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이해의 길 21
어떤 우연한 만남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때 우리는 인연이라 부른다. 물론 나쁜 결과를 가져오면 악연이 된다. 그런데 하나의 우연이 훗날 엄청난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지면, 그 우연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대승불교의 발생과 붓다의 장례식이라는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다비식과 대승불교는 과연 어떤 인연이 작용하고 있을까?
붓다는 자신의 장례를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에게 맡겼다. 다비가 끝난 후 마가다와 코살라를 비롯한 여덟 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붓다와의 인연을 강조하면서 사리를 모셔가겠다고 다툼을 벌였다. 결국 그들은 공평하게 1/8로 나누어 붓다의 사리를 가지고 그들 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불탑(佛塔)을 세워 사리를 모시고 붓다를 추억하였다. 그곳이 훗날 대승불교를 일으킨 역사적 공간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파불교는 지나치게 학문적인 태도로 인해 대중들로부터 멀어졌다. 불교를 알고 싶어서 절에 찾아가도 비구들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자기완성을 위한 공부에도, 영원불변하는 75개의 법(法)을 연구하기에도, 자기 부파의 독립적인 논서를 완성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갈 곳을 잃은 재가자들이 의지할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바로 붓다의 사리를 모신 불탑이었다.
당시 절은 승려들이 관리했지만, 탑은 재가자들이 별도로 운영하였다.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날 즈음 인도 전역에는 8만 4천 개의 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수많은 탑을 세우는 데 경제적으로 지원한 인물이 바로 아소카왕이다. 그 덕분에 불탑을 순례하는 이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절에서 발길을 돌린 불자들은 탑에 찾아와 꽃과 향을 바쳤으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붓다를 예경하였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탑을 돌면서 소원을 비는 등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곳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불교를 설명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들은 붓다의 발자국이나 법륜(法輪), 보리수, 일산 등을 탑에 조각하여 순례객들에게 붓다의 생애를 전해주었다. 당시는 붓다와 같은 위대한 인물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풍습 때문에 붓다의 모습을 직접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상징을 통해 불교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법사(法師)의 원형이다. 이처럼 탑을 중심으로 모인 재가자들이 붓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대승불교의 주역들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탑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 중에 붓다의 생애를 기록한 찬불승(讚佛乘)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붓다의 생애뿐만 아니라 전생담(前生譚), 즉 전생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자타카(Jataka)라고 한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달 속의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이야기도 자타카에 나오는 내용이다. 달 속의 토끼가 바로 붓다의 전생 모습이다.
그렇다면 찬불승들은 왜 이런 자타카를 만들었을까? 여기에는 붓다의 위대한 인격에 대한 흠모가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붓다의 삶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위대한 인격이 6년 동안의 수행으로 가능할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들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붓다가 수많은 겁(劫)의 시간 동안 토끼나 임금, 사문 등 여러 모습으로 윤회하면서 수행에 수행을 거듭한 결과 금생에 싯다르타로 태어나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위대한 삶을 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자타카였다. 붓다의 전생담을 만들어 불교를 대중들에게 널리 전한 찬불승 역시 대승불교를 일으킨 주역에서 빠트릴 수 없는 존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불탑은 대승불교의 상징이며, 이곳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새로운 불교운동의 주역들이다. 과연 탑이 없었다면 대승불교가 가능했을까?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붓다는 대승불교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장례를 재가자에게 맡긴 것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