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극 벌인 탈주범 지강헌

1988년 10월 16일 탈주한 지강헌 등 4명이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한 주택가에 침입해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장면.

 

서울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88년 10월 8일, 지금은 없어진 영등포교도소서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던 미결수들이 호송버스서 난동을 일으켜 교도관들로부터 실탄이 장전된 총기까지 탈취해 달아나는 역대급 탈주극이 벌어졌다.

탈주범들 영등포 교도소 출신
TV 인질극 중계 보다 현장으로
“성직자 책임 크다”는 말 죄책감

내 생명 던진 강렬한 짧은 만남
2006년 사건 모티브로 영화화
우리 사회 죄 앞에서 평등해야

이들이 미리 호송 과정서 탈주 계획을 모의 하면서 수갑을 풀기 위해 준비 해둔 특수 도구는 호송차량 탑승전 소지품 검사 과정에서 전혀 적발되지 않았다. 특히 이들은 5공 시절 제정된 보호감호제도를 골자로 하는 ‘사회보호법’을 적용받아 꽤 긴 기간을 교도소에서 지내야 할 상황이다보니, 매우 강한 탈주 의욕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다 숫적 열세까지 겹치니 무장한 교도관들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호송 버스에 타고 있던 미결수 25명 중, 탈주자는 ‘불안한 도피 생활’을 거부한 13명을 뺀 12명이었다. 이들중 7명은 탈주 초기에 검거 및 자수했으나, 나머지 5명중 4명은 서울 도처에서 은신하다가 1주일만인 10월 15일 밤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한 주택가에 침입한다.

탈주자들의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 다음날 늦은 새벽 몰래 집을 빠져 나간 가장으로부터 신고받은 경찰은 집주위를 포위한다. 하지만 탈주범들은 남은 가족들을 앞세워 인질극에 돌입한다.

20대 초반인 나머지 3명과 달리 당시 35세 최연장자인 지강헌은 자신들의 주장을 TV로 생중계 할 것을 요구하는 등 최초로 인질극이 전국 방방곡곡에 방송 전파를 탔다. 지강헌은 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앞에서 자신들의 억울함과 사회에 대한 울분을 거침없이 내뱉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권총 자살과 경찰이 쏜 총탄에 모두 죽음을 맞는다. 그들이 주장했던 한마디는 훗날 크게 국민들에게 울림을 줬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일요일에 일어났던 이 사건을 모티브로 2006년에는 ‘홀리데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기도 했다. 비지스의 ‘홀리데이’란 음악도 우리 귀에 친숙하다.

나는 당시 지강헌이 수감됐던 영등포 교도소 교화위원으로 있었지만, 지강헌을 몰랐다. 부산서 법회를 마치고 서울 방배동 자비사에 도착해, 뉴스를 보기 위해 TV를 켜니 방송서 인질극 장면이 나왔다. 깜짝 놀랐다. 재소자 포교에 열정을 불태울 때라 유심히 지켜보다가 갑자기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교화하던 교도소서 탈옥하다보니, 그들의 탈주가 나 같은 교화위원들이 교화를 잘못한 책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TV를 보다가 가만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내가 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경찰은 인질범들의 어머니, 애인 등 가족과 지인을 급히 수배해 동원해도 설득이 안 돼 난감해 하고 있었다.

내가 한번 자수를 권유해 보겠다고 하자, 경찰서에서는 절로 차를 보내 주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인질극 현장이 있는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으로 달려갔다. 집 주변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밀려 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그 집 장독대서 탈주자 주범인 지강헌과 만났다. 경찰은 나에게 지강헌을 심리적으로 자극하면 총을 맞을지 모른다고 조심하라며 나의 안전을 신신 당부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지강헌!”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지강헌은 “삼중이 구먼!”하고 맞받으면서 너희 성직자들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대한 책임이 크다”고 외쳤다.

이번 사건의 책임이 삼중이 너에게도 있다며 원망하는 목소리로 모두 죽여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입으로는 맨날 좋은 말만하지만, 평소 우리 같이 힘들고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잘 챙겼으면 이런일이 안일어났을 것 아닌가라며 원망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뒤에 있는 경찰들은 지강헌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자 이제 그만 됐으니 내려오라고 계속 종용했다. 나는 젊은 혈기에 권총에 장전된 총알 하나라도 나를 쏘느라고 소비하면, 인질들에게 더 쏠 탄알이 없질 않을까 해서 집으로 뛰어들려고 했지만, 경찰들이 강력히 제지해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집 아래 설치된 수사본부에서 4시간 이상을 지켜보며, 결국 시신으로 집을 나오는 그들과 마주했다.

그러면서 저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사람은 바로 나고, 우리 사회가 아닌가 라는 강한 죄책감에 한동안 괴로워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 보니 30년 전 이맘때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 생명을 던진 강렬한 만남이라서 그런지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또렷하다. 비록 죄수들이지만 죽어가면서까지 그들이 외쳐댔던 ‘유전무죄 무전유죄’. 3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 사회가 죄 앞에서 많이 공평해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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