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이지 않은 틀 깨는 작업
일반적이지 않은 틀 깨는 작업
  • 김성수 마음과학연구소 대표
  • 승인 2019.12.06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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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논리가 중요치 않은 글쓰기

어휘·맥락 중요한 일반 글쓰기
나이 들며 길들여진 결과물일 뿐
종잡을 수 없이 횡설수설하거나
오감 옮겨 적는 글도 가치 있다

횡설수설(橫說竪說) 글쓰기

횡설수설 글쓰기는 여행으로 치면 의도적인 길 잃기. 길을 걷는 사람이 의도치 않게 길을 잃으면 실종된다. 하지만 걷던 길을 의도적으로 버리면 탐험이 된다.

언어의 활용 중 횡설수설은 사람 입에서 나온 노폐물 취급 받는다. 횡설수설은 취객의 씨불임이나 인지부조화의 언어, 호들갑 떨거나 깜짝 놀란 사람의 말 따위에서 볼 수 있다. 횡설수설은 말 그대로 비루하고 못난 사람의 종잡을 수 없는 말이니 어휘의 맥락이나 품격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의사전달의 절박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설사 그가 거짓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는 뭔가 절박하게 표현 중이다.

횡설수설 글쓰기가 필요한 이유는 뭘까. 세상의 언어 질서를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세상의 언어질서는 당신의 의식을 횡대와 종대로 줄 세워서 길들여왔다. 도덕과 윤리, 예의범절, 소통과 친절의 언어, 상하관계의 언어 등으로 분류된 횡대와 종대이다. 언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규범 질서의 그물망이다. 당신의 언어의식은 거대한 그물에 갇힌 정어리 떼처럼 알게 모르게 포획돼 있다. 자의든 타의든 사회적 동물로서 당신은 언어 규범이라는 그물망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평소 어린애에게 쓰던 말을 스무 살쯤 많은 어르신에게 써보면 확인할 수 있다.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그 분에게 미안하지만, 자리 좀 양보해줄 수 있겠니?’라고 말해보시라. 보이지 않던 언어의 그물망이 홀연히 드러나서 당신의 목덜미를 옥죌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직접 쓰고 폐기하는 글쓰기명상의 방식이 아니라면, 당신의 글은 타인에게 전달되는 체계에 놓인다. 당신이 쓰는 단어는 기본 맥락을 유지하면서 생각을 드러내야 한다. 객관성과 전달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의미와 맥락의 언어들이 이어달려야 한다. 일정 부분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의미와 맥락은 사라지고, 횡설수설이 된다.

그런 점에서 횡설수설 글쓰기는 언어라는 사회 질서에 대한 모반이다. 의미와 맥락과 일관성을 뒤집거나 도발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당신의 언어는 애당초 의미와 맥락, 일관성이 없었다. 당신 언어의 일관성은 히말라야 계곡길처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신의 유년기 언어를 기억하기는 어려울 터. 분명한 것은 그 당시 언어는 맥락이나 의미 따위를 머금지 않았다. 엄마가 그냥 당신의 신호를 알아들었을 뿐이다. 유아의 표정, 장난감 같은 손짓, 고양이 잠꼬대 같은 옹알이만으로도 소통은 충분했다.

한 살이 되고, 두 살이 되고, 세 살이 되면서 당신의 언어는 종대와 횡대의 사회적 제식 훈련에 노출되었다. 갑갑해도 할 수 없고, 귀찮아도 할 수 없고, 재수 없어도 할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당신의 가족, 놀이, 음식, 노래, 운동, 그 어디에서고 종잡을 수 없는 횡설수설은 허용되지 않았다. 당신의 의식과 언어는 그렇게 길들여졌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언어는 반드시 질서정연하고, 의미 전달이 명확하고, 문법 안에서 견뎌야 하는 도구인가. ‘횡설수설이야말로 나의 최초 언어이자, 이승의 마지막 언어일 텐데.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게 횡설수설이었음을 죽음의 순간에 깨우치게 될지 모른다. 나는 왜, 언제 그런 유희와 의식의 자유를 포기했을까. 도대체 세상 어디에 언어처럼 교묘하고 집요한 강제 질서가 또 있단 말인가. 우리는 왜 논리성, 개연성, 합리성, 근거 따위를 이고지고 여기까지 왔을까. 끔찍한 언어 포획망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까. 언어는 인류의 의식이 낳은 옥동자이지만, 이제 언어와 의식이 서로 묶고 묶여서 자유로운 횡설수설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횡설수설이 왜 이렇게 낯선 일이 되고 말았는지.

- 어떤 말이든 지금나오는 대로 쓴다. 그 다음에는 의도적으로다른 의식 영역의 말을 적으라. 욕설이 나오면 욕설을 적었다가, 몸 감각을 적고, 그 다음에는 기억을 적고, 그 다음에는 감정을 적어보라. 전혀 연결성 없는 말을 의도적으로적어간다.

- 친구, 연인, 옛 스승, 상사, 부하 등을 떠올리면서, 술 취한 사람처럼 횡설수설 써보기.

- 자신의 잠꼬대를 받아 적는다고 믿고 적어가기.

-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서, 여기저기 나뒹구는 단어나 의미를 명사형으로만 적어보기.

긴 세월 잘 다져진 길을 버리고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두렵고, 어렵고, 의미 없어 보인다. 전 국민 대상 사회교육 프로그램 안에서 성장한 글쓰기는 의미의 일관성과 형상화를 좋아하지만 횡설수설 글쓰기는 그런 글에 낙제점을 준다. 세상의 언어 질서를 뒤집어서 말길이 막히고, 럭비공 같고, 종잡을 수 없을 때 횡설수설은 그다워진다. 그런 점에서 맑은 정신에 횡설수설은 당신의 두뇌를 쥐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의식의 탐험임을 잊지 않는다면, 당신은 의식의 새 길을 열기로 한 모험가 반열에 선 것이리라. 당신은 때로 횡설수설할 권리가 있다.

오감(다섯 감각)동원 글쓰기

당신의 한 순간을 색과 맛과 냄새와 소리와 촉감으로 체험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삶은 평면일까 입체일까. ‘오감 동원 글쓰기는 밋밋하고 건조한 삶의 결을 정성껏 매만지는 글쓰기이다. 2차원의 평면적 삶을 3차원으로 일으키는 일이다. 당신의 존재성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다섯 느낌을 매만지는 일이다. 사소한 일 한 가닥에서도 풍성함을 맛보는 일이다. 관찰 대상의 해상도는 높아가고 존재는 섬세해지며 맛과 향기가 싱싱해지는 글이다. 납작하게 눌러 붙은 마른 빵이 부풀고, 코끝이 데일 것처럼 김이 모락거리며 달콤한 단팥내음이 혀에 감기는 일이다.

당신은 당신의 다섯 감각 기관이 무언가를 접촉하면서 생명이 되었다. “나 빼기 눈, , , , 피부를 산수 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무엇이 남는가. 당신의 근본 두려움은 바로 이 다섯 감각기관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다. 보는 능력이 사라지고, 듣는 능력이 사라지고, 냄새 맡는 능력, 맛보는 능력, 감촉하는 능력의 소멸은 실질적인 죽음이다. 그런 점에서 오감의 생동은 생명력 자체다. 당신은 이 다섯 감각 기관을 통해서 세계의 정보를 얻고, 이해하며, 그 이해를 기반으로 다시 세상을 보고 접수한다. 오감의 작동과 정보 수집, 판단과 이해의 과정 안에서 발생하는 물적, 정신적 행위가 이다.

당신은 같은 사안을 두고 평면적 설명에 치중하는 글을 쓸 수도 있고, 다섯 감각기관을 활용하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창 밖에 눈이 내린다는 말은 눈이 내리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이와 같은 설명 한 줄을 오감 동원해표현해본다고 하자.

눈의 입장에서는, 창 밖에 하얀 알갱이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음을 보고 있다. 코를 중심으로 쓴다면, 첫 눈이 내리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어린 시절 엄마의 분내음을 맡는다고 쓸 수도 있다. 귀의 입장에서, 바람이 걷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표현해도 누가 시비하지 않는다. 내리는 눈에 대한 혀의 입장은 어떨까. ‘혀를 내밀어 맛을 보다가 문득 여섯 살 시절의 나를 만났다고 할 수도 있다. 피부는 눈이 닿자마자 녹아서 무슨 느낌인지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눈이 내 몸을 외할머니처럼 쓰다듬는다라고 형용할 수 있다. ‘창 밖에 눈이 내린다는 한 마디는 다음과 같은 입체적 상황으로 묘사될 수도 있다.

흰 눈이 내린다. 첫 눈이었다. 눈은 대로변 양버즘나무를 지울 듯이 내린다. 건너편 비오자이네 호텔의 배기구에서 하늘거리던 흰 연기는 쏟아지는 눈발에 뒤섞여 연기인지 눈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거리의 소음이 쏟아지는 눈에 파묻혀 일순 정적의 세계가 펼쳐진 듯했다. 해랑길 4차선 아스팔트에 쏟아져 내리는 눈은 까맣고 번들번들한 도로 위에 닿으면서 사라졌다. 그는 방금 흰 알갱이들로 있었던 것과 사라진 것을 지켜보았고, 잠시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등 부위 어딘가, 참기 힘든 간지러움을 느꼈다. 왼손을 등으로 갖다 대 중지를 곧추세웠지만, 간지러운 부위는 잡히지 않았다.’

오감 동원 글쓰기는 평면으로 놓여있던 판자 하나를 텐트나 집으로 입체화시키는 글쓰기이다. 직설적이고, 근거 명확하고, 결론만 짧게 쓰는 글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오감 동원 글쓰기가 힘겨운 장애물 같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아주 단순한 사건 하나만을 잡아 적어가보라. 숨어 있던 의미와 새로운 발견, 풍성한 감각의 세계가 당신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밥 한 숟가락 먹는 모든 순간을 오감 동원 글쓰기로 적어본다.

- 당신이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오감을 동원한 글쓰기를 해본다.

- 지금 일어난 한 생각을 적고, 그것에 대해 오감을 동원한 글쓰기를 해본다.

- 최근에 가장 강력했던 감정에 대해 오감 동원 글쓰기를 해본다.

- 어떤 사람에 대해 오감을 동원하여 묘사해본다.

- 어떤 현상이나 물질에 대해 오감을 동원하여 묘사해본다.

좋은 산문이나 소설을 유심히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감각 기관이 다양하게 동원되는 소위, 묘사 글쓰기를 자주 볼 수 있다. 다섯 감각 기관을 활용하여 하나의 사물, 하나의 사건을 적어간다는 것은 글쓴이의 감각 안테나를 높이 세우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미각으로 그려보는 일, 소리를 모양으로 형상화하고, 이미지를 냄새로 표현하고, 추상적인 대상을 혀로 맛보고, 보이지 않는 대상을 감촉으로 표현하는 글쓰기는 자연스레 의식의 확장과 풍성함을 담는다.

오감 동원 글쓰기는 통상적이지 않은 글쓰기 방법이다. 오늘처럼 정보 전달과 효율성 중심 사회에서는 소모적 글쓰기로 비칠 수 있다. 오감 동원 글쓰기가 낯선 당신은 어쩌면 학술용 글쓰기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 학술용 글쓰기는 곧 무슨 말인지 알면 되는글쓰기이다. 전달 내용을 알기만 하면 장땡인 사회는 건조하고 단단한 사유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 ‘오감 동원 글쓰기는 신속함이나 적확함, 효율성, 정보 집약성 면에서 취약하다. 하나의 사물, 하나의 사건에 대한 여러 감각기관의 접촉은 그만큼 느림, 기다림 통찰, 비효율, 깊음, 고요와 같은 명상적 행위와 닮았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 삶이 재미없거나 말라빠졌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가. 그럴 때는 사사로운 사안 하나를 들고 오감 동원 글쓰기를 해보라. 젓가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앉아 그것을 찬찬히 바라보기. , . , , 피부 감각을 동원하여 그 젓가락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감각적 사유를 적어가보기. 그 작은 행위 하나에도 평소 보지 못했던 것이 있고, 듣지 못했던 소리가 있고, 맛보지 못했던 맛이 있고, 낯선 내음이 있고, 신선한 감촉이 있다. 다 적은 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잘게 찢어 없앤다 한들, 무슨 문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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