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처님 법은 말 없는 말로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혼자 삽니까?

오늘도 영원한 오늘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항상 한자리를 하고 돌아가면서도, 나날이 밤이 지나고 낮이 오면 또 오늘이라고 하는 가운데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항상 얘기하듯이, 개개인이 이 공부를 안 한다면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에는 후회할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정신을 잡아먹히고 잡아먹고, 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이렇게 먹히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앞으로 더 정신계의 발전이 된다고 한다면 여러분께 막대한 피해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짐승들은 보이는 데서 서로 잡아먹지만 사람들은 보이는 데서 육체를 잡아먹히는 게 아니라 정신을 잡아먹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육체도 먹히게 되죠.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곤충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치열하게 살고 있죠. 어떤 때는 사실 쓴웃음을 웃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그렇게 비참한 때도 있죠. ‘모른다면 차라리 괜찮을 것을….’ 하는 때도 있죠.

내가 산다, 내가 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항상 남을 저주하고 상대방을 원망하게 됩니다.
내 몸뚱이 하나도 더불어 같이 사는 인생인데
하물며 이 우주천하가 다 더불어 같이 살지

그런데 우리가 먹고 입는 거는 스스로 따라오게 돼 있으니 넓게 마음을 쓰고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얘기죠. 이 부처님 도리는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광대하고 너무나 묘해서 누가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단 하나 ‘자기가 어디로부터 와서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잘 지켜볼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이 되란 얘기죠.

찰나찰나 나투면서 돌아가는 이 한 생이 길다고 생각하면 길지만 짧다고 생각하면 아주 짧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되는가를 깊이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 속에는 모두 자기가 산 대로, 산 차원대로 모습을 쓰고 다시 나올 것인데도 어떠한 모습을 쓰고 나올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가련하게 지금 발버둥이 치고 가는 길이죠. 하여튼 자기가 어떻게 살고 얼마나 진실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모가 나는 것도 둥글게 행할 수 있고 둥글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요다음 생에 나올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다음 생이래야 얼마 안 가면 다음 생입니다. 몸을 벗었다 하면 영혼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니까요. 영혼이 빠져나가면 영혼이 있기 이전이 있는 까닭에, 우리가 깊이 생각 안 하면 안 되리만큼 돼 있죠. 그래서 ‘순간 몸을 벗으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될까?’ 하고 한번들 생각해 보셨습니까? 물론 “지금 금방 죽으면 그만이지 뭘 그래?” 한다면 할 말이 없죠. 하지만 영원토록 길은 돼 있고, 영원토록 벗어나지 못하는 이 길 속에서 헤매고 돌게 되죠.

우리는 물속에서 어떻게 어떻게 도를 닦아서 물 바깥으로 벗어나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고비가 또 있죠. 물주머니를 벗어나야 되고, 공기라는 이름하의 주머니 속에서 또 벗어나야 하고, 그 속에서 벗어나면 전체 속에서 또 벗어나야 하죠. 그렇다고 해서 이게 길다고, 아주 하염없이 기니까 우린 할 수 없다고 이렇게 생각하진 마세요. 한 찰나니까요. 한 찰나라는 건, 우리가 평생을 사는 거보다도 한 찰나의 한 생각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만 년 전, 몇천만 년 전의 한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현재 한 생각과 맞먹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 생각이 중요하니까요.

우리의 몸체 하나를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몸체 하나가 우주라면, 우주 속에 별성들이 헤아릴 수 없이 살고 작용을 하고 돌아갑니다. 큰 거나 작은 거나 똑같으니까 내 한 몸을 가지고 한번 체험해 보시고 경험해 보십시오. 천차만별의 모습들, 생명들, 의식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둘이 아니다’ 하는 뜻에서 ‘공(空)이 색(色)이다, 색이 공이다’ 하는 거죠.

우리가 몸이 있어야 속에 생명들이 살고, 생명들이 살고 있어야 몸이 있듯이, 둘이 아닙니다. 생명들이 없다 해도 내 몸이 없을 것이고, 내 몸이 없다 하더라도 생명이 없을 것이고 그러니 그것이 어디 둘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생명체들은 어디서 와서 그렇게 더불어 같이 살게 됐는가? 내가 인연들을 지어서 그렇게 형성시킨 겁니다. 내가 인연들을 짓고 내가 형성시키고 내가 지금 움죽거리고 가게끔 해 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계를 하나 연구해서 만들었다면 그 기계를 누가 만지며 누가 작용하게 하는 겁니까? 기계 만든 사람들이 다 작용을 해서 움죽거리게 하죠. 그렇듯이 우리는 우리가 형성시킨 이 몸뚱이를 우리 자체가 끌고 가는 겁니다. 누가 끌어가고 끌어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들이 자기를 형성시켜 놓고 바로 자기가 그 형성시킨 모습을 끌고 다니는 겁니다. 작용시키는 거죠. 그것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대로 거기에다 부합을 시키는 거죠. 이건 자연의 진리입니다.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고 또는 우리 사는 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적으로 거기에 딱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게끔 해 놓은 것입니다.

오신통 자체가 컴퓨터라고 내가 얘기했죠. 사람이 만든 컴퓨터가 아니라, 이건 자동적인 컴퓨터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살았느냐, 말과 행동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거기 다 수집이 돼서 입력이 돼 있는 것입니다. 뭐, 요만큼도 여축이 없이 질서 정연하게 입력이 돼 있는 겁니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 틈에 선지(善知)도 있지만 악행을 범하는 그러한 업식도 있습니다. 우리 지금 한 국가에서 별 사람들이 다 살듯이 이 안에도 별의별 마음, 의식들을 가진 생명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자기가 망가뜨리는 것도 있고, 자기 집을 빈집을 만들어 가지고 갖은 영계를 다 불러들일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그렇게 끌어들여서 미치게 만들고, 요즘 가지각색의 병들도 그런 걸로 인해서 다 들어오죠. 그거를 이름해서 영계성이니 유전성이니 인과성이니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차원대로 반드시 이 세상을 또 살아야 하니까, 이거는 곰곰이 생각 안 해 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눈물 나도록 답답한 생각을 하게 되는 문제가 많습니다. 나는 이날까지 밤이나 낮이나 한 번도 내 개인을 생각한 예가 없습니다. 내가 개인으로서 어디 구경을 나간다든가, 내가 딴 사람들처럼 어디 좀 바람을 쐬러 다닌다거나 이런 점도 없습니다. 단 하나, 어떡하면 쉽게 여러분을 이끌어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거죠. 그런데 요즘 답답한 일이 많이 생기는 게 뭐냐 하면, 여러분은 그 업식 속에서 마음을 통해서 생각이 나는 거를, 자꾸 꼬리가 꼬리를 물게 오히려 꺼내 가지고 생각을 해요. 안 나는 생각도 일부러 말입니다. 일부러 생각을 또 하고 또 하고 해서 나중에 끄트머리에는 커다랗게 만들어 가지고는 그것을 답답하게 생각을 하고 그러거든요.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십시오. 하나도 가지고 다니는 게 없죠. 보는 것도 가지고 다니는 게 없고, 듣는 것도 가지고 다니는 게 없고, 만나는 것도 가지고 다니는 게 없고, 먹는 것도 가지고 다니는 게 없고, 다니는 것도 가지고 다니는 게 없죠. 다니면서 그냥 놓고 다니죠? 다니는 것을 끌어안고 다닙니까? 다니는 대로 뒷발자취를 떼어 놓고, 보고 만나는 것도 끌어안고 다니는 게 하나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생각을 해 가지고, 오히려 생각 생각을 해 가지고 뭉쳐 놓고선 이걸 답답하다고 그런단 말입니다. 생각나면 나는 대로 놓으라고 했는데, 나는 대로 그냥 용광로에다 넣으면 자동적으로 재생이 돼서 나간다고 그렇게 해도 놓질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살아가면서 놓고 가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놓고 가니까 자기는 더불어 사는 인생이지 나라는 게 없다는 얘기죠. 자기 혼자가 없다는 얘기예요. 자기가 생각해 보세요. 바깥으로 사는 거나 안으로 사는 거나, 안에서 일어나는 거나 그 모든 생명들이 누굽니까, 그게? 자기 몸뚱이 안의 자기 생명들이고 더불어 같이 살고 있고, 더불어 먹고 있어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는데 혼자 만나는 겁니까, 어디? 더불어 같이 한마음으로서 그냥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만나는 거죠. 그러니 혼자 만났다고는 할 수 없죠. 혼자 먹었다고 할 수도 없고, 혼자 산다고 할 수도 없고, 혼자 벌었다고 할 수도 없고 혼자 들었다고 할 수도 없죠. 혼자 똥 눴다고 할 수도 없고, 혼자 잔다고 할 수도 없고, 매사 게 그렇게 더불어 같이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자기가 했다는 생각, 자기가 산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산다고 하고,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항상 남을 저주하고 상대방을 원망하고 그렇게 되거든요. 내 몸뚱이 하나도 더불어 같이 사는 인생인데, 하물며 이 우주 천하가 다 더불어 같이 살지 어떻게 혼자 삽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놓으라고 놓으라고 하니까, 놓기는커녕 놓는 것까지 들고 있어요. 주인공을 찾으라니까 “주인공! 주인공!” 입으로만 부르는데, 진정코 말없이 통신이 되게 할 수는 없는지, 그것이 참 의문이고요. 그리고 어느 분은 “‘주인공! 주인공!’ 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됩니다.” 하는데 하, 참! 내가 항상 얘기하죠. “이름을 찾지 말고 형상을 찾지 마라. 이름도 형상도 네 이름 네 형상이다.”라구요.

‘일체제불의 마음’ 노래하죠? 그거를 잘 생각해서 새겨 보세요. 저 형상은 바로 자기 형상이요, 저 마음은 자기 마음이요, 생명도 자기 생명이요,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이죠. 그래서 법당에 들어오면 같이 하나로 몰아서 놓고 내가 예배 올리고, 나갈 때는 같이 몰아서 안고 예배 올리고 나간단 말입니다. 둘이 아닌 까닭이죠. 이리로 가도 둘이 아니요, 저리로 가도 둘이 아니에요.

그러니 잘 생각하셔서 우리가 기필코…. 요즘 이름도 알 수 없으리만큼 병 증세가 많이 나오는데, 병 증세뿐만 아니죠. 가혹한 악행이나 풍기가 문란하고 옹졸한 뭐, 이런 모든 일들, 이런 것뿐만 아니라 전체가 지금…, 그렇게 안 해도 늠름하게 살 거를, 그렇게 할 줄 모르고 정신계는 무시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죠. 한생각에 만 리를 뛸 수 있는데 이 몸으로 한 발짝을 떼어 놓는 게 그게 뛰는 겁니까? 만 발자국을 뛰는 거보다 한생각 하는 게 더 빠르다는 얘기예요. 무(無)의 세계, 즉 정신세계를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니까 그렇지, 느껴 보세요!

이렇게 가까워요. 스위치를 누르기 이전이 불이 들어오기 이전이고, 스위치를 눌러 가지고 볼 때는 불이 들어온 현실세계예요. 그렇게 빠른 세상을 돌아가면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세계를 그렇게 무시하고 배척한다면 앞으로 우리 이 모습들이 어떻게 살아나갈 겁니까? 악행이나 다른 모든 것들의 원인이 자기 모습을 자기가 못 보고, 자기 분수를 자기가 지키지 못하고,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르기 때문에 모두 생기는 결과라고 봅니다. 내가 한마디만 더 하죠. 그리고 질문 받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나이가 적을 때 얘기죠. 일제 시대 때에 일본 사람들 사는 거를, 그때도 그렇게 지켜보려고 지켜본 게 아니에요. 우리가 너무 고생을 하고 못살고 그러니까, 그 사람네들은 어떻게 사는가 그거를 보게 됐어요. 우리나라를 침입한 것은 잘못됐다 하지만 뭐를 하나 갖다 줬다면, 하다못해 성냥을 하나 갖다 줘도 그냥 빈 접시를 돌려주는 법이 없어요. 그걸 본 거예요. 빈 접시 주는 법이 없고, 자기 분수를 자기가 반드시 지켜서, 위로 충성할 줄도 알고 밑으로 다스릴 줄도 안다 이겁니다. 아, 그 정신력이라는 것은 투철해요, 아주! 남한테 미룰 생각을 안 하고요. 그리고 분수를 지킬 줄 아니까, 위에 있는 사람을 어떡하면 끌어내리고 내가 올라갈까 하는 생각이 없이, 자기가 맡은 바 소임을 아주 충실히 한단 말입니다. ‘자기는 그만큼밖에 못 되니까 여기 이 자리의 소임을 맡은 거다. 또 나보다 훌륭하니까 윗자리를 맡은 거다.’ 그렇게들 하는 거를 볼 때…. 또 요만한 애들도 장난감을 하나 줬다 하면 그 이튿날은 반드시 다른 장난감을 갖다 줘요.

이런 걸 보면서 ‘야 참, 무섭구나! 아주 철저하게 무섭게 다루어졌구나! 야, 이것이 어디에서 온 건가?’ 하고 생각을 하고 그때는 몰랐는데, 그 후에 ‘아하, 이 법칙이 다 부처님한테서 간 거로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됐죠. 하여튼 부처님의 법을 아니 갖다 쓴 게 없어요. 행전을 각반으로 썼고, 우리 그때의 도포를 하오리로 변경해서 썼고, 우리 오조 가사를 사무라이 총받이로 만들었구요, 우리네 발우공양을 가져다가 자기들 공깃밥으로 변경했고요. 그뿐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그렇게 충실히 받아들이게 된 것은 사명 대사나 서산 대사의 그 묘한 광대무변한 법을 보고서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아주 그때서부터 다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인들은 그렇게 정신력이 투철한데 우리는 어떻게 됐습니까? 500년 역사가 어떻게 됐습니까? 남의 탓을 하기 이전에 내 집을 제대로 간수해야죠. 지금 무슨 병, 무슨 병이 들었느니, 나는 누구한테 당했느니 이런 소리 하기 이전에, 내 집부터 잘 간수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 집부터 내가 자유스럽게 다뤄 놔야 그것을 남한테 뺏기지 않고, 내 정신을 뺏기지 않게 돼서 내 몸이 나빠지지 못하게 하지 않느냐, 내 가정을 지키지 않느냐, 내 국가를 지키지 않느냐, 내 국가 안의 국민을 지키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빈껍데기가 돼 가지고도 빈껍데기를 또 잡느라고 애쓰는 거죠.

이거 우리가 하루바삐 마음과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고요. 어떤 때 보면 어느 신도는 말없이 왔다가 말없이 그냥 나가요. 그래서 나는 빙긋이 웃죠. 왜냐하면 ‘허, 저 말없이 하는 거에 맛을 들였구나!’ 하고요. 이 부처님 법은 말 없는 말로 전달이 되는 겁니다, 이게. 모두가 전달이 되죠. 일체 만물이 다요. 말로 하면 말이 늘어 가서 봉변을 당하는 수도 있지만, 말 없이 말을 한다면 늘어 가지도 줄어 가지도 않아서 아주 정확하게 연결이 되죠. 이 도리를 하루속히 체험하고 풀어 나가려면, 자기 뿌리를 자기가 아주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 선지식들이 “야, 네 나무는 네 뿌리를 찾아야 되는 거지 네 나무가 딴 나무에서 찾으면 되느냐?”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심사숙고해서 한 번 더 다지고 또 다지고 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계(五戒)를 저는요, “술 아주 먹지 마라. 도둑질 아주 하지 마라.” 이러진 않았죠. 왜 그렇게 바꿨느냐 하면, 술을 먹어도 남한테 피해를 주지 말고, 내가 많이 먹어서 내 몸을, 여러 생명들이 사는 집을 망가뜨리지 말고 적당하게 먹어야 약주가 되지, 만약에 적당치 못하다면 망주가 되는 겁니다. 자기 몸에도 해로워서 결국은 빨리 죽게 되는 거죠. 그러면 자기나 죽었으면 좋겠는데 자기 가정까지 파괴가 돼요. 가족들까지 다 죽여요. 그러니 이렇게 나쁜 일이 어딨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마라.” 한 것도 생각해 보세요. 내게 좀 여유가 있는 물건을 내가 딴 사람에게 줘도 도둑질입니다, 그게. 예를 들어서 이게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내가 남을 줘도 그게 도둑질해서 주는 거란 말입니다. 허허허…. 그런데, 내가 남을 줘도 도둑질인데, 이거는 도둑질이지만 도둑질이 아니다라는 얘기죠. 도둑질 아닌 도둑질이죠. 그러니까 함이 없이 하는 도리기 때문에 도둑질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또 이런 경우가 있어요. 일가친척들이 있는데 말을 잘해서 이쪽 집 거를 저쪽에다가 갖다 주는 수도 있죠. 그거는 말 도둑질을 해서 주는 거나 다름없는데요, 말 도둑질이라 하더라도 둘이 아닌 사랑으로써 맺어지는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이건 도둑이 아니다라는 얘기죠. 말을 잘못해서 연결이 돼서 싸움이 나게 하지 말고, 싸움이 나서 의절한 사람도 이쪽에다 말을 할 때는 저쪽 말을 잘해 주고, 저쪽에다 말을 할 때는 이쪽 말을 잘해 주고, 이렇게 한다면 다 잘못되지가 않는 것인데, 외려 이쪽 말을 저쪽에다가 안 좋게 해 주고, 저쪽에다 이쪽을 안 좋게 말을 해 주고 이러니까, 점점점점 더 응어리가 커져서 죄업이 자기한테 돌아오게 되죠. 그게 말로 해서 짓는 구업(口業)이죠, 구업! 입으로 짓고 입으로 받는다 이겁니다.

말을 하다 보니까 너무 길어지잖아요. 그러니까 “공이 색이고 색이 공이니라.” 하는 건, “둘이 아닌 까닭에 그 공한 자체도 공했느니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답답한 것마저도 공했기 때문에 답답한 것마저도 놓으면 아주 편안해지리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꼭 어떠한 큰일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조그만 일이나 큰 일이나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조그만 일은 조그만 일이기 때문에 그냥 내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입이 딱 벌어지거든요. 인간으로선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그런 일이나 조그만 일이나 다 똑같은 겁니다.

어떤 분이 오셔서 “은행에서 차압을 당해서 이제는 옴짝없이 다 뺏기게 됐으니 어떡합니까? 이젠 애들하고 거리로 나앉게 됐습니다.” 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귓속에다 대고 얘기해 줬죠. “당신만 알고, 당신 주인공이 나가서 일을 하게 만들어. 그럼 될 거야.” 그랬어요. 그 사람 주인공이 나가서 일을 하는 거죠. 주인공이라면 원자 속에서 입자가 나가서, 그 입자가 나가는 걸 보살이라고 하죠, 얼른 쉽게 말해서. “부처님 한생각에 보살 천백억이 나가서 응신(應身)이 돼 주느니라.” 이렇게. 그거를 얼른 알아듣기 쉽게 말하려니까 부처님 원자 안에서 입자가 나가서 모두 제각기 다 자기 소임을 해 준단 얘기죠. 그걸 거짓으로 생각을 해선 안 돼요. 지금 현실에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

이건 어떻게 생각하면 정신계로 들어가니까 심성과학이라고 해도 되죠. 심성을 꼭 넣어야 정신계하고 물질계하고 똑같이 중용이 되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물질과학이 돼서 문제가 된 거지 심성과학이라면 어찌 그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병이 많이 오고 그러는 것도 이 모두가 주인이 없어서 그러는 거니까 내 집을 지키려면 주인을 둬야 내 집을 지키죠. 집을 비우고서 어디 나가려면 집 지키는 사람을 꼭 하나라도 놔두고 가죠. 여러분 그렇게 사시지 않아요?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또 ‘주인공! 너 집 좀 지켜 줘.’ 하고선 나가는 사람도 있습디다, 있기는. 허허허…. 그랬더니 고스란히 그냥 있더래요.

하여튼 어떻게 됐든지, 이 개개인 집이 한 몸의 집인데, 집주인이 있어야 세균성, 영계성, 인과성, 업보성 이거를 다 막고 대치를 하죠. 그런데 주인이 없다면 대치를 못 하죠. 그래서 자기 뿌리를 자기가 믿어야 한다, 반드시 자기 뿌리에서만이 에너지가 흡수돼서 자기 나무에게 주어진다는 그 믿음을 진실히 가져야 된다는 얘기죠. 이제 그만 얘기하죠. 질문들 하십시오.

질문자1(남) 스님, 저희들이 좀 안됐다 한다든가 좀 뭐한 것을 봤을 때 생각을 내서 마음을 돌려주는 것과 생각이 나서 마음을 돌려주는 그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 좀 하여 주십시오.

큰스님 우리가요, 무슨 생각을 내기 이전에 벌써 뭐가 닥치면 그 닥치는 대로 자기가 그냥 보고 듣고 닥친 걸 알기 때문에 그냥 아는 거지, 무슨 생각을 내서 아는 게 아니잖아요, 그죠?

질문자1(남) 예.

큰스님 그래서 닥쳐왔으니까 ‘아, 이것을 어떡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 난 거죠, 그냥? 생각이 났으면 바로 그냥 ‘이렇게 오게 한 것도 너니까 해결하는 것도 너야.’ 그렇게 돌아가는 거 아니에요? 그냥 뭐, 생각을 일부러 할 것도 없고 안 할 것도 없고, 지금도 말씀하시는데, 내가 말없이 마음으로 하라고 그랬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도 또 하지 마세요. 사람이 환경에 따라서 말을 할 땐 말을 해야 하는데, 일부러 지어서 마음을 내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야 그것이 함이 없이 하는 것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말을 천 마디 하고도 한 마디도 한 사이가 없는 사람이 있고, 한 마디를 하고도 그냥 수없이 많은 말을 한 게 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이런 분별하는 생각은 하지 마시고, 그냥 환경에 따라서 용도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서 그냥 거기다 돌려놓고 지켜보는 그런 멋있는 멋쟁이가 돼야죠.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4년 12월 4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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