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 일분일초도 떼어 놓지 않고 자기가 사는 것이 그대로 참선

제가 공부 길을 잘못 가고 있는지요

질문 :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음공부를 한다고 놓고 가다 보면 왠지 바보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얕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주인공 자리에 놓는 공부가 생활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는데, 제가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일까요?

답변 : 옛날에 길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 써 붙이기를, 한 군데는 길이 돌사닥다리 골짜기로서 험하다고 써 놓고, 한 군데는 아주 대로(大路)로 좋은 길이라고 써 놓고, 또 한 군데는 가다 보면 춤도 추고 술을 마시는 주막도 있고 쉴 자리도 많은 좋은 길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 길을 가만히 보면, 공부에 뜻이 없는 사람이 볼 때는 대로가 좋다고 갈 거고, 또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은 ‘내가 대로를 찾으려고 왔느냐? 험하더라도 내가 갈 길은 꼭 가야만 하지.’ 하면서 험하지만 바른 길을 택해서 갈 테고, 또 그냥 논다니 같은 사람은 ‘뭐, 젊음이 십일홍 넘어가면 다 없어질 텐데 아니 놀고 어떻게 가랴.’ 그러고선 험한 길을 되돌아서 가고 그럴 거예요.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말하면서도 하지 않는 법, 눈으로 보면서도 보지 않는 법
눈으로 보면서도 보지 않는 법, 귀로 들으면서도 듣지 않는 법’
이 네 가지를 한데 합쳐서 놓는 법이며, 이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렇게 세 길로 나누어져 있는데 수행자가 택한 길은 아주 험악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죽은 해골도 그냥 늘비하게 있고, 불쌍하게 죽은 축생들의 해골도 늘비하게 늘어져 있고, 귀신도 많은 그런 길이에요, 아주 소로(小路). 그런 길을 걷고 있는데, 가면서 모조리 집어먹지 않고는 해결할 수가 없지요. ‘둘이 아니다’ 하면 집어먹는 거니까. 둘이면 집어먹을 수가 없어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모조리 집어먹고 가다 보면 길은 빨라지고 정말 날 수도 있는 길, 그냥 떠서 가는 길이 생기지요.

그렇듯이 만약에 지금 우리 앞길에 별의별 것이 다 쌓여 있다고 한다면, 축생이나 아귀, 아수라 같은 차원이 낮은 것들이 죽어서 쭉 있으면 이걸 치우고 길을 가야만 하겠죠? 그래서 정말 참 선의 길은, 아주 천야만야하고 좁은 골짜기고 길이 험하고 사람이 죽어서 해골이 이리저리 구르고 그러는 데가 바로 우리 지금 공부하고 가는 길이죠.

그러니 속지 마십시오.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속지 마세요.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말하면서도 하지 않는 법, 눈으로 보면서도 보지 않는 법, 귀로 들으면서도 듣지 않는 법,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걷지 않는 법’ 이 네 가지를 다 한데 합쳐서 놓는 법이며, 바로 이것이 삼매에 드는 법이며, 참선이며, 참 행이며, 도 행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기를 깨쳐서 광대무변한 법을 들이고 내는 데 손색이 없고, 걸림이 없고, 여여함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때에 따라서는 꿈에 뭐가 보이든, 낮에 서로 상대가 생기든, 어떠한 것을 보더라도 굴하지 말고, 어떠한 걸 보더라도 속지 마시고, ‘아! 저것도 모를 때 내 모습이겠지.’ 하고 이해를 하시고, 또 때에 따라서 꿈을 잘못 꾸었다 해도 ‘화해서 모습을 보이는 거지. 저것도 내 모습이겠지.’ 이렇게 자꾸 하나로 돌린다면, 우주도 축이 있어야 돌아가고 지구도 축이 있어야 돌아가듯이, 맷돌도 축이 있어야 돌아가고 모든 기계도 축이 있어야 돌아가듯이 우리 인간도 축을 빼놓고는 안 됩니다. 축으로 인해서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이 도리를 배워서 생활이나 일체 만법을 운용하고 나가면서, 영구적이고도 영원하면서 윤회에 끄달리지 않고 여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중용의 중심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도입니다.

몸이 아프니 관하는 힘도 약해져요

질문 : 마음공부를 나름대로 한다고 했는데 몸이 아파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보니 관하는 힘도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힘을 내서 다시 공부를 다잡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 몸이 아파서 누워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눕게 한 놈이 누구냐는 겁니다. 아파서 눕게 한 놈이 누구냐? 그거를 알면 아파도 웃으면서 살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네가 그런 거니깐 일으키는 것도 네가 일으키는 거지. 네가 형성시켰으니깐 네가 일으켜라.’ 이렇게 넓게 생각을 한다면, 설사 몸은 누워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한잠 자고 일어나듯 그렇게 가벼워질 테죠. 그런데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집착을 하면서 의사한테 어떤 말을 들었으니까 들은 대로 그냥 집착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을 하고 끄달리니까 몸속의 생명들도 꼭 그렇게 듣고선 행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잘못될 수밖에요. 그래서 묘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힘들게 산다 하더라도 그렇고 잘 산다 하더라도 그렇고 아주 미묘한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한 발짝을 성큼 뛰려고 해도 뛸 수 없으니까 요만큼만 뛰어야 알맞겠다고 생각하고 떼어 놓고 사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덮어놓고 그냥 막 떼어 놓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니깐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는 한 발 한 발 겁내지 말고 떼어 놓고 사시라 이겁니다. 이 공부를 하는 데 마음으로 뛰어넘을 때는, 우리가 지혜를 넓혀야 되겠다 할 때는 가차 없이 떼어 놔야 하는 거죠.

예전에 이런 예가 있었어요. 길을 걸어가는데 이건 길이 아니고 저 산꼭대기에 있는 저게 길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걸 믿겠습니까? 근데 그 뒤에 생각을 하니깐 믿게 되는 거죠. 저 언덕배기가 길이라고 그러는 걸 믿는 게 아니라 그 뒤에 뜻이 있으니깐 믿는 겁니다. 여기가 길이니까 저기가 길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지만 길이라고 하니까 한번 그 뒤의 문제를 좀 알아보자 하고선 올라가서, 까만 데 올라서서 보니까 허공만 보이거든요. 허공만 보이니깐 ‘어, 이게 허공 길이구나!’ 이런 거죠. 허허허. 그러니까 내가 가 보지 않으면 모르고 생각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발달이 된 세상에서, 옛날에는 몸으로 가서 봐야 알았지만 지금은 생각으로 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겁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이게 길이 아니라 저 높다란 산꼭대기가 길이라고 한다면 생각으로도 거기에 올라갈 수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지혜가 모자라서, 거기가 길이라면 그냥 올라갔지만 말입니다. 나 어려서만 해도 그렇게 못 듣고 못 보고 했으니깐 어리석은 일이 많았죠. 그렇지만 지금은 육체의 고행이 아니라도, 정신의 노력이라면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진 땅이 이만큼 있어도 그 진 땅을 넘어서면 아무 기탄이 없는데, 그 진 땅을 넘어서지 않고 다리를 걷고 부들부들 떨면서 걸어가니까, 그거 씻어야지, 뭐, 이것저것 죄 해야지, 옷을 갈아입는 이런 고통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훌쩍 뛰어넘어라 이랬습니다. 마음으로 뛰어넘으라는데 왜 못 뛰어넘느냐. 마음으로 뛰어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봐요. 억지로 할 수 없나 봐요, 그 마음이라는 게. 그래서 모두 제 마음을 가지고도 제 마음대로 못 쓰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문제가 크죠. 병고 때문에 고통이 큰 게 아니라 그 병고를 느끼는 마음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작은 상처가 생겨도 그 아프다는 생각을 자꾸 일으키면 큰 고통이지만 설사 큰 병고라도 마음으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관한다면 그 또한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넘어설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와 마음이 안 맞아서…

질문 : 결혼 10년차 주부입니다. 시어머니와 마음이 안 맞아 힘든데 남편조차 제 편이 돼 주질 않고, 내 맘도 내 맘대로 되질 않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 우리가 살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그러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죠. 부부지간에도 그렇습니다. 왠 줄 아십니까?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하면서 그냥 상을 찌푸리고 그런다면 복이 들어오다가도 나갈 뿐만 아니라 해결이 나질 않아요. 화목할 수가 없게 되죠. 그러다 나중엔 이혼까지 하게 됩니다, 보기 싫어지니깐. 왜 그렇게 되느냐, 남편이라는 거, 자식이라는 거, 부모라는 게 전기로 치면 가설이 돼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자식이다 부모다 하는 가설이 돼 있어요.

그런데 내 주처의 주인공을 왜 주인공이라고 그러느냐.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참자기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하고 이름은 여러 가지 많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게 뭐냐면, 항상 마음과 육체가 더불어 같이 쉴 사이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주인공이라고 할 수밖에요. 자기 육신과 마음이 더불어 같이 돌아가니까. 그럼 가족들만 그러냐. 그게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일을 하면서 문제들이 많죠? 윗사람 챙기고 아랫사람 이끌어 가기가 힘들어서 애쓰는 사람도 많고요. 지금 시대에는 아마 더할 거예요. 그런 데도 쓰이는 거죠. 그런 것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 다 쓰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어라. 좀 발전을 해라. 실천을 해 봐라. 체험을 해 봐라.”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공에다 스위치를 누르면, 즉 입력을 한다면 자식의 마음에까지도 불이 들어오고 남편의 마음에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가설이 돼 있으니까. 그러니 마음에서 고장 난 것을 껍데기인 육체가 그냥 허수아비마냥 뛰어 들어가는 게 아니죠. 그리고 지금 고등학교 중학교까지도 깡패가 생겼다고 야단법석들이 나고 뭐, 두드려 맞고 피를 흘리고 야단들을 하고 학교 못 보내겠다고 야단들을 하는데, 관하는 것만 가르쳐 줬더라면 모든 거를 대처하고 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렇게만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나라도 좋아질 겁니다.

지금 우리 인생살이가 살얼음판을 딛고 가는 형국인데 모든 거를 거기다가 입력하듯이 맡겨 놓는다면 마음도 편안할 것을, 속에서 부아가 일어난다고 내던지고 악을 쓰고 부아를 자기가 돋우니까 살얼음판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는 셈이거든요, 빨리 빠지게. 그리고 또 부아가 나서 막 팽개치고 이럴 때,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고 그냥 죽이고 싶을 때도 있죠. 그럴 때는 살얼음이 그냥 깨져 버려요, 그냥. 깨져서 물에 풍덩 빠지게 되죠. 그러면 허덕이면서 날 살리라고 어떻게 빌고라도 나오게 되면 한번 빠졌던 문제들이 얼마나 진퇴양난인지 모르죠. 그래 가지고 자기 몸은 병들죠, 재산 없애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생살이가 그렇답니다.

부처님께서도 육신은 배로 비유를 했고, 육신 속에 있는 생명체들은 중생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 배에 타고 가는 중생들로. 그리고 주처의 중심, 즉 주인공은 선장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랬는데 부처님이 뭐라 그러셨느냐 하면 중생들이 만약에 ‘부처님,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면 그 배는 뒤집히고 만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장한테 모든 거를 맡기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가는 데까지 가면서도 아주 편안하게 갈 수 있다는 얘기죠.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습니다.

상대와 부딪쳤을 때 욱 일어나는데…

질문 : 공한 도리를 알아보겠다고 공부를 하면서도 상대와 부딪쳤을 때 욱 일어나는 제 마음을 보면 힘이 쭉 빠지게 됩니다. 그냥 다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나 봅니다. 정말 진짜로 실천하면서 제대로 공부 한번 해 보고 싶은데 도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 여러분은 내가, 그 사람이 내가 돼 볼 줄은 한 번도 생각 안 해 봅니다. 해 보는 양반들도 있겠지마는 대부분 안 해 보고 넘어갑니다. 서로가 말다툼을 할 때도 한번 그 사람이 내가 돼 본다면 그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를 잘 알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 자체,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내가 돼 본다면 그것을 이해하고 고깝게 듣지도 않을 것을, 내가 돼 보지 않는 그런, 내 주장만 하는 그런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내가 잠시 어느 그 사람이 돼 보니까 너무나도 참혹하고 괴로웠습니다. 내가 병 앓는 것처럼 얼마나 고달팠던지 그 문전에 나오면서 그 사람이 또 문전에 나가는 것이 바로 내가 나가는 것 같고, 내가 나가면서 생각해 보니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 사람도 역시 눈물이 흘렀거니와 나 역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후에 그 사람의 병은 나았죠. 물론 내가 낫게 한 것도 아니고 그가 낫게 한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공심으로서의 공용을 하고 있으니, 공한 자체가 바로 부처님이니까 내가 했다고 할 수도 없지만, 바로 내가 있기 땜에 길을 인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길을 인도했으면 바로 인도한 사람도 있거니와, 내가 있으니까 길을 인도를 받고 생각을 낸 겁니다. 이게 길잡이입니다.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 부처라면 생각을 냈으니깐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도리이자 법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그래서 모든 것을, 우리가 고깝게 듣기 이전에 내가 그 사람이 한번 돼 본다는 거. 또 남이 아프면 한번 그 아픔을 내가 대신 그 사람이 돼 볼 수 있는 그 마음 가짐가짐. 모든 것을 그렇게 해 나갈 수 있다면 가정이 화목하고 남남끼리도 화목할 수 있고, 또 친척들하고도 화목할 수 있건만 어디 그렇습니까, 지금 세상이. 그저 마음으로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해 주니까 할 수 없이 말다툼을 하게 되고 이러는 수가 또 많습니다. 그럴 때는 말을 아예 하지 말고, 마음과 마음끼리 통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제일 적합하다는 얘깁니다.

말을 해서 듣기 좋은 말은 하고 또 듣기 싫은 말은, 해서 소용없는 말, 외려 더 악화를 일으킬 말들, 이런 거는 좀 삼가면서 자기 주인공에 일임해서 맡겨 놓으면서 항상 이렇게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게끔 지혜를 갖는다면 우리가 공부하는 데도 ‘야! 우리가 집안에 이렇게 급한 일이 있는데 공부하라고? 공부보다도, 참선하기보다도 지금 아프고 괴롭고 가난이고 또는 우환이 끓는데 어떡하면 좋으냐.’ 하고 그걸 급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우환과 가난, 또 병 이런 것들이 다 내 주인공, 그 ‘공’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내가 그 공에 모든 것을 맡겨 놓는다면 거기에서 다 그것이 슬슬슬슬 녹아 가면서 봄이 오듯이 그렇게 녹는답니다. 모든 게 다요.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자기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여러분이 적게 아프든 많이 아프든 또는 몸이 아파서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진정코 아픈 사람이 많아요. 진정코 마음이 아파.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참,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이 항상 돼 주는 마음으로써…. 아니, 이건 가면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가면을 쓰고 이런 말 하는 것도 아니고 가설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이, 항상 마음을 같이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지. 아프지 않게 우리 같이, 아픈 거 아프지 않은 거를 다 한데 합쳐서 우리 아프지 않게 하자.’ 하고 같이 항상 같이해 줍니다. 그럴 때는 어느 땐가 꼭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살 겁니다.

우리 인간이 부처님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한군데로 기울어져서, 종교에 미쳐서 이렇게 기울어지라는 게 아니라 평등한 진리를 파악하고 대승이 뚜렷하고 참…. 인간이라는 이 두 글자 자체가 얼마나 성스럽고, 참 아주 개발적이면서도 영구적이고, 포괄적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생동력 있고 자유스럽고,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누가 종교를 믿으면 “아니, 왜? 우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 놓고 보면 뭘 어떻게 하고 산단 말입니까? 그럼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건 죽으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죽는다 하면 사는 길이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나 자체는 사량과 더불어 육안으로 보는 거고, 육의 이 모든 달린 데서, 즉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내고, 이거는 사량적인 문젭니다. 그러나 잠재의식 깊은 속에서 같이하고 100%가 움죽거린다면, 우리가 연구한다고 개발한다면, 우린 인간으로서 첨단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유인이니 각을 이루었느니 도니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공부를, 공부라고 할 것도 없지마는, 참선이라고 할 것도 없지마는, 평상시에 일분일초도 떼어 놓지 않고 자기가 사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자기를 세우고, 자기한테 모든 것을, 자기가 하는 거 자기한테 놓으라는 얘깁니다. 사량적으로 아만을 일으키고 아상을 일으키고, 내가 제일이고 내가 하는 거고, 내 거고 내가 줬고, 내가 줬기 때문에 살고…. 모든 것을 이렇게 마음을 먹어서는 절대 이 공한 진리를 알 길이 없습니다.

매사에 자신이 없습니다

질문 : 저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자신이 없습니다. 새로운 일이 주어지면 해 보지도 않고 할 수 없다는 생각부터 하게 됩니다. 저도 좀 적극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 이 마음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죠. 어떤 사람이 인제 회사가 망하게 됐더랍니다. 다음 날이면 딱 망하게 됐어요, 부도가 나서. 그런데 “아이구, 이거 회사가 망하면 사람들이 전부 죽습니다. 이거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살자고 하는 거보다도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 텐데 이 노릇을 어떡합니까?” 했을 때 그 사람이 지극하게 이 마음공부를 그래도 해 나가는 사람이기에 “어, 그것은 걱정할 거 없어.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겼으면, 줬다가 뺏었다 하지 말고 그냥 진짜로 맡겼으면 저 나무들이 싹하고 뿌리하고 같이 붙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주인공이라는 게 이미 있으니까 그 뿌리를 믿고서 싹은 편안하게 웃고 부지런히 뛰기만 해라. 그러면 살 길이 있지 않겠느냐.” 그런 말을 했어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사람의 마음들이 빙그르르 돌아간 거예요. 돌아가서 다 살게 됐다는 얘기죠.

그럼 그것이 우연이냐. 우연이 절대 아니죠. 모두가 여러분이 하기에 달린 거지, 우연이라는 건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요만큼 알면 나도 요만큼밖엔 얘기 못 하고 여러분들이 이만큼 알면 나도 이만큼 얘기할 줄 알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렇게 보고 듣지 않으면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거죠. 만날 고 우물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어떤 사람은 이래요. “이거는 안 된다. 절대로 이건 될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허덕이고 있는데 이거는 어떻게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얘기해요. 크나 작으나 어렵거나 어렵지 않거나 인간이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건 당신의 그 차원이지,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가 없다 이겁니다. 그건 한생각 하기에 달린 겁니다. 그건 당신의 그 살아오던 관습, 습 때문에 그런 거지, 누가 그렇게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 하고 누가 말해 주더냐 이겁니다. 어떤 사람은 “삼살방이 들어서 이사를 못 간다.” 이러거든요, 또. 그건 삼살방이 들어서 이사를 못 간다고 그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삼살방이 든 거예요.

그런데 동, 서, 남, 북이 다 터졌다 이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는 거라 우리가 벽을 뚫고도 들어올 수 있고 은산철벽도 뚫을 수가 있고, 강물도 들어갈 수 있고 허공도 날 수도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왜 그렇게 자기 사량으로 그렇게 하십니까. 진짜로 주인공을 믿고 맡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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