 전통적인 관음의 상호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가톨릭 성모상의 분위기가 풍긴다.

이 관음상을 조각한 작가는 천주교 신자 최종태였다. 서울대 미대교수를 역임한 그는 천주교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로 꼽힌다. 전국 유명성당과 성지 수도단체에 한국적 순교자상과 성모상 등을 봉안한 작가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불교와 인연도 남달랐다. 대학시절 서울 대각사에서 3개월간 반야심경과 금강경 등 불교교리를 집중적으로 공부해 불경에 대해 눈이 열릴 정도였다.

불교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였지만 실제 관음상을 조성해달라는 법정 스님의 청을 듣고 많이 고민하였다. 가톨릭 원로신부로부터 교리적으로 문제될 게 없으니 흔쾌히 하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젊었을 때부터 한국미술의 원류가 불교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그는 신앙의 본향은 가톨릭이지만 오랫동안 천착해온 한국적 예술의 본향은 불교였다. 젊은 날 불교미술을 접하면서 백제관음의 미소를 재현하고 싶은 열정을 숙원처럼 품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좋은 작품을 이룰 수 있는 인연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가톨릭 성모상 분위기의 길상사 관음상.

 

관음에 대해 잘 몰랐던 작가는 법정을 만나 머리에 쓰고 있는 관과 손에 들고 있는 병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올린 까닭을 물었다. 스님이 화관(花冠) 정병(淨甁) 그리고 세상의 괴로움을 구제(救苦)라고 답했다.

짧은 물음에 외마디 답이었다. 작가는 ‘꽃 관, 맑은 물, 세상고통을 구한다.’는 세 마디 말을 듣는 순간 작품은 마음속에 만들어졌다. 다음은 좋은 돌을 구해 조성하는 일이었다. 마음에 느낌이 온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렇게 완성된 관음상은 전통적인 양식보다 현대적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백제관음의 숭고미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아름다움이 베어있다. 부드럽고 긴 곡선의 목선 위로 보이는 얼굴은 중생의 고통을 안은 삼매의 미소가 깃들어 있다. 정병을 감싸 안은 손이 불상의 중앙에 자리 잡아 안정감을 주며 단조로움을 잊게 해준다. 아래 부분은 옷의 잔주름을 제거, 현대적 감각을 최대한 살렸다. 작가 스스로 한국적 아름다움의 진수를 담은 관음상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흡족하며, 불교와 가톨릭 양쪽에서 환영을 받아 기쁘다고 술회하였다.

그렇게 조성된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 앞마당에서 불자들을 반기고 있다. 점안식 날 법정 스님은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는 그 상징성이 같다”고 말했다. 작가는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종교가 울타리를 허물면 한마당이 될 것입니다”고 화답하였다.

종교의 가치는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다. 신의 뜻으로 구원받던 무소유를 실천하여 스스로를 구원하던 간에 목표가 동일한 점에서 두 분의 소리는 不二이다.

길상사에 가면 참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사랑, 무소유, 그리고 종교 간의 상생. 세속적인 주제에서 불교정신 그리고 종교 간의 화합까지 간단한 단어이지만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탐욕에 물들고 세상사에 지친 우리의 정신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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