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불논단] 이게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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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령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29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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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바램 합성한 ‘그롬브레’
‘염색 않고 흰머리 살기’ 유행

염색 필수 시기엔 흰머리 불편
주위서 염색 조언·권유 이어져
‘나’인채로 있을 용기 필요했다

은퇴, 가치있는 삶의 기회이며
흰 머리는 이를 알려주는 신호
건강 위해서 ‘그롬브레’ 권한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기 연예인들이나 유명 정치인들을 영어로 셀러브리티(celebrity)’라고 한다. 간단히 줄여서 셀럽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무엇을 입고 먹느냐는 언제나 화젯거리다. 사람들은 그걸 따라하느라 바쁘다.

염색하지 않은 흰 머리카락의 강경화 외교부 장관 역시 이 시대 최고의 셀럽이 아닐까 한다. 머리가 하얀 채로 다니는 중년들을 아주 많이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더 이상은 염색하지 않고 흰머리 그대로 살기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회색인 그레이(grey)와 빛바램의 뜻을 가진 옴브레(ombre)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 그롬브레(grombre)’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머리카락이 허연 여성들 사진이 등장한다. 당장이라도 염색할 때 됐네라는 잔소리가 튀어나올 만한 사진들이지만, 요즘은 이게 유행이어서 일부러 빛이 바랜 듯한 톤으로 염색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이 유행은 반가워서 나도 따르고 있다. 나도 동년배들보다 일찍 머리가 세기 시작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끝없이 염색하라는 조언과 권유를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염색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아무리 천연염색제라고 해도 그게 내 머리에 과연 좋을지 의심스러웠고, 거울 앞에 서면 흰 머리카락이 올라왔는지를 습관적으로 살피는 것도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세는 대로 그냥 지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사람들 앞에 나설 때다. “? 이제 보니 흰머리였네라는 소릴 들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겁이 나기까지 했다. 엄살이 아니다. 그건 용기였다. 실제로 머리 염색을 멈추고 흰 머리카락 그대로 다니다보면 용기 있네요라는 말을 아주 많이 듣기 때문이다. “그렇지요라고 웃으며 대답하지만 나는 속으로 말한다. “이게 나예요. 이게 나인 걸요라고. 내가 나인 채로 당신을 만나는데 용기가 필요할 것까지 뭐가 있는가 싶어서 씁쓸하기도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는 게 인생일진대 머리는 염색해서 젊어 보이고는 싶고, 지하철에 자리 나면 먼저 앉고는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흰머리는 청춘의 대열에서 완벽하게 떨어져나가는 걸 뜻하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내 인생과 세월이 내게 준 훈장이 아니겠는지.

중아함경대천나림경에는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과 부를 누린 왕이 신하에게 이렇게 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 머리를 손질하다가 단 한 올이라도 흰 머리카락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라.”

어느 날 아침 신하는 백발 한 올을 발견하자 황금 족집게로 뽑아서 왕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 백발을 보고 왕이 노래했다. “내 머리에 백발이 났네/수명은 갈수록 줄어드는구나/천사는 이미 이르렀거니/나는 이제 도를 배울 때로다.”

천사는 인간에게 찾아오는 생로병사 이치를 의인화한 것이다. 왕은 이렇게 노래한 뒤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왕좌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었던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그 수행을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하고 그 길을 나선 것이다.

머리카락이 칠흑같이 검고 왕성한 힘을 자랑하던 시절은 세속에서 지내지만 그 시간은 얼마나 힘이 들던가. 경쟁해야 하고 이겨야 하고 쌓아야 하고 모아야 하고 올라가야 하고 빼앗아야 하고 빼앗겨야 하고. 그 끝없는 투쟁의 쳇바퀴에서 언제나 하차하게 될까? 왕은 그 날을 흰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순간으로 정했다. 은퇴는 패배가 아니라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흰 머리카락은 그 시기를 알려주는 천사가 아닐까.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롬브레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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