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동서 문명 교차로 파키스탄을 가다
① 간다라문명 발상지, 페샤와르

세계미술사에 획 그은 ‘간다라’
간다라 수도였던 페샤와르엔
헬레니즘 반영된 불교유적 多
규모 가늠키 어려운 사원부터
부처님 일대기 담긴 조각상도

선배 수행자들의 노고 마주한
조계종 스님들 ‘환희’와 ‘감동’
“우리도 이곳에 살아보고 싶다”
각종 유물, 대승불교 형태 예배
간다라에 있었다는 증거로 추정

대한불교조계종은 파키스탄 정부 초청으로 1117일부터 23일까지 파키스탄 내 불교 유적을 순례했다. 싯다르타 고행상을 간직한 라호르박물관을 시작으로 히말라야와 힌두쿠시·카라코람산맥이 만나는 훈자, 아소카왕이 청년기를 보낸 탁실라, 간다라의 옛 수도 페샤와르까지 파키스탄 북부를 중심으로 일정을 소화했다.

과거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가 된 파키스탄. 알렉산더와 아소카왕, 마라난타 스님의 발자취가 깃든 파키스탄 구법 순례기를 간다라문명과 불교가 퍼져나간 페샤와르-탁실라-길기트·훈자 순으로 3회에 걸쳐 지역별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궁극의 예술로 태어난 부처님 ‘傳法 향기’

근대 영국 식민지를 거친 파키스탄은 1947814일 독립을 선포한 신생국가다. 펀자브(Punjap),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imir), 신드(Sind), 발루치스탄(Baluchistan)의 글자를 딴 파키스탄(Pakistan)순수한 땅을 의미한다. 이슬람국가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한 이름이자 2억 명의 인구 중 97%가 무슬림인 나라. 얼핏 불교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은 이곳에는 고대 불교 역사가 인더스강을 따라 면면히 흐른다. 무엇보다 외국인과 불교도의 손길이 좀처럼 닿기 어려운 국가라는 점은 파키스탄에 대한 신비감을 더한다.

그럼에도 파키스탄 출장이 확정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혹시 모를 위험이었다. 이슬람국가에 대한 정보가 워낙 부족하고, 탈레반과 IS, 알카에다 등 이슬람 무장단체의 테러 소식을 뉴스에서 많이 접해 무슬림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 없었다. 우리나라 외교부도 파키스탄을 여행자제’ ‘철수권고등의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파키스탄에 대한 국내 인식이 이러하니 우리나라 직항 비행기는 없다. 인천공항에서 방콕으로, 그리고 라호르로 총 1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파키스탄에 도착했다.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발을 디딘 파키스탄의 첫인상은 안타깝게도 대기오염이었다. 공항 밖을 나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자동차 매연이 후각을 괴롭힌다. 과장을 조금 보태 공장 굴뚝 위에 서 있는 느낌이다.

현지시각으로 밤 11시가 넘어 도착한 파키스탄 라호르. 피곤한 심신과 숨쉬기 어려운 부정적인 인상을 안고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숙소로 향했다. 모든 캐리어는 호텔에 들어가기 전 검색대를 거쳐야 한다는 안내에 한숨이 쏟아졌다.

현존하는 간다라시대 최대 사원인 ‘탁트이바히’를 참배하는 조계종 대표단. 큰 돌과 작은 돌을 빈틈없이 쌓아올려 만든 사원은 순례자들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사원이 자리한 산자락 아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간다라 최대 사원 탁트이바히
순례의 시작점은 라호르였지만 간다라문명의 발상지인 페샤와르는 일정이 다 끝나갈 때쯤 방문할 수 있었다. 위아래로 길쭉한 땅을 갖고 있는 파키스탄이기에 순례 동선을 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걸 새삼 느꼈다. 순례 말미에 방문한 페샤와르를 파키스탄 순례 연재의 첫 순서로 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이 간다라문명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불교도로서 간다라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성인이 된 알렉산더가 BC 335년 동방원정에 나서면서 페르시아를 정벌하고,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더스강까지 진출하면서 중앙아시아 곳곳에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문화를 잇는 헬레니즘(Hellenism)’이 탄생한다. 특히 간다라는 알렉산더에 의해 점령당한 뒤 그리스계의 지배를 받으며 헬레니즘이 깊게 배어들었다. 이후 BC 80년 무렵 흉노에 쫓겨 피난 온 대월씨국이 자리를 잡고, 쿠샨왕조를 형성하면서 세계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간다라미술이 발전했다. 국내 교과서에 실리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고행상이 대표적이다.

페샤와르는 라호르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약 4~5시간을 달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닿은 뒤 서쪽으로 2시간가량을 더 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 멀다는 서울-부산보다도 더 멀기 때문에 한국인에겐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물론 중국여행에 비할 바는 아니다. 페샤와르는 페르시아어로 고지대의 요새란 뜻이지만 이곳은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푸르샤푸라(Purushapura)’라는 도시였다. ‘인간의 도시란 의미인데 페샤와르가 푸르샤푸라에서 이름을 유래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페샤와르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었지만 큰 불편은 없었다. 국가 경제력에 비해 도로가 비교적 잘 정비된 파키스탄이었다. 무엇보다 대우건설이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이슬라마바드에서 라호르를 잇는 왕복 6차선 고속도로를 건설한 게 도움이 됐다. 파키스탄 GDP의 절반이 해외원조라는 말을 실감했다.

페샤와르 인구는 약 200만 명인데, 1000만 명이 넘는 라호르나 350만 명이 사는 이슬라마바드에 비하면 인구대비 지역 개발이 꽤나 더딘 것처럼 느껴진다.

도심 곳곳이 1970년대 우리나라 지방도시를 연상케 한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다른 대도시에 비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여성이 드문 것이다. 라호르·이슬라마바드에서 수많은 여성이 편하게 거리를 활보했다면, 이곳은 도심에서도 여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파키스탄은 시골일수록 보수적인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페샤와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어지는 키베르 패스의 관문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범죄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았으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탁트이바히 사원 경내. 불상을 모셨던 감실과 크고 작은 탑들의 기단부가 남아 있다. 사원벽의 붕괴를 예방하기 위한 구조물도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불상들은 현재 페샤와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페샤와르는 간다라왕국의 수도였던 만큼 간다라문명 최대 사원을 간직한 지역이다.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탁트이바히(Takht-i-Bahi)가 있다. 이 사원은 1세기에 건축돼 7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페샤와르를 떠나 탁트이바히에 근접하자 제주도 오름처럼 낮지만 수많은 초록빛 산봉우리가 반겨준다. 라호르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고속도로를 이용하며 강줄기를 낀 너른 평야를 감상하다 만난 산지는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300여 개의 계단을 올라 마주하게 된 탁트이바히. 건축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1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돌 사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원은 탑을 비롯해 벽, 감실 모두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다. 큰 돌과 작은 돌, 두 가지를 얼마나 빈틈없이 쌓느냐가 핵심이다. 간단한 원리지만 직접 두 눈으로 마주한 탁트이바히는 인간의 한계를 되묻게 한다.

사원은 비록 많은 훼손으로 인해 지붕이 없고, 탑들도 기단부밖에 남지 않았지만 능선을 이어가며 대규모로 지어져 순례자에게 더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불상을 모셨던 감실, 매일 같이 기도를 올렸을 대탑, 스님들의 수행공간, 공양간과 화장실까지. 선대 스님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정진했을 이곳에서 몇몇 순례단 스님들은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도 이곳에 살아보고 싶다.” 천년도 더 되는 시간을 훌쩍 넘어 이곳을 찾은 후배 수행자들은 가늠하기도 어려운 선배들의 고행을 가슴으로 느꼈다.

탁트이바히는 현재 복원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복원기술력이 좋지 않아 원형과 복원부분의 차이가 느껴진다.

탁트이바히 경내에는 대탑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탑들의 기단부가 곳곳에 배치돼 있다. 탑 주위에는 감실이 줄을 지어 들어섰으며, 사원 동쪽에는 강당과 수행자를 위한 개인 수행공간이 함께 있다. 한구석에 마련된 화장실은 주변에 석회를 발라 오염을 예방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탁트이바히는 4개의 연대로 나눠 증축을 거듭했다. 첫 시기는 건축 당시인 쿠샨왕조의 첫 통치자 쿠줄라 카드피세스, 즉 카니슈카왕의 증조부 때다. 이후 카니슈카왕의 후원으로 사원이 유지됐으며, 3~4세기에 대탑과 집회장이 들어서는 제2차 건축기를 거친다. 쿠샨왕조 후대인 4~5세기 제3차 건축이 이뤄지고, 6~7세기 대형 복합사원으로 거듭났지만 이때부터는 훈족의 통치를 받았다.

탁트이바히는 지금도 꾸준히 복원이 진행 중이다. 선조들의 옛 기술을 모방해 다시금 돌을 쌓아올리고 있는데, 확실히 기술력은 옛것만 못하다. ‘이렇게 복원해도 괜찮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나마 복원하면서 원형과 복원부위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얀 천을 끼워놓아 다행이다.

사원 곳곳을 한참 둘러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경찰이 파키스탄에 대한 감상을 묻는다. 짧은 영어로 더듬거리며 인상적이라고 답하니 같이 사진 찍길 권한다. 그가 들고 있던 소총이 무서워서 찍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함께 사진을 찍은 경찰만 10명이 넘는다. 물론 일반인도 많다.

이방인을 향한 파키스탄인들의 관심은 어딜 가든 비슷하다. 그리고 재가자보다는 평소 더욱 만나기 어려운 스님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페샤와르박물관에 소장된 대형 간다라불상 앞에서 조계종 스님들이 예불을 올리고 있다. 페샤와르박물관은 1907년 빅토리아기념당을 고쳐 개원했다.

간다라 寶庫 페샤와르박물관
탁트이바히에 이어 순례단이 찾아간 곳은 1907년 개원한 페샤와르박물관이다. 빅토리아여왕 기념당을 박물관으로 고친 이곳은 간다라문명의 예술품을 비롯해 고대 토착부족 유품, 각종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2층으로 지어진 페샤와르박물관은 탁실라박물관과 함께 세계에서 간다라문명의 예술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탁트이바히를 비롯해 사흐리바흐롤, 자말가르히 등 이 지역 간다라 사원에서 출토된 석조물이 대거 소장돼 있다.

수많은 간다라 예술품 중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카니슈카왕이 봉안한 것으로 알려진 사리용기다. 사리용기 뚜껑에는 부조로 불좌상을 표현하고, 범천·제석천을 따로 주조해 붙였다. 용기 옆에는 카니슈카왕으로 전해지는 북방민족 복식의 귀인상과 나형동자가 꽃줄을 멘 형상이 표현돼 있다. 오랫동안 간다라미술을 연구해온 유근자 동국대 불교미술학 초빙교수에 따르면 카로슈티 문자로 카니슈카 초년 유부(有部)의 고승을 모시기 위해 대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는 대승불교 형태의 불상 예배가 당시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페샤와르박물관이 소장한 싯다르타 고행상. 라호르박물관의 고행상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외에도 페샤와르박물관에는 1907년 탁트이바히에서 발견된 싯다르타 고행상이 있다. 안타깝게도 파손된 채 발굴돼 머리·가슴·하반신밖에 남지 않았지만 라호르박물관의 그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온전하게 보존됐다면 라호르의 고행상과 함께 싯다르타의 6년 고행을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간다라 예술품으로 평가될 작품이다.

기자 개인적으로는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 전 선정을 표현한 초선상 마음에 와 닿았다. 싯다르타의 초선은 12세 되던 봄, 부왕 숫도다나와 함께 농경제에 참석해 힘겹게 쟁기를 끄는 농부와 채찍을 맞는 소, 새들에게 잡아먹히는 벌레를 보며 약육강식을 체험한 뒤 잠부나무 밑에서 명상에 잠긴 걸 의미한다. 다양한 장신구를 걸친 채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를 방해하지 않으려 잠부나무 그림자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초선상 대좌에는 채찍을 든 농부와 밭을 가는 소, 불이 피어오르는 향로, 합장한 두 사람이 양각돼 있다. 그 옆에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감탄해 무릎 꿇은 숫도다나왕이 합장하며 경배하고 있다.

페샤와르박물관에 들어선 순례단은 박물관 1층이 전부 간다라불상으로 채워진 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라호르박물관은 싯다르타의 고행상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간다라갤러리 규모가 크진 않다. 반면 페샤와르박물관은 간다라왕국의 수도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크고 작은 간다라석불과 부처님 일대기를 표현한 조각으로 순례단의 눈을 사로잡았다.

싯다르타의 출가 전 초선상. 어린 나이 때부터 인간의 생로병사와 약육강식에 번민한 모습이 잘 표현됐다.

박물관 내부를 장식한 대부분의 불상은 사람보다 조금 작은 크기이고, 구석의 일부 대형 불상은 3m가 넘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였다. 커다란 눈과 오똑한 코, 기다란 귀, 섬세한 육계, 주름진 가사자락은 전형적인 간다라양식을 보여준다. 순례단은 역사적인 불상들 앞에서 조용히 예불을 올리며 간다라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냈다. 다만 불상을 설명함에 있어 미륵불과 관세음보살 등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점은 옥에 티로 남았다. 페샤와르박물관은 이미 일본과 한국학자들이 조사를 마친 곳이었지만 왼손에 정병을 들어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불상에 미륵불이라는 이름을 붙인 연유는 알 수 없었다.

박물관을 둘러보던 중앙종회의장 범해 스님은 평소 우리가 보는 부처님보다 사실화된 모습이다. 종교성이 강화된 우리나라 불상과 많은 차이가 있어 새롭게 느껴진다동서양이 만나 한편으로는 신비감을 더해주는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편 이날 점심식사는 페샤와르가 소속된 카이버팍툰콰(KPK)주 고고학부가 대접했는데, 그 장소가 박물관 내부여서 순례단을 당혹케 했다. 고고학부는 순례단을 위해 유물이 전시된 전시관 한쪽에 간단한 뷔페를 차렸다. 이색적인 경험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유물에 대한 인식이 뒤떨어졌다고 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렇게 몇몇 스님들은 선 채로 접시를 들고 식사를, 일부는 박물관 밖으로 나가 벤치에 앉아 식사를 했다.

카니슈카왕이 봉안한 것으로 알려진 사리용기.
페샤와르박물관 내부. 간다라불상이 박물관을 가득히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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