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멸 세계엔 ‘生滅’ 없다

존재는 연기·실상론적인 관점서
다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연기적으로는 생멸의 세계이고
실상으로 볼 때는 불생불멸이다

우리가 공부한 6근·6경·6식, 시간연기는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으로 되어 있다. 이제까지는 일체법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온에 들어오니까, 이제까지 있었던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 없어지고, 색수상행식으로 출발한다. 여기에는 6근도 없고 6경도 없고 6식도 없다. 이것은 생명체가 형상이 생기기 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몸뚱이가 어떻게 생기는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근본적인 개념이 오온으로부터 출발한다.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두 가지 속성은 무상과 무아이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무상이다.

변화로 존재 알 수 있다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의 근본적인 인식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변화로 이루어졌고, 이 변화하는 것들을 관찰하고 변화의 인식을 통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본질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했고,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술을 발효시키면 식초로 변하고, 우유를 발효시키면 요구르트나 치즈로 변하게 된다.

먼저 변화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술을 생각해 보자. 술이 발효하면 식초가 된다. 술이 식초로 변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술이 변하기 전의 밥을 A법이라고 하고 변하고 난 다음 식초가 된 상태를 B법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지금 오온을 고하고 있는 오후 5시를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오후 5시를 기해서 만약 이 술이 식초로 변한다고 하면 5시 전에 술이 있었고, 5시 이후에는 식초밖에 없다. 즉 5시를 기점으로 A법이 B법으로 바뀌었다. 무상을 설명할 때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했다. A법이 B법으로 바뀐 상태가 무상이다.
 
술과 식초
오후 5시를 기준으로 해서 5시 전에는 술이 있었고, 5시 이후에는 식초가 있다. 5시를 기준으로 없던 식초가 생겼다. 식초는 생을 했고, 술은 없어져 버렸다. 원래 있던 술은 5시를 기준으로 해서 멸했다. 5시를 기준으로 해서 없던 식초는 생했다. 여기에서 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설명을 했는데, 무상에 대한 본질적인 설명은 모든 존재는 생멸한다는 것이다. 개념 자체가 본질적으로 확실해 진다.

끊임없이 변한다는 자체가 무상이었는데,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의 출발은 생이고, 모든 것은 생겼다가 마지막에는 없어진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생멸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의 출발은 생이며 끝은 멸인 것이다. 생(生)에서 멸(滅)까지 생각한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멸(生滅)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A법에서 B법으로, 술에서 식초로 변하는 것을 우리는 없다가 생기는 것을 보고 생했다고 하며, 있다가 없어지는 술은 멸했다고 한다.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생멸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분명 5시를 기준으로 식초가 생겼고, 그 전에는 술이 있었다. 술이 없는데 식초가 생길 수 있는가? 식초가 생기려면 술이 있어야 하며  술에 의해서 그 다음 식초가 생기게 된다. 식초를 생각해 볼 때 어쨌든 술이 있어야만 식초가 생길 수 있다. 이 생멸 법에서 생각해야 될 것은 5시를 기해서 분명히 A법인 술은 멸했고, B법인 식초는 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A와 B에는 서로 연고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고관계의 형성
부처님께서는 볏단 두 개를 가지고 연고의 관계를 설명했다. 연고관계는 시간연기를 설명할 때 앞의 것이 전제 되어야만 뒤에 것이 생긴다고 했다. 이것을 연고관계라고 설명했다. 식초가 생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고관계가 존재해야 한다.

즉 식초가 생기기 위해서는 술이 있어야 한다. 술이 없이 식초는 생길 수 없다. 이 술과 식초는 연고관계가 성립해야 된다는 것이다. 연고관계가 성립하려면 볏집 두단이 동시에 있어야 된다. 두 개가 동시에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두 개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고는 연고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술이 있어야 식초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A와 B가 서로 의존한다는 연고관계를 생각했을 때 동시에 존재하지 않고도 연고관계가 가능한가. 술과 식초는 동시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존재하지 않고도 연고관계가 가능할까? 연고관계라는 것 자체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고, 즉 의지하지 않고는 연고관계가 안된다. 볏짚 두 단이 서 있을려면 볏짚 한 단에 의해서 다른 한 단이 서 있듯이 A에 의해서 B가 존재하려면 동시에 있어야 만이 연고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이 동시에 있어야만 가능한데 A에서 B로 변해버렸으므로 A는 없어지고 B가 생겼다. 여기서는 A와 B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하나가 멸 해버리고 하나가 생한다. 시간연기에서는 연고관계를 설명할 때 6식 6촉 6수 6애는 앞의 것에 연하여 뒤의 것이 생겼다. 

앞의 것이 전제되어 뒤의 것이 생겼는데, 여기에서  술과 식초와의 관계 속에서 술이 있다가 없어지고 식초가 생겼는데,  술과 식초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술이 있을 때는 식초가 없었고, 식초가 있을 때는 술이 없다.

A와 B가 어떤 한 시점에서 동시에 존재해야만 연고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술이 있을 때는 식초가 없고, 식초가 있을 때는 술이 없으니까 동시에 존재하는 시점이 없다. A법과 B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위대한 사고의 일대 전환을 시도한다.  시간적인 상황을 공간적인 상황으로 존재의 상황을 바꾸어 버린다. 시간적인 흐름을 생각할 때 항상 변화하는 과정에서 앞의 것이 있어야 만 뒤의 것이 생긴다.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인 시간과 공간에서 시간은 앞의 것이 있어야 만 뒤의 것이 나타날 수 있지만 공간은 그냥 있는 것이다.

공간의 개념으로 넘어오면 동시에 존재하는 연고관계가 성립되지 않아도 변화가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무상에서 무아를 이끌어낸다. 즉 시간의 문제에서 공간의 문제로 넘어오게 된다.

관점의 변화
시간적인 문제에서는 연고관계가 성립해야만 가능했던 것이 공간의 문제에서는 연고관계가 성립하지 않더라도 가능하게 된다. 술과 식초와 같은 변화의 존재에서 시간의 관점에서 공간의 관점으로 넘어가면서 사고의 일대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부처님 당시 대중들에게 연기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있어 최고의 묘수를 던진 것이다.

시간을 공간으로 치환해놓고 보니까 연고관계가 성립하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은 그냥 있기 때문에 시간의 연속성과 흐름에 의해서 동시에 있지 않더라도 연고관계가 성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시간적인 관점에서 시간적인 문제가 공간적인 문제로 치환되다보니까 5시를 기점으로  술이 있다가 식초가 생겼다. 그래서 술은 5시를 기점으로 멸했고, 식초는 5시를 기점으로 생했다.

시간차원서 공간차원으로 치환
인식의 대전환은 시간적인 문제를 공간적인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고의 대혁명은 시간적인 문제를 공간적인 문제로 치환하는데서 부터 이루어진다. 5시를 기점으로 공간에서 생각하니까 공간은 지하, 1층, 2층 층을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현대불교신문사 건물의 1층, 2층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2층인 위로 들어나는 세상과 1층인 아래로 내려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5시를 기점으로 위로 드러나는 세상과 아래로 내려가는 잠재된 세상으로 나누어 보니까 일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드러난 세상과 보이지 않는 잠재된 세상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5시를 기점으로 술은 잠재된 세상 밑으로 내려가 버리게 된다. 그러면 연고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상태에서 식초가 생겼고, 술은 잠재된 세상으로 내려가 멸했다. 우리가 인식할 때 잠재된 세상으로 내려가면 멸한 것이고, 눈으로 귀로 육근으로 인식할 수 있는 드러난 세상으로 올라오면 존재하고 있는 것이 된다.

드러난 세상과 잠재된 세상
드러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인식할 수 있어 존재하는 것이다. 드러난 세상에 올라오면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보이지 않는 잠재된 세상으로 내려가 버리면 멸하는 것이니다. 드러난 세상과 잠재된 세상이 서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만 하니까 없어진 것도 아니고 생긴 것도 아닌 단지 존재하고 있던 것이 내려가면 멸했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잠재된 세상으로 내려가 버리면  멸한 것이고 드러난 세상으로 올라오면 생한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멸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은 생멸이 아니고 불생불멸이다. 잠재된 세상에서 드러난 세상으로 올라오면 생했다고 하고 드러난 세상에 있던 것이 잠재된 세상으로 내려가 버리면 멸했다고 하는 것이다. 전체 구조를 놓고 보니까 불생불멸일 뿐이다.

불생불멸의 세계에서는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다. 이것은 불교의 가장 위대한 구조 중 하나이다. 존재에 대한 인식은 연기적인 관점에서도 이해 할 수 있어야 하고, 실상론적인 관점에서도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연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생멸의 세계이고 실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불생불멸이 되어 열반적정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고 살고 한다. 

끊임없이 죽고 사는 이 생멸의 세계를 법안으로 보니까 열반의 세계로 불생불멸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실상론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불생불멸의 세계를 말한다. 불생불멸의 실상으로 이해하게 되면 상주불멸의 세계가 된다.

열반경이나 묘법연화경 계통은 실상론을 바탕으로 진리의 세계를 설명한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불교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생멸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 불생불멸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생했다 멸했다하는 것이 결국 불생불멸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기를 드러난 세상과 잠재된 세상의 관점에서 이해하니 불생불멸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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