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되려면 변화하라

업 1mm 못 바꾸는 게 우리네 삶
조금만 바꿔도 변화 전환점 맞아
조그마한 변화가 곧 혁명이 된다

무아와 무상을 연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연기적인 세계가 이루어지고, 또 실상적인 관점에서는 생멸의 세계가 결국 불생불멸의 세계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기론은 존재하는 현실세계를 이해할 때 생멸의 세계는 허망하다 혹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한다.

“자성은 없다. 그래서 공이라고 한다” 〈금강경〉 〈반야경〉 계통은 모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존재하고 있는 세계, 연기로 이해하는 것은 무아와 무상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생멸이 이어지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를 무상하다, 허망하다고 이야기하고, 결국 본질은 공이라고 한다.

이 구조에서 A법과 B법은 어떻게 되었는가? 변화에 의해 5시를 기점으로 술이 식초로 변했다. 실상론적 구조 속에서 A법과 B법은 그대로 존재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식초도 존재하고 술도 존재한다. 술과 식초를 서로 떼어놓고 한번 생각해보자. 식초도 있고 술도 있는 것이다. 떼어놓고 있다 없다 관계 속에서 인식할 때는 ‘존재한다’고 한다.

무아에 대한 설명
물은 화학식으로 ‘H2O’다. 수소 분자 두 개와 산소 분자 한 개가 붙어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수소(H)와 산소(O)가 끊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소는 수소로 있게 되고 산소는 산소로 있게 된다.

관계하고 있을 때는 물이 되었는데 관계를 끊어 버리면 물은 없어지고 수소와 산소만 남게 된다. 물(H2O)로 관계하고 있었을 때는 물이 되었다가 관계를 끊어버리면 수소는 수소, 산소는 산소일 뿐이다. 관계하고 있을 때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데, 관계가 끊어질 때는 있다 없다로 인식한다. 그래서 A법과 B법은 이런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법과 B법은 잠재된 세상을 기준으로 볼 때 밑의 부분은 잠재된 세상이고, 위로 올라온 것은 드러난 세상인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A법과 B법 밖에 없는가? 옆에 보니 C법도 있고, D법도 있고, E법도 있고, F법도 있다. 똑같은 법들이 계속 연관되어 존재한다. 무아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나라고 주장할 만한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A가 B로 변하고 나니까 B는 스스로 자신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집착한다. 즉 위에 올라왔으니까 다시는 내려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데,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본인은 안 죽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바탕은 자기는 항상 생하고 있다고 집착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육신이 만들어지는 원리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안 바뀌려고 하는 것은 본성이고 그것에 집착이 생기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아집이 생기게 된다. 잘못된 자신을 끊임없이 자기라고 인식하는 아집에서 모든 것이 전도되어 번뇌망상이 생기는 것이다.

아집이 생기고 난 뒤 A법에서 B법으로 바뀌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생하고 나면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변하지만 본인은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하는 아집이 생기는 것이다. 변화하는 것의 기본적인 속성은 불안이다.

끊임없이 변한다는 자체에서 기본적으로 생기는 사고의 인식은 불안인 것이다, A법에서 B법으로 변하고, B법에서 A법으로 변화하는 속성은 바로 불안이다. 내가 인식하든 못하든 간에 내 속에는 끊임없이 불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몸뚱이가 만들어지는 것은 인연이 되는 조건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조건이 소멸하면 멸하는 것이며, 무자성인 무아이다.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무상인 것이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에 대해서 불안이라는 것이 내 속에 자연적으로 생긴다. 불안하기 때문에 집착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아집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몸뚱이, 오취온
다이어트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적게 먹는다고 다이어트가 되는 것이 아니고 생각자체가 아집에서 벗어나면 다이어트가 되는 것이다. 이 몸뚱이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업에 의해서 끊임없이 갖다 붙인 결과이다. 내 업만큼 갖다 붙인 것이 이 몸뚱이인 것이다.

날씬한 몸매를 만들려면 업을 바르게 가져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날씬하지 않으려 해도 날씬해지고, 자연히 오래 살게 된다.

인간의 몸뚱이를 ‘오취온’이라고 한다. 오온을 축적시켜 만든 것이 몸뚱이이다. 오온의 색수상행식을 살펴보자. 6경과 6근과 6식은 몸뚱이에 의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체가 생기고 난 후의 문제이다. 그런데 색수상행식이라는 것은 인식할 수 있는 뿌리가 하나도 없다. 오온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회양선사가 육조 혜능을 찾아 갔을 때 회양에게 “어떤 물건이 왔는가”라고 혜능이 묻는다. 어떤 한 물건이 왔느냐 했을 때, 어떤 한 물건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부모에게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누구였던가를 말한다. 이것은 생명의 본질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6근·6경·6식을 이야기 할 때는 몸뚱이가 생기고 난 후가 되며, 몸뚱이가 생기고 난 후에 오온에 대한 인식이 고의 존재인 것이다. 

이 몸뚱이가 생긴 이유는 불안에 의해 자꾸 자기 것으로 업만큼 갖다 붙인 결과인 것이다. 자기의 업만큼 갖다 붙여 몸뚱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본질적인 불안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불안이다. A법에서 B법으로 변했기 때문에 A는 멸했고, B가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C법도 있고, D법도 있다. 또 E법도 있고 F법도 있다. A법과 B법이 변화했듯이 C법, D법, E법. F법도 끊임없이 변한다. 변하니 생멸도 반복된다. 이처럼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생하고 멸함을 되풀이 하고 있다. 생하고 멸하고 바뀌는 변화를 보면 불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같은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 자기화하는 것이다. 주위를 자신에게 붙여 자신과 하나로 만듦으로써 변화를 극복해 가는 것이다.

아집과 집착에 의해서 자기자신을 자꾸 더 불안하게 한다. 옆에서 일어나는 변하는 상황을 보니까 더 불안해 진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 편안해지려면 바뀌는 것을 보고, 자기도 바뀐다고 인식을 하면 된다. 그런데 자기는 바뀌지 않는다고 집착하고 아집을 부린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은 바뀌지 않고 옆의 것도 안 바뀌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 자신에게 붙이는 것이다. 바뀌는 옆의 것을 자신에게로 붙여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안 바뀐다고 집착하고 있으니까 옆에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된다. 옆에 것을 자기에게 붙여서 자기 것이 되려면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제7식에서의 오온중 색수상행식의 색이 바로 아집, 집착이다. 오온의 작용에 의해서 끊임없이 자기한테 갖다 붙이는 것이다. 자신의 업만큼 갖다 붙인다. 우리 몸뚱이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 오온의 작용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여 내가 가진 업만큼 갖다 붙여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온은 이 몸뚱이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에 대한 해답인 것이다.

색, 루파, 아집
색은 산스크리트어로 ‘루파(Rupa)’인데 아집이다. 아집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생멸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생멸의 뿌리에는 불안이 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감정은 불안과 공포이다.

멸할 때 공포를 가장 크게 느낀다. 생과 멸의 변화는 생명이 태어날 때 잘 나타난다.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 혹은 동물이 새끼를 낳을 때도 그 공포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낳게 된다. 죽을 때 즉 멸할 때는 내가 평생 살았던 그 가치만큼, 그 능력만큼의 잠재능력을 가지고 죽게 된다.

태어날 때의 불안과 공포는 부모가 어느 정도 최소화 해주지만, 생명이 지속 되다가 멸할 때는 자신이 평생 살았던 그 댓가만큼 불안을 느끼고 공포를 느끼면서 그 불안을 가지고 간다. 다음 생에 몸 받았을 때 갖고 있던 불안을 그대로 갖고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의 형태는 끊임없이 바뀌는 것 같지만, 자신이 있는 기본적인 업의 덩어리는 계속 내 것일 뿐이다. 오온을 제대로 이해하고 12연기를 이해하고,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이고, 착한 일 했을 때 착한 과보를 받게 되고, 나쁜 일을 했을 때 나쁜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은 삼세윤회설에서 설명된다.

악한 일을 했을 때는 악한 과보를 받고, 착한 일을 했을 때는 착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정확하다. 윤회를 100% 믿게 되고 인과를 100% 믿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한생을 살아가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수억 겁의 삶속에서 100년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1mm의 방향만 바꾸어 놓아도 1mm의 바뀐 방향이 결국 나로 하여금 성불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삶의 덩어리는 수억 겁 동안 살면서 만든 내 업이다. 한생 동안 바꾸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무엇이 바뀌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부처라고 큰소리치면서 살고 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안 바뀔 것 같은 ‘나’이지만 아침에 일어나 내가 부처라고 생각하고 참선하면 묘하게도 자신이 부처로 만들어진다.

100년도 안 되는 삶에서 업의 덩어리를 1mm도 못 바꾸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방향을 1mm만 바꾸어 놓아도 이것이 다음 생으로 굴러가면서 자신의 삶을 바꾸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한 점의 위치에서 아주 조금 바뀌는 것이 혁명이고 변화이고 나아가 모든 것이 그것 때문에 바뀌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도를 구하겠다는 마음이 하늘에 이르면 그냥 부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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