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마음대로 쓰는 사람들은 팔자 운명이 붙지를 않아요

내 몸과 마음을 조복받으려면

질문 : 우리는 내 몸과 마음을 가지고도 왜 내 맘대로 안 될까요? 내가 나를 자유롭게 굴리고 싶은데 잘 안되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몸과 마음을 조복받을 수 있는지요.

답변 : 그래서 얘긴데 이 모든 것을 만약에 ‘길을 지나가다가도 천도재를 한다.’ 이 뜻은 뭐냐? 천도를 한다는 겁니다. 소나 말이나 돼지나 어떠한 사람이나 가다가 보면 그 속을, 남의 속을 다 아니깐…. 남의 속을 다 아는 것, 타심통이 도가 아니다 이런 것이 뭐냐 하면 타심통을 안다면 즉시 실천을 해야만 되는 겁니다. 그게 ‘도’입니다. 실천 없는 거는 도가 아닙니다. 오신통은 그릇을 만드는 거고 또 우리가 실천은 그 그릇대로 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무시하지 마세요. 육으로다가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는 거보다도 이 정신계의 참자기, 자기란 수억겁을 거쳐 온 아주 보배입니다. 그래서 내 몸은 그 억겁을 거쳐 온 그 주인공이, 즉 말하자면 주장자가 주인이고 나는 그냥, 몸은 시자인 것입니다. 시자일 뿐입니다.

살리고 죽이는 거는 그 주장자에 매여 있으니
남이 이러고 저러는 대로 쓸리지 말고
내 주장을 세워라 이겁니다.

여러분이 반가워서 악수를 할 때에 마음이 가니깐 손이 덩달아 따라간 거지, 마음이 안 가는데 손이 악수를 하려고 덩달아 따라가지는 않겠죠? 그래서 마음이 움죽거리는 것이 여러분들이 움죽거리는 거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따라서 매여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 매인 몸은 공했다. 매인 몸이기 때문에 공했다. 찰나찰나 물을 마셔도 내가 마셨단 말을 못 한다. 왜? 이 지구와 같은 이 몸속에도, 이 한 개체도 생명체들이 얽히고설키고 많이 있음으로서 어떤 것이 먹는다고 할 수 없으니깐 “내가 먹은 게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그 중생들이 달래서 나는 심부름만 한 거지, 아래로는 중생들의 심부름, 위로는 그 부처님의 시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이 아래의 중생들을 모두 흡수해야 된다.” 이러는 거는 조복을 해야 된다. 한마음으로 조복이 돼야 내가 마음먹는 대로 한마음으로 따라 준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의식들이 다 보살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겁니다. 부처님께서도 자기 마음을 그대로 천차만별로 보살행을 하게끔 자유권을 줬습니다. 자유권을 준 게 아니라 자기가 자유권을 가졌기 때문에 자유권이 있게끔 되는 거죠. 여러분은 ‘어휴! 내가 이거 뭐, 중생인데 이렇게 허공에 발을 떼어 놓을 수가 있겠나?’ 이러지만 우리는 그냥 거기다가 맡기고 관하고 이러는 게 그대로 내가 죽는 방법이요, 내가 함이 없이 하는 방법이요, 둘 아닌 도리를 아는 방법이요, 구경계에 이르는 방법이요, 전부가 아니 되는 게, 아니 하는 게 없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친척이 만약에 미국에 사는데 미국에서 급하게 기별이 왔다고 합시다. 그럼 어떡해야 되겠습니까? 그쪽의 마음도 이쪽의 마음도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길다 짧다, 악이다 선이다 이거를 전제하고 무조건이었습니다. 무조건이십니다. 우리도 무조건입니다. 이유를 붙이지 않아야 됩니다. ‘너는 고렇게 얄밉게 했으니깐 넌 그렇게 해도 싸.’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는 도저히 부처님의 그림자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럴 때에 어떠한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까?

여직껏 수차에 걸쳐서 여러분들한테 말씀해 드리고 실천을 하라고 그랬죠. 이거는 어떠한 거를 거기 집어넣고 해결을 하려고 하지 말고 주인공에다가 그냥 ‘둘 아닌데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자기 주인공에 관하면 그 주인공으로 그냥 나투게 됩니다. 나투게 돼서 그것을 멈추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급하니깐 그랬지만 가까운 데서 그럴 때는 데리고 와서 관하는 것도 알려 주고 이러면서 가르쳐 줘야 자기가 자기 발로 걸어갈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깐 가까운 데 사람은 조금 공부를 가르치는 편이고 또 가깝지 않고 멀리 있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줘야 합니다. 아셨죠?

그게 바로 무심 도리요, 바로 공용의 도리요, 공체의 도리요, 공식의 도립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뭐든지 내줄 수 있는 여건이라면 다 내준다 이런 거 말입니다. 내도 내도 줄지 않고 또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수만 이 허공을 다 집어넣는대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그건 체가 없는 까닭입니다. 체가 없는 데다가 체가 없는 걸 넣으니 이 천차만별의 생명들을 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는 법이 있겠습니까, 어디? 없죠. 그러니깐 인간에게는 다 자유권을 줬는데, 마음을 자유권으로 쓰라고 줬는데 자유스럽게 쓰질 못해요. 이게 작다 크다 판단을 하기 때문이죠. 속으로는 이게 적다 많다 이렇게 판단을 하지만 만약에 급한 일에는 판단도 필요 없습니다, 그게.

예전에 6·25 때 모래톱에서요, 총이 막 날아오니깐 총알을 다리에 맞아서 다리가 그냥 이렇게 저거 했는데도,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막 그냥 뛰는 거 있죠. 마음이란 그렇습니다, 마음이 급하면. 마음이 느굿하면 좀 천천히 걸어가게 돼 있고, 또 아프다고 그냥 꾀를 부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마음이 게으르지 않은 사람은 아파도 그냥 ‘일어나야지. 할 건 해야지.’ 하고 마음이 그렇게 돌아갈 때 바로 일어서집니다. 여러분들이 가난하다 뭐하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이 차차분해선 그냥 깔아지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면 ‘난 이제 죽는다.’ 이런 거 있죠, 왜. 그런 거 많지요. 그런데 자기 마음이 죽으니까 이 몸속에 있는 생명들도 다 죽는 거예요. ‘인젠 죽었다.’ 하는 거요. 이 몸속에서 작용을 해 줘야 할 생명들이 ‘나는 죽었다.’ 하니 그게 살 수 있겠습니까?

생각을 해 보세요. 위 공장의 책임을 맡아 가지고 있는 관리인 또는 간장 관리인, 소장 관리인, 대장 관리인, 콩팥 관리인, 방광 관리인, 척수·척추 관리인, 그 모두 이 두뇌는 모두의 관리인들이 다 폭삭 그냥 죽는 거예요. 마음이 말입니다. 의욕이 없어지고. 그러니까 아이, 이건 첫째 선두자가, 앞에 선 선두자가 마음이 ‘야, 이건 다 죽겠구나. 인젠 죽었다.’ 이러면 그 밑으로 쭐쭐 내려가면서 다 죽겠다는 거예요. 일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죽는 거죠. 그러니까 살리고 죽이는 거는 그 주장자에 매여 있으니 그렇게 남이 이러는 대로 쓸리지 말고 저러는 대로 쓸리지 말고 내 주장을 세워라 이겁니다. “악하고 선한 거를 다 놔야 된다.” 이런 원리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다 거기에 한데 합해서 돌아가죠.

여러분들이 살아나가면서 정히 급하고 그럴 때도, 이 국난에 이렇게 처해 있을 때도 여러분들이 미리미리 이런 걸 알고 ‘회사가 어떠한 지경에 놓여 있게 된다. 이렇게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할 때에 벌써 미리미리 이걸 처리를 해야 되겠죠. 다 인제는 꺾어지고 다 저거 한 연에 이걸 일으켜 세우려니까 힘들죠. 모두 가정도 그렇고 모든 게 다 그래요. 부부지간에 싸우고 헤어지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모두가 싸우는 거거든요. 내가 없다면 뭐가 싸울 게 있습니까? 부부지간에 만난다 하더라도, 자식의 인연을 짓는다 하는 것도 다 끼리끼리 만나는 인연입니다. 금은 금대로 모이고 인연이 되고, 무쇠는 무쇠대로 인연이 되고, 시장에 가면 사과는 사과대로 인연이 되고, 배는 배대로 인연이 되고 이렇게 인연이 된 사람들끼리 한 가정이 됐다면 그 가정에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러니 모두 각자 내 탓으로 돌리고, 둘 아니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고, 부드러운 말 해 줄 수 있고, 부드러운 행동 해 줄 수 있다면 그 집은 아주 화합이 되고 부유하게 늘어 가고 안 되는 일이 없이 그렇게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지, 왜 만날 그렇게, 그렇게 좁게 그냥 자기 마음을…. 꿈을 꾸구도요, 허, 그것도 맘대로 못해요. 아, 그거 그냥 주인공에다 탁 놓고 ‘그것도 거기에서 화해서 보이는 거니깐 거기에서 다 알아서 하겠지.’ 하고 탁 놓으면 될 거를 ‘이게 꿈이 나쁘니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니깐 일이 생기고 마는 거죠. 그게 팔자 운명이에요. 마음을 마음대로 쓰는 사람들은 팔자 운명이 붙지를 않아요.

이 모두가 살아나가는 방법이 그렇게 부처님의 그 뜻의 길을 쫓아가는 길이란 말입니다. 방편의 길! 이것이 바로 씨를 여물게 하고, 즉 말하자면 ‘귀신 방귀씨를 얻어서 귀신 방귀털을 먹여서 잘 길러 낼 수 있다’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귀신 방귀씨라니 그게 뭔가? 귀신 방구털이라니 그게 뭔가?’ 이러죠. 체가 없으니 그것이 다 귀신 방구털이지 뭡니까? 체가 없는 것이 체가 없는 것을 먹여 키워야 그게 정상적으로 키워지지, 체가 있는 것이 체가 없는 거를 키우려면 키워집니까, 그게? 그러니까 마음, 이 마음이 그렇게 여기서 점프하듯 그냥 넓어져야 됩니다. 그래야 물리가 터지고 그래서 불교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되죠. 아는 사람이 된다면 그건 함이 없이 모든 일대사의 인연을 다 짓는 겁니다. 함이 없이 하는 도리.

육신의 고통이 무서워요

질문 : 제가 얼마 전부터 계속 머리가 아프고 소화도 안 되는데 병원에서는 신경성이라고만 합니다. 저는 정말 힘든데 우리 인간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요? 저는 이런 고통이 너무 무서워요.

답변 : 예를 들어서 댁의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들이 전체 살고 있는데 댁은 그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관리인이며, 즉 말하자면 집합소밖에는 될 수 없죠. 그런데 항상 내가 산다고 하니까 거기서 돌봐주지 않는 거예요. 한마음이 돼야 이게 작용을 해 줄 텐데 한마음이 돼 주지 않는다면 대뇌로 통신이 되질 않아요. 대뇌에 통신이 돼야 중뇌에서 책정을 내려서 사대(四大)로 통신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마음법이 대승법(大乘法)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의 행이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한계가 따로 없어요. 우주가 한계가 있다, 삼천대천세계가 한계가 있다 이런 것도 없고, 넘어가면 넘어가는 대로 넘어가고, 넘어간다는 소리조차도 붙일 수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우리가 제일 시급한 게 지금 마음을 그렇게 넓게 쓰면서, 나쁜 게 들어왔을 때는 ‘나쁜 게 들어오게 한 것도 너니까 좋게 들어오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거기 놓아라. 또 잘돼서 들어오는 건 ‘아, 참 감사하구나.’ 하는 거를 느끼면서 거기 놓아라. 그래야 컴퓨터에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면서 새로이 자꾸 나온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근본이 뿌리라면 싹은 몸입니다. 이 싹은 이 뿌리로 인해서 전체가 삽니다. 그런데 뿌리가 형성이 돼 있기 때문에 지분이나 수분이나 철분 모두를 갖다 흡수해서 에너지를 올려보내게 돼 있습니다. 이건 자동적입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온 이 몸 자체는 바로 공기력과 태양력을 흡수해서 또 밑으로 내려보내는 거죠. 즉 말하자면 우리 몸에 정맥과 동맥이 서로 돌아가면서 살고 있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그런데 관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자기 뿌리를 믿어서 ‘뿌리야, 너 요만큼 에너지를 흡수할 거를 이만큼 좀 흡수해서 올려보내 다오.’ 하는 거나 진배없는 겁니다. 용도를 너무 잘 아니까 말입니다. 싹이 생각하는 거를 뿌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게 아니고, 예를 들어서 몸뚱이 하나가 턱 쓰러졌다 이런다면 그냥 발광을 합니다. 침착하게 ‘네가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려! 살리는 것도 너, 죽이는 것도 너다. 죽을 때가 됐으면 애나 어른이나 다 죽는 거지마는, 죽게 하는 것도 너고 살게 하는 것도 너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고 그냥, 죽는 거를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한데 그냥, 그 빈 손과 빈 발이 그냥, 송두리째 에너지가 방출되는 거죠. 그래서 온몸의 모든 의식들을 작용케 해서 낫게 해야 할 텐데, 이거는 뭐 금방 ‘아이고, 주인공!’ 이랬다가 금방 ‘아이구, 이거 어떡하나?’ 저 누구 부르고 누구 찾고 허, 이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있다면 지켜보고 있는 거죠. 지켜보고, 예를 들어 여러분한테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면 변호사한테 가서 청하지 않고 일이 됩니까? 청하지 않고도 됩니까? 안 그래요? 그리고 잘못됨과 잘됨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일이 됩니까? 밥을 짓지 않고 생쌀로 놓아두면 그냥 밥이 됩니까?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쌀을 넣고 스위치를 올리지 않으면 그냥 밥통은 지키고만 있는 거죠, 그냥. 그거와 같습니다. 변호사는 건수가 와야 할 텐데, 건수가 안 오니까 지켜보고 있는 거죠. 그거와 같아요. 생각 없이 되는 일이 있습니까? 송장이 무슨 일을 합니까?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아프다고 집착만 하지 마시고 전체 주인공에, 말하자면 전체 주인공의 일이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댁의 몸뚱이 한 덩어리에 생명체들이 헤아릴 수 없이 산다면 한 덩어리가 한마음으로 살고 있는 어떤 한 개체지 혼자 살고 있습니까? 그러니 좀 마음을 넉넉히 써서 ‘네가 끌고 가는 거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고 좀 맡겨 봐요. 그리고 죽는다 산다를 떠나 봐요, 좀. 네? 죽이든지 살리든지 제가 끌고 가는 거 제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제삼자인 내가 그렇게 애씁니까? 아, 생각해 봐요, 글쎄. 자기가 형성시켜서 자기가 끌고 가는 집이 헐어졌으면 집주인이 고쳐야지, 왜 집이 걱정을 해야 합니까? 이 집이 헐어졌으면 이 집 지은 사람이 고쳐야지, 왜 이 집이 걱정을 해야 합니까? 안 그래요?

열심히 기도했는데 정신이 왜…

질문 :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절에 열심히 기도하러 다니면서 정성들 들이던 분인데 언제부턴가 정신이 좀 이상해지더니 그의 자식도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시던 분에게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참 안타깝습니다.

답변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항상 여여하게 살면서도, 떼어 놓는 사이 없이 발길을 떼 놓으면서도 불법을 따로 찾으니 이렇게 난감한 노릇이 어딨겠습니까. 떡이나 해 놓고 밥이나 해 놓고 이 신 저 신 찾으면서 이렇게 해갈을 하고 다니는 이런 여러분이 요다음에 얼마나 누가 되는지 그걸 짐작도 못 하실 겁니다. 지금도 얼마나 고초를 받는 사람이 많은지 아십니까? 그렇게 온 절을 지어 놓고 정성을 지극히 들이던 사람들이 정신이 돌아가지고서는 헤매고 다니는 사람 많이 봤습니다. 또 물을 떠 놓고 산기도 드린다고 다니면서 그렇게 해 가지고 미친 사람을 내가 많이 봤습니다. 또 부처님을 집 안에다 모셔 놓고선 정안수 떠 놓고선 빌던 사람이 정신이 돈 거, 자기만 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대대로 내려가면서 그것이 풀리지 않으니, 자기 한 생각 잘못해 가지고는 그냥 그 손손이 내려가면서 그 곡경을 당하게 만드는 그런 문제가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러고서는 귀신을 그저 무슨 신 무슨 신 끌어다 대기만 했지,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해결을 못 했으니 그게 바로 그 어머니 아버지라면 그분들이 그렇게 만들어서, 온통 자기가 마음으로 만들어서 신들을 해 놓고서 그 신들을 해결을 못 하니까 대대로 내려가면서 그냥 그렇게 연관성이 생기고 유전성이 생기고 얽히고설키고 인과로서의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다 말로 다 하리까.

그리고 또 기복으로써 절에 다니면서 정성을 지극히 하던 사람 자손들이, 어머니나 부모가 하듯이 잘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거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극히 기복으로 다니던 사람들의 자손들이 시대가 변하는 대로 잘못하는 게 많지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자식도 그렇게 기복으로 부모가 그랬다고 해서 자식도 그럭하고 다니라는 법이 어딨습니까? 그러면 그 자식이 그렇게 하지 않아서 그 폐단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죠. 그 마음으로 지어놓은 신들, 귀신의 신들이 그 폐단성 주는 건 말도 못 합니다.

그래서 바로 내가 귀신이라면 모두가 귀신이고 내가 바로 선신이라면 모두가 선신인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지어 놓고 귀신을 만들어 놓고 그 귀신에 말려 가지고 대대로, 몇 손 대대로 내려가면서 그러다가 그냥 아주 시신도 없이 그냥그냥 거리로 나앉게 되는 사람들을 많이 봤고, 자손들이 폐병이 들어서 대대로 그냥 그렇게 앨 쓰는 사람도 봤고, 자식들이 홀딱 망해서 그렇게 그냥 5대 6대가 그렇게 되는 사람도 봤습니다. 또는 며느리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딸이 그렇게 되고, 딸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누구가 그렇게 되고…. 연방 아들도 정신이 돌아서 그렇게 되고. 야, 이런 일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 무서운 그 일들을 잘 모르실 겁니다. 대략 짐작은 하시겠지마는 나는 그것이 너무 무섭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모르고 저지른 일이지마는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유전성으로써 유전되는 그 이치들이 너무나 무섭게 돌아간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중학생 아들이 말썽만 부려요

질문 : 저는 중학생 아들이랑 둘이 살고 있는데 이 아들 녀석이 자꾸 학교도 결석하고 남의 물건에 손 대고 말썽을 부려서 관도 해 보고 혼내도 보고 때려도 보고 나름 한다고 했는데도 말을 안 들어요. 저는 장사를 하느라 하루 종일 애만 지켜볼 수도 없고 애 앞길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합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답변 : 그게 끼리끼리 만난 인연들이란 얘깁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나 그런 걸 보는 사람이나 똑같은 인연이거든요. 똑같은 인연끼리 만났으니 어떻게 해야 그것이 없어질까요? 그러니까 ‘주인공, 아들 주인공하고 나하고 둘이 아닌 까닭에 당신만이 그거를 돌려놓을 수 있고 해결할 수 있잖아. 딴 데서 해결 못 하니까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놓으시라니깐요. 그냥 놓고 태평할 수 있는 마음의 성장이 됐다면 그거는 다 착하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체가 있는 것이 마음이 아닙니다. 체가 없는 것이 마음이지.

그러니까 그게 백 마디 천 마디 해도 다 소용없는 말입니다. 그 잘못된 것이, 과거로부터 온 것이 잘되진 않아요. 그러니까 과거로부터 온 거라면 과거에 살던 자기 주인공한테 모든 걸 관하시고 거기다가 그냥 편안하게 놓으세요. 그래야 해결이 납니다. 마음으로 지은 거 마음으로 갚아야 되지, 마음으로 해결을 해야지, 그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육체가 고생이죠.

그 요량을 몰라서 그렇지, 자꾸 막다른 골목으로 자식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거기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면 정말이지 큰일 나는데 글로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가는 걸 보고도 주인공을 진짜로 믿는다면 아, 거기다 그냥 맘 편안하게 그냥 내버려 두는 거예요, 그냥. 그러면 거기에서 마음의 기탄이 없고 걱정이 없으니깐 아이, 급하잖아요. 주인공이 자기의 영혼을, 영혼이 영혼을 시켜서 그 영혼을 끌어오니까, 마음이 끌려오니깐 육체도 끌려오죠. 그렇게 해서 착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 체가 없는 마음이 주인이고 체가 있는 몸은 체가 없는 자기에게 시자일 뿐입니다. 시자가 잘해야 그저 마음 따라서 하되 그 시자고 주인이고 그 가운데 내가 보고 듣고 하는 판단이 흐리면 안 되죠. 흐리게 하지 말고 무조건 거기다 맡기고, 모든 것을 다 이렇게 잘해서 거기다 맡기고 나간다면, 무조건 물러서지 않고 패기 있게 그냥 그렇게 나가시면서 점프하시면요, 그대로 여러분들이 편안할 수가 있어요. 정말입니다. 이건. 그래서 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시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 거기 가도 고만 안 가도 고만 마음공부 하는데 가면 뭘 해. 여기 집에서 하지.’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더러는 있으시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길에 오다 가다가도 배우는 수가 있는데, 이 스님네들한테 와서, 또 이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같이 토론을, 얘기를 하는 거를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은 ‘내가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 하는 것도 배울 수 있고 ‘저렇게 해야겠다.’ 하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저 그 마음공부를 잘하시면 덩달아 따라서 그거는 없어지게 돼 있습니다. 한번 실험해 보세요. 없어지나, 안 없어지나.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