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 불가촉천민 개종시킨 사사이 슈레이 스님

색욕 강해 세 차례 자살 시도
인도 여행 중 ‘남인도 가라’는
용수 보살 계시 받고 남인도行
그곳서 불가촉천민 전도 결심
30만명 불법 전도하며 큰 반향
“나는 천민과 인도불교의 노예”

불가촉 천민들의 집단 개종식에서 전계사를 맡고 있는 사사이 슈레이 스님의 모습. 사진출처=분슌 온라인

힌두교가 최대의 종교인 인도. 반세기 전엔 불과 수 십만 명이던 불교도가 이제는 약 15천만 명으로 폭발적인 증가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불교 부흥의 중심에 한 일본인 스님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1114일 일본의 분슌 온라인은 기이한 삶을 살며 인도불교 부흥에 힘써온 사사이 슈레이(84) 스님을 특별 보도했다.

슈레이 스님은 1935년 일본의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를 엄청난 호색한으로 청년기를 회상한 스님은 이상하게 이성에 대한 흥미가 강했다. 결국 이러한 색욕에 절망하여 3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고 고백했다. 스님은 자살시도로 쓰러져 있던 것을 한 스님이 구해주신 것을 계기로 출가자가 됐다며 출가 사정을 말했다.

이후 스님은 태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태국에서조차 치정관계에 놓였다. 출자가로서 수치심을 느껴 도망치듯 인도로 떠나 왔다. 이것이 32세 때의 일이라며 인도로 온 계기를 설명했다.

인도로 건너온 스님은 옛 왕사성 유적이 있는 라즈기르에서 수행하며 일본으로 귀국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신비한 꿈이 스님의 인생을 바꿨다. 스님은 어느 날 밤 꿈에 용수 보살이 나타나 그대는 속히 남인도의 나그푸르로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기이하다고 생각해 그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전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나그푸르는 암베드카르 박사가 인도불교 부흥을 천명하고 최초의 대규모 집단 개종식을 봉행했던 곳. 슈레이 스님은 이곳에서 당시 인도불교의 상황을 알았다고 말했다. 스님은 암베드카르 박사가 집단 개종 한지 얼마 안 되 급사한 후 인도불교 부흥은 정체기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승려로서 인도불교 부흥을 반드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인도 불교부흥운동에 뛰어든 계기를 설명했다.

스님의 포교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공원에서 염불하는 스님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스님의 일심불란한 모습에 차츰 사람들이 찾아왔다. 대부분 불가촉 천민들이었다.

스님은 카스트 제도라는 굴레로 절망에 빠진 불가촉천민들에게 평등을 가르치는 불교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되돌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스님은 개종만으론 생활환경이 변하지 않는다. 보시금을 모아 학교나 병원을 세우고, 상위 카스트로부터 차별 받은 이들을 모아 조직적인 항의를 이어나갔다며 불가촉 천민들과 개종한 불교도들을 위해 진행해온 활동들을 말했다.

또 힌두교도가 중심으로 관리하고 있는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을 불교도의 품으로 돌리기 위한 투쟁도 16년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스님의 항소로 인도 최고재판소에서 재판도 시작됐다.

스님의 노력은 인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스님은 지금까지 약 30만 명 이상의 불가촉 천민들을 불교로 개종시켰다. 스님은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인도의 최남단 타밀나두까지, 개종을 원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계를 주기 위해 달려갔다. 이러한 스님의 활동은 항상 순탄치는 않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힌두교 과격파 신도들에 의한 세 차례의 독살 시도도 있었다. 비자가 다 된지도 모르고 활동하던 중 불법체류로 체포 된 적도 있었다.

스님은 불가촉 천민들은 노예로부터 불교도가 됐다. 나는 그들의 노예, 인도불교의 노예다라며 죽는 순간까지 싸우는 불교로서 불가촉 천민과 소수자인 불교도의 권리향상 등 인도불교를 위해 일하다 죽겠노라고 결의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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