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지난여름 일이 문득 떠오른다. 평소 잘 알던 사람이 남해에 내려왔다.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고, 군에서 초청한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남해는 지금 한창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 중에 있는데, 그 일에 대한 조언을 하고자 먼 길을 달려왔던 것이다.

그 사람은 여성이다. 나와 같은 대학을 다녔다. 1학년 때부터 알게 되었는데, 다른 대학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이 축제 때 파트너가 필요하다며 여학생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 나도 이성에 대해서는 숙맥인데, 소개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남해서 만난 첫사랑 그녀
예전과 다른 사업가 모습
실망과 함께 수행심 생겨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고민 끝에 같이 강의를 듣던 그녀가 떠올랐고, 어렵사리 말을 걸어 의사를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 남영동에 있는 다방(동창들끼리 가끔 만나던 곳이었다)에서 이른바 ‘소개팅’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 그랬는지 친구 놈을 만나지 못했다. 두어 시간을 기다리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왔다. 핸드폰은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연락할 길이 막연했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그녀가 마음에 드는 게 아닌가! 흑심을 품은 나는 우정이고 뭐고 친구가 나오지 않은 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도 나와 있었는데 중간에 있던 큰 기둥이 서로를 가려 엇갈렸던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란 참으로 얄궂다.)

그런데 여전히 숙맥이었던 나는 어떻게 내 마음을 털어놓아야 할지 막막했다. 고민하다 강의가 끝난 뒤 불러내 교정에서 더듬더듬 내 뜻을 밝혔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란(짐작하시겠지만) 싫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한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로 거절했다.

하긴 다짜고짜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사귑시다 칼을 뽑았는데 선뜻 받아들이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게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 셈이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최선책이었다.

이후 나는 이른바 ‘사랑앓이’를 했고, 그녀는 나만 보면 벌레라도 본 듯 피해 다녔다. 나는 더욱 안달이 났고, 고등학교까지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때부터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게 되었다.

거두절미하고 한 3년 동안 내 방황은 계속 되었고, 숨바꼭질은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다른 길을 갔는데, 가끔 모임에서 만나도 서먹서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친구들은 다 그녀와 말을 트고 지냈지만, 나만은 지금도 서로 존대를 하고 있다.

남해에 내려오고 7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지역 신문에서 그녀가 남해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반갑기도 하고, 7년 동안 어떻게 변했나 궁금하기도 해서 강연장으로 나가봤다. 좋으나 싫으나 그녀는 내 첫사랑이라고 할 터이니, 쑥스러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그새 물론 그녀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마흔도 못 살 거라더니 지금도 쌩쌩하게 활동하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지만, 다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그런데 7년 만에 재회한 그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사업가로 성공한 그녀는, 내가 느끼기에 세상 사는 이치에 적응해버린 듯했다. 청춘 시절 보았던 풋풋하고 순수한 모습은 가려지고 대신 능력 있고 실용적인 사람이 자리 잡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강연장을 괜히 찾았다고 크게 후회했다. 만나지 않고 그냥 추억 속의 그녀로 남겨 두었다면 좋았을 걸 불편한 상처만 남겼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한편으로 화도 좀 났다. 뭐랄까, 아름답게 간직했던 젊은 시절 고운 추억에 흠집이 난 기분이었다.

누군가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는 놀라운 지혜의 말을 하기도 했지만, ‘첫’사랑이 여럿일 수는 없는 노릇일 게다. 세월이 지나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낡아지기 마련이다. 아주 오래 전 추억의 기억만 안고 그때 그 사람을 만나면,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질 뿐인가 보다.

나는 “남녀 간의 사랑이란 영원할 수 있는가?”라는 아주 진부한 주제로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다. 주변에 물어보니 이 물음에 대개 부정적이었다. 어떻게 영원하지 않는 줄 아는가? 당연히 경험이 내놓은 대답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호기심이란 묘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문명을 발전시켰겠지만, 때로 ‘모르는 게 약’이라는 구태의연한 속담이 만고의 진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내 ‘첫’사랑의 기억은 씁쓸한 한숨으로 남게 되었다. 누가 내 아름다운 추억을 앗아가 버렸을까?

사랑의 괴로움 그대는 아는가?

사랑과 미움에 대한 조언으로 〈법구경〉에 나오는 말씀만큼 잘 알려졌고 정곡을 찌른 경구는 없을 듯하다. 부처님은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또 아내를 맞아 아이까지 낳았으니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잘 아셨을 것이다. 게다가 부처님은 혈육을 넘어 중생 모두를 사랑하신 분이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지도 말고,

미워하는 사람을 두지도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게 되어 괴롭다.

부처님은 소중한 것은 쉽게 상처받고 손상된다는 지혜를 터득하셨다. 그래서 무욕과 무상의 가르침을 남기셨다.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은 그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오욕칠정(五欲七情) 가운데 사람의 심성을 본연 그대로 유지하는 데 장애가 아닌 것이 없다. 뭔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독약이 묻은 비수보다 더 아프고 치명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시들게 만든다.

〈법화경〉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고 한다.

쇠의 녹은 쇠에서 나온 것이지만. 시나브로 쇠를 삼켜버린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 올바르지 못한 마음이 그 사람 전체를 삼켜버리고 만다.

여기서 쇠는 사람일 것이고, 녹은 감정이 아닐까 싶다. 감정이 없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냐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감정이란 물건이 사람을 배신하는 경우가 워낙 많은 세상살이인지라, 스스로 감정을 떨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수행은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봤던 영화가 생각난다. ‘백작부인의 첫사랑’인가 하는 제목이었던 것 같다. 흑백영화로 기억되니 정말 옛날 영화일 것이다.

백작부인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백작이 죽고 과부가 되었다. 이미 나이는 초로(初老)를 지나 황혼으로 접어드는 때였다. 새로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늦었고, 그런 열정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때 문득 젊은 시절, 자신이 꽃보다 더 어여뻤을 때 자신에게 구애를 했던 많은 남자들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재물과 명예를 좇아 백작을 선택했다.

홀로 된 지금 그녀는 자신을 향한 사랑에 몸 달았던 그 남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직도 자신을 사랑해서 홀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뜨거운 열정으로 내게 다시 구애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졌다. 영화를 보던 나는 ‘정신 나갔군.’ 했지만, 돈만은 누구보다 많은 그녀는 사람을 시켜 그들의 현주소를 알아냈다. 그래서 한 사람씩, 지금도 나를 사랑해줄 남자를 찾아 나섰다.

물론 돌아온 것은 실망과 연민뿐이었다. 어떤 남자는 파산해서 자살하기 직전이었고, 누구는 그녀의 돈을 보고 음흉한 접근을 하기도 했다. 젊고 아름다웠을 때의 그녀를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아예 몰라보거나 유혹의 대상으로만 다가왔다.

영화의 결말이 어땠는 지는 기억에 없다. 피라미드조차도 비웃는다는 시간의 공격에 온전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깨닫고 쓸쓸히 백작과의 추억을 간직하고 살았을까?

백작부인은 과욕을 부려, 그냥 두었으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잘 보듬었을 기억을 누더기로 만들어버렸다. 자신은 변했는데 남들은 그대로일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이제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추억이란 영영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스스로 불행을 자초했다. 욕망이란 감정의 녹을 잘 닦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키워 제 몸까지 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우네

중용(中庸)과 충서(忠恕)를 평생 가르친 공자긴 하지만, 내가 읽은 〈논어〉를 보면 그 역시 감정에 많이 흔들렸던 것 같다. 열강 중에 조는 제자를 보자 참지 못하고 지금으로 따지면 백목을 집어던지면서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수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는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며 통곡했다. 춘추시대 송나라 위령공(衛靈公)의 부인 남자(南子)가 유혹하자 자칫 넘어갈 뻔도 했다. 제자 자로가 말리지 않았다면 큰 사고(?)를 치셨을 것이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힘이 장사였지만, 첫 부인 시씨(施氏)가 딸 아홉에 불구인 아들을 낳자 새파랗게 젊은 처녀 안징재(顔徵在)를 맞아 공자를 얻었다. 조강지처를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공자도 첫 부인을 버렸다. 우리가 잘 아는 아들 공리는 첫 부인의 소생이었다.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오자 공자는 초상에 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를 가슴 아파해 공리가 슬퍼하자 공자는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 쫓겨난 여자를 위해 운다면서 호통을 쳤다고 한다.

나는 공자가 이처럼 비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가 감정에 잘 흔들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간사와 인성(人性)의 명암을 간파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 점이 내게는 매력으로 다가왔었다.

우리는 늘 현재가 불안해 과거를 돌이켜본다. 과거를 찾는 마음은 일종의 미련일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집착하는 태도가 바람직할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첫’사랑의 싱그러운 추억을 구겨버린 나는 과거란 소중하게 간직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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