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원증회고(怨憎會苦)

불교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크게 여덟 가지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증회고(怨憎會苦)’이다. ‘원증회고’는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꼴 보기 싫은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데서 오는 심적(心的)인 고통을 말한다.

만나기 싫으면 안 만나면 될 것 같지만, 인간사회는 ‘독불장군’이라는 말과 같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부모, 형제, 가족, 선후배 등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간다.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이 상해도 배짱이 뒤틀려도 참아야 한다. 간혹 TV를 보면 인적 없는 산속이나 왼 딴 섬에서 혼자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역시 극심한 고독과 싸워야 한다. 고독에는 강자가 없다. 보기 싫지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 괴로운 일이다.

그와는 정반대인 애별리고(愛別離苦)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이별할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고통. 이 두 가지는 극과 극이다. 어쩌면 인간은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고 사랑과 증오가 교차하는 애증의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왠지 자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조금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특정한 이유 없이 그냥 정서적일 때도 있고 이해관계 때문에, 또는 이런저런 일로 인간관계가 꼬여 버린 경우도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는 상대적이어서 자신의 탓도 적지 않다. 필자도 살다가 보니 그런 경우가 한두 번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내 잘못이 더 많았다. 문득문득 후회가 된다.

일본 도쿄에서 열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가마쿠라(鎌倉)는 수국과 선종사찰로 유명한 곳이다. 6월이 되면 전국에서 몰려든 수국 인파로 길이 터진다. 그곳에 가람과 문화가 그림 같은 엔가쿠지(圓覺寺)가 있고 철길 건너 맞은편에 ‘도케이지(東慶寺)’라는 절이 있다. 13세기 말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자였던 호조 가문의 도키무네가 죽자 그 아내는 남편이 묻혀 있는 엔가쿠지 맞은편에 절을 창건해서 비구니로 여생을 마쳤다. 그 절이 비구니 절인 도케이지다.

도케이지(東慶寺)는 에도시대 남편들에게 학대받던 여성들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과거 일본은 남자들은 마음대로 이혼할 권리가 있었지만, 여성들은 그 어떤 이유로든 이혼할 권리가 없었다. 남자가 이혼해 주지 않으면 두들겨 맞으면서도 한평생 살아야 했다. 못된 남편들의 폭력, 욕설, 술주정, 학대 등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여성들은 시대를 원망했다.

그러나 그런 여성들에게도 다행히 한 가닥 해방구, 탈출구가 있었다. 남편의 폭력 등으로 인해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으면 ‘도케이지’로 도망을 쳤는데, 그곳은 남자들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신변 보호가 되었고 남편들의 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성들이 도망하여 그곳에서 3년만 지내면 이혼이 허락되었는데, 문제는 여성들이 어떻게 남편들의 추격에 붙잡히지 않고 도케이지 정문 문턱을 넘는가였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붙잡히면 도케이지 측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여자는 도케이지 정문을 코앞에 두고 다시 남편의 손에 끌려가야 했다.

아마 에도시대에는 도케이지 정문 앞 계단은 도망가는 여자를 뒤쫓는 남편, 붙잡히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도망가는 여성들로 슬픈 광경을 이루었을 것이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다시 붙잡혀서 남편에게 질질 끌려가는 광경은 차마 보기 힘든 인간사의 한 단막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케이지 측은 여자가 신발 한 짝 만이라도 벗어서 정문 안으로 던져 넣으면 일단 들어 온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여성들은 급박해지면 신발 한 짝이라도 벗어들고 죽을힘을 다해 던졌다.

그렇다고 무조건 여성 편은 아니었다. 도케이지 측은 ‘연절사법(풣切寺法)’을 만들어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고, 이혼을 성립시킬 때는 남편도 불러서 진술을 받았다. 물론 초록색은 거의 같았다. 에도막부에서도 정식으로 연절사법(풣切寺法)을 인정했고, 도케이지는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이혼 재판소 같은 역할을 했다. 인연을 맺어주는 것이 인간 세상의 미덕인데 악연을 끊어주는 곳이라고 하여 ‘연절사(풣切寺)’라는 별명이 붙었다.

도케이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千뒱)가 만년에 남편 두 명과 사별 후 세속과 인연을 끊고 살았던 절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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