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前 조계종 종정 스님

일본 한국사찰을 함께 방문한 고암 前 조계종 종정 스님(사진 왼쪽서 세번째), 두번째는 삼중 스님.

조계종서 종정 스님이란 승가의 정신적 지주이며 존경받는 가장 큰 어른이다. 이렇게 대단한 자리인 종정을 한번도 어려운데 무려 세 번씩이나 역임한 고암 스님(1899~1988)은 인욕과 자비를 최우선으로 실천하며 겸손과 하심행을 한평생 일관한 참 수행자였다. 흘륭한 수행자적 풍모로 고암 스님은 1967년 3대 종정에 오른 이후 흔들리던 조계종단서 중심적인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흔히 불가에서는 자비보살이라는 말로 수행자를 높이지만, 고암 스님은 진정 무소유, 무집착, 무차별, 자비보살이라는 말에서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분이셨다. 그것을 증명하는 고암 스님의 일화는 많다.

조계종 종정 세 차례나 역임
무소유·무집착·무차별 실천

불가에서는 스님들끼리 만나면 삼배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특히 큰스님을 만나면 후배 스님들은 삼배의 큰 절을 올린다. 그런데 고암 종정 스님에게 삼배를 올릴라 치면 한 배만 받고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고암 종정 스님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절을 하다만 나는 황당한 마음에서 질문한 적이 생각난다. “대한민국서 삼배를 종정 스님이 받지 않으시면 누구에게 삼배를 해야 합니까? 어서 앉으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자, 고암 종정 스님은 “그냥 악수하면 되지, 왜 한사코 사람을 불편하게 해요! 그냥 앉아요.”라고 잘라 말했다.

나는 천진하고 겸손한 고암 종정 스님의 이러한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더욱이 자신의 시자나 상좌라도 일단 스무 살이 넘으면 항상 존댓말을 쓰셨다. 고암 종정 스님을 친견한 뒤 나도 조금이나마 종정 스님을 닮아보겠다는 생각에서 행동에 옮겼다. 그때부터 나도 신도들이 삼배라도 할라치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든 존댓말을 쓰는 버릇도 그즈음에 생겼다.

종정 스님은 특히 자애심이 크셔서 불쌍한 신도들에게는 주머니에서 돈을 집히는 대로 세지 않고 손에 쥐어주셨다. 당시 지방 사찰서 종정인 고암 스님을 법회에 초청하면 법문비를 제법 쏠쏠히 드리는게 예의였다. 하지만 고암 스님은 절 분위기를 살펴보고는 가난하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도 모르게 법당의 탁자 위에 법문비를 올려놓곤 오셨다. 건네는 방법도 정말로 조용히 마무리하는 하심의 모습을 보이셨다. 바로 이런 풍모가 종정 직을 세 번씩이나 연임할 수 있게 만든 밑바탕이 아니었나 싶다.

한번은 내가 고암 종정 스님께 걱정 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리 잡히는 대로 베풀기만 하시면 나중에 병들고 거동도 불편하실때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제는 노후대책이라도 조금씩은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그러자 고암 스님은 “노후대책? 그럼 예금하라는 말이지요? 난 빚이 많아서 그 빚을 죽을 때까지 갚아야 돼요.”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종정 스님께서 무슨 빚이 있으셔서 그러십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분명히 있지요. 오늘은 한가하니 내가 빚진 이야기를 좀 해줄께요. 내가 19살 때 강원도 금강산서 공부가 하고 싶어졌어요. 왜정때라 금강산에 입산하려면 나룻배로 큰 강을 건너가야 하는데 당시 뱃삯이 10전이었죠. 그런데 주머니에는 탁발해서 모은 5전밖에 없었어요. 뱃사공한테 딱한 사정을 말했지만 결국 배에서 질질 끌려나왔지요. 그런데 배 안에서 어린애 젖을 물리던 젊은 아낙네가 스님 이리오세요. 제가 5전 보태 드릴 테니 어서 배에 타세요라고 하더군요. 내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탓에 고맙다는 인사를 한마디도 못했어요. 입에서만 맴돌 뿐 배에서 내릴 때까지 젊은 아낙네의 이름과 주소 조차도 물어보지 못했죠. 그러니 한평생 그 빚을 갚으려면 죽을 때까지 갚아도 못 갚을 거에요.”

정말 그러셨다. 뱃삯 5전을 갚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고암 종정 스님은 아마도 그 수백배나 되는 돈을 주변 가난한 이웃들에게 되갚았다. 자비로운 심성으로 불자들의 마음을 훔친 고암 스님이 유점사서 남긴 또다른 일화에서도 그 단면을 읽을 수 있었다.

유점사 500여 대중들이 겨울철을 나기 위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공양주로 나서야 하는 상황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금강산의 겨울은 상상할 수 없는 매서운 추위여서 공양주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러자 금강산에 입산한지 얼마 안된 고암 스님이 나섰다.

고행 길을 스스로 택한 것이다. 밤 9시에 무조건 자리에 눕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눈을 뜨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통에 신발을 가지런히 정돈해서 벗어 놓았다. 그런 어느 날 대중공사를 끝내고 나오는 스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가 이 추운 날에 신발을 깨끗이 닦아 놓은 것이었다. 범인(?)을 색출하고자 다음날 새벽 창호지 틈 사이로 몇몇 스님들이 지켜보기로 했다. 현장서 스님들이 “그럼 그렇지. 고암 스님이 바로 범인이구나. 공양주살이도 힘들어서 죽을 판인데 이런 일까지 하면 어찌하려 해!” 그러자 고암 스님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스님들 허락을 받고서 해야 하는데 그만 허락 없이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오히려 용서를 빌었다.

고암 스님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국땅서 내가 힘들게 포교할때 어느 날엔가 고암 스님이 불쑥 보현사를 방문했다.

“아니? 어떻게 이 절까지 오셨습니까?” “왜 그래요? 내가 못 올 때라도 온 거에요?”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살피러 오신 것이다. 이렇게 고암 스님은 가장 가난한 절들을 찾아다니면서 잘 보살펴준 후에는 떠났다. 가난한 절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몸소 보살폈다. 이후에도 조계종 스님들의 탄원서를 받게 해주셔서 양동수 사형수와 불쌍한 할머니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었다. 나는 정말 고암 스님께 평생에 갚지 못할 큰 빚을 지었다.

고암 스님은 종정을 세 번이나 지내면서도 당신께서 후에 편히 지낼 사찰 하나도 점지해 두지 않았다. 종정이란 높은 자리서도 솔직하게 내면을 드러낸 고암 스님은 한마디로 천진스런 부처였다. 이런 높은 경지에 오르신 고암 스님은 당시 상좌들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었다. 하와이에 있는 상좌를 돕기 위해 구순을 바라보는 고암 스님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건축물이 들어서기 전이라 컨테이너 박스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면서까지 하와이 ‘대원사’를 건축하는 데 적극 도왔다. 그러던중 상좌와 함께 길을 나섰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열반에 드셨다. 천진스런 자비심을 세상에다 몸소 보여주신 고암 스님은 내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생불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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