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의 길 시코쿠] 34. 미츠야마 지역 순례
[정진의 길 시코쿠] 34. 미츠야마 지역 순례
  • 박지산 자유기고가
  • 승인 2019.12.05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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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헨로”… 순례는 끝나지 않았다

미츠야마에만 8개 사찰 존재
첫 순례서 만난 납경소 직원
정성으로 납경한 모습 ‘감동’
명물 도고온천에 몸 담그니
다시 걸을 수 있는 힘 얻어
46번 사찰 죠루리지 대사당. 코보대사상에 가사와 장삼을 입혀둔 것이 특징이다.
46번 사찰 죠루리지 대사당. 코보대사상에 가사와 장삼을 입혀둔 것이 특징이다.

산굽이 계곡 길을 돌아 쿠마고원을 내려오니 길이 일사천리로 이어진다. 쿠마고원 아래의 마츠야마(松山) 시내에만 8개소의 사찰이 모여있고, 또 사찰간의 거리가 멀어 봤자 10km 내외의 편안한 거리다.

심지어 46번 죠루리지(淨瑠璃寺)와 47번 야사카지(八坂寺)는 사찰간의 거리가 겨우 400~500m남짓으로 매우 가깝게 붙어있다. 그러다보니 차량으로 순례하는 단체나 개인들이 도보순례 체험을 위해 걷는 경우가 많다. 실제 도보 순례자로서도 가까운 거리가 조금 낯설다.

더욱이 마츠야마시는 에히메현의 현청 소재지인데다 예로부터 도고온천(道後溫泉)으로 유명한 관광지라 종종 인파에 휩쓸리기도 한다. 순례길도 하필 온천 앞을 지나다보니 종종 길을 잃곤 하지만, 오히려 그간의 적막했던 순례길에서 떠들썩한 생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다보니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선 잠시 흰 옷과 지팡이를 내려놓고 온천을 즐기며 쉬는 경우가 많다. 필자역시 여러 차례 순례를 하며 이곳에서 만큼은 여유를 부리기 위해 일정을 배분 했다.

새벽 일찍 쿠마코겐을 내려오는 길. 33번 국도 옆을 걷다가 산길로 들어가 미사카도게 고개를 넘어 내려간다. 미사카도게 고갯길을 내려오면 오래된 민가가 하나 서있다. 중세에는 이 고갯길을 내려온 순례자들이 묵던 여관 ‘사카모토야(坂本屋)’다. 지금은 여관으로서의 기능은 없지만 순례자들에게 오셋타이를 하는 셋타이쇼(接待所)겸 휴게소로 쓰인다. 필자도 이곳에서 한 번은 간단한 식사를 받은 적 있다.

순례길 옆을 지나다보면 꽤 많은 곳에 옛 셋타이쇼의 자리나,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이던 민가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곳은 으레 순례자들이 감사의 의미로 오사메후다를 하나씩 남기고 간다. 어느 민가에선 이렇게 모인 오사메후다를 살펴보니 가장 오래된 것은 몇 백 년 전의 것도 있었고, 시코쿠 순례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순례자의 것도 나왔다고 들은 적 있다.

46번 죠루리지는 규모가 작은 도량임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키가 큰 고목들에 둘러싸여 있고, 또 경내의 연못이 푸른 기운을 더해준다. 죠루리지는 또 필자가 순례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 잊을 수가 없다.

2011년 첫 순례에서 죠루리지를 참배하고 납경을 받기위해 납경소에 들어섰을 때의 일이다. 납경을 써주시는 보살 한 분이 한창 전화 통화를 하다 나를 보고선 급히 전화를 마무리 했다. 납경장을 펴서 건네주려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분은 손을 닦고는 목에 가사를 걸고서야 두 손을 내밀어 납경장을 달라고 했다. 나는 그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보통 시코쿠 88곳의 사찰을 돌다보면 항상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납경소에서의 응대 방식이다. 흔히 시코쿠 순례 납경장에 받는 글과 도장이 기념품처럼 이야기 되곤 하지만 이는 큰 실례다. 시코쿠의 사찰들은 납경장에 순례자들이 받아 가는 것은, 곧 88곳의 본존불을 모셔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납경을 써주는 납경소의 응대방식과 담당자의 태도는 순례자들의 입에 자주 회자된다. 마치 기계처럼 성의 없이 납경을 해주는 곳이 있는 반면, 넉살 좋게 이야기를 붙이며 순례자들과 교류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이곳 죠루리지는 순례자 한 사람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 하던 일을 멈추고 여법하게 갖추어 글을 써주는 것이다. 

그 뒤로도 몇 번 순례를 할 때 마다 그때 그 분이 계신가하고 내심 기대하며 찾았지만, 인연이 아닌지 뵐 수 없었다. 이 외에도 50번 한타지(繁多寺)에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노스님이 힘찬 일필지휘로 납경을 써주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후에 여쭈어 보니 구순이 넘으신 나이인데도 납경소 소임을 맡아 나오시는 분이셨다.

미츠야마시의 명물인 도고온천 본관의 전경.
미츠야마시의 명물인 도고온천 본관의 전경.

47번 야사카지에서 48번 사이린지(西林寺)를 향하는 길 중간에 몬쥬인(文殊院)이라는 작은 사찰과 만난다.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12번 쇼산지에서 만났던 ‘에몬 사부로 전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시코쿠 순례의 연기설화 속 최초의 순례자인 에몬 사부로의 집이 바로 이곳 몬쥬인이라고 전하기 때문이다. 또 몬쥬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에몬 사부로가 오사메후다를 처음으로 공양 올렸다는 대사당도 있다. 순례의 전체 여정 중반에서 순례의 시작과 관련된 장소들과 만나면서, 다시금 순례의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된다.

48번 사찰쯤 넘어서면 이제는 본격적인 마츠아먀 시내에 들어선다. 빼곡한 주택가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차량의 통행도 정신없이 지나다닌다. 덕분에 길을 잃기도 쉬워 여기저기 숨어있는 빨간 화살표를 잘 찾아 다녀야 한다. 점심 쯤 돼서 마츠야마시 중심에 있는 51번 이시테지(石手寺)에 이르렀다.


이곳 이시테지도 에몬 사부로 전설이 전한다. 에몬 사부로의 환생이었다는 영주의 아들이 쥐고 태어났다는 돌을 봉안하고 있는 까닭에 사명이 이시테(石手)가 됐다. 다만 이시테지는 여러모로 혼란한 사찰이다. 관광지로 유명한 까닭일까? 사찰의 분위기가 붕 떠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화 입간판들과 통일성 없이 모셔진 조악한 불상들이 도량의 차분한 기운을 흩뜨리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범종각 앞엔 우리나라의 돌하르방까지 서있다. 오죽하면 일본의 순례자들도 “이시테지는 언제나 카오스”라고 혀를 찬다. 여러모로 아쉽기 그지없다.

이시테지에서 좀 더 힘을 내면 53번 엔묘지(圓明寺)까지도 충분히 갈 수 있지만, 여기선 한번 배낭을 내려놓는다. 앞서 말했듯이 도고온천에서 몸을 풀기 위해서다. 도고온천의 원천은 이시테지에서 20여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온천 측에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라며 홍보하지만 사실은 알기 어렵다. 다만 중세엔 정토신앙의 고승인 잇펜(一遍)스님이 정비하고, 또 근대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가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에 등장하거나, 메이지 일왕이 입욕하는 등 역사 속 여러 장면에 간간히 출연한 역사적인 온천임에는 틀림없다. 심지어 온천 원천이 솟는 본관건물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지브리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온천장 건물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온천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가벼운 몸으로 온천욕을 즐기러 나선다. 시간제한이 있는 본관과 별개로, 지역주민들이 주로 찾는 욕탕인 츠바키노 유(柏の湯)로 향한다. 온천수가 솟아 나오는 돌 가마엔 마츠야마가 자랑하는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싯구가 새겨져 있다.
“십년의 땀을 도고의 온천물에 씻어 내어라,”

온천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낮이 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등과 어깨엔 눌린 자국들. 길에서 오며가며 마주친 순례자들이다. 탈의실 한쪽엔 큰 배낭과 순례자의 백의도 보였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저들도 순례에서 흘린 땀을 씻어내러 온천에 온 것이다.

탕에 몸을 담그곤 여태껏 걸어온 길들을 되돌아본다. 발심의 아와에서 시작해 헨로의 난관인 쇼산지를 넘고, 바닷가에 우뚝한 탑이 인상적인 23번 야쿠오지까지 걸었다. 수행의 토사에 들어서 제비가 깃들던 죠만지를 들리고서 기나긴 길들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 깊은 산골이 가득한 쿠마고원을 넘어 내려온 보리의 이요에 들어서 이곳 마츠야마까지. 하나하나 얽힌 이야기와 생각한 마음을 풀자면 몇날 며칠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두 발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스스로 대견할 따름이다.

하지만 아직도 30여 곳이 넘는 사찰들을 모두 돌고, 다시 1번 료젠지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1번으로 돌아감으로서 순례길은 하나의 원을 만든다. 또 끝내는 코보대사의 묘굴이 있는 와카야마의 고야산까지 참배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시코쿠 순례를 결원(結願)했다고 할 수 있다. 순례길 중간에 들릴 수 있는 시코쿠의 영산(靈山)이자 서일본 최고봉인 이시즈치산(石鎚山)또 빼 놓을 수 없다.

순례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지금껏 온 만큼 더 나아가야 하지만, 그래도 나아갈 길이 있다는 것에 또 기쁠 따름이다. 길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보고 배울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옛날 코보 대사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온 이 길에서 또 어떤 가르침이 나를 기다릴지 알 수 없다. 다만 마음을 열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뿐이다.

시코쿠 순례 끝에 마츠야마에서 눈을 감은 근대 시인 타네다 산토카는 말했다. “인생은 곧 헨로다”라고. 순례라는 이 여정은 진리를 찾아가는 우리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시코쿠 순례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아직 순례길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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