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이해의 길 22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인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불교사를 가리켜 이단을 포용하는 역사라고 하였다. 대승불교에 이르면 근본불교와는 성격이 다른 정토신앙이나 선불교 등이 등장하는데, 이를 내친 것이 아니라 포용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는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이단을 추방했던 서양의 종교사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그는 오히려 ‘이단에서 불교의 새로운 생명이 샘솟았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확인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단(異端)이란 다른(異)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범주가 다르다. 사과와 배는 서로 다른 것이며, 지구가 네모라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그런데 같은 종교 안에서 자신의 신앙과 다른 입장을 보이면, 이단이란 이름으로 틀렸다고 단정하면서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적 독선과 배타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의 사전적 의미도 ‘정통(正統)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교의나 교파를 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있다. 이단은 분명 정통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초창기와는 시대나 사회,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기존의 입장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해치거나, 심지어 종교 전쟁까지 일으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단을 포용하는 불교의 역사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근본불교 입장에서 보면 대승불교는 이단이 맞다. 대승불교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붓다의 연기를 재해석한 공(空)사상으로부터 불성과 여래장, 유식불교, 밀교, 정토사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힘들게 전승한 붓다의 말씀인 경전을 마음 ‘심(心)’ 한 글자로 압축하고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을 강조한 선불교도 등장한다. 그야말로 다양성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다름에도 정도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정삼각형과 직각삼각형은 서로 다르지만 각이 셋이며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본질은 같다. 즉 그 차이가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삼각형인 것이다. 근본불교가 정삼각형이라면, 대승불교는 직각삼각형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둘은 ‘불교’라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의 차이는 본질적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가 본질을 넘어서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정삼각형과 직각삼각형은 아무리 크기나 모양이 다양하더라도 본질이 같지만, 삼각형과 사각형은 본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불교라는 본질을 벗어나면 ‘불교’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대승불교는 불교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신앙까지 포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산신각이나 칠성각은 불교가 아닌데도 불자들은 대웅전에 들러 붓다께 예배하고 자연스럽게 산신각에 참배한다. 이런 비불교적인 요소까지 사찰에 두는 것은 포용성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본질적 차이마저 포용하는 대승불교의 논리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방편설이다. 방편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흔히 비유되는 것처럼 달을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標月之指)은 방편이다. 달을 보는 것은 불교의 본질인 깨침을 의미한다. 달을 보기 위해 근본불교에서는 손가락이라는 방편을 제시했지만, 대승에서는 손가락뿐만 아니라 볼펜이나 분필, 지팡이 등 다양한 수단들을 동원하였다. 그만큼 사회, 문화적으로 사람들의 요구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대승은 다양한 능력과 소질을 가진 수많은 중생들을 큰(大) 배(乘)에 모두 태운 것이다.

근본불교 시선에서 보면 대승불교는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파격적이다. 귤과 천혜향의 차이가 아니라 귤과 사과의 차이라 할 만큼의 넓은 간극도 존재한다. ‘대승은 붓다의 말씀이 아니다(大乘非佛說)’는 주장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은 중생들의 다양한 처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다양성을 포용하면서 대승은 불교라는 이름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 예술을 창출하였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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