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길 20

우리는 불교를 소승과 대승으로 구분해서 보는 것에 익숙해있다. 그래서 태국이나 미얀마,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를 소승이라 부르고 중국이나 한국, 일본, 티베트 등의 북방불교를 대승이라 한다. 이러한 이원적 구조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면서 붓다의 가르침마저 소승이라 여기는 예기치 못한 오류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본래 소승이라는 말은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이 부파불교의 행태를 보고 붙인 용어다. 소승은 본래 ‘히나야나(Hinayana)’란 말로서 ‘작은 배’, 혹은 ‘열등한 가르침’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승이란 말을 남방에서는 아주 싫어한다. 문제는 지금까지 부파불교뿐만 아니라 근본불교까지 포함해서 소승으로 인식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붓다의 근본 교설마저 열등한 가르침으로 취급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불자들 스스로 붓다의 교설을 폄하하는 요즘말로 ‘웃픈’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왜 부파불교를 소승이라고 비판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부파불교가 지니고 있는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파불교는 지나치게 학문적이고 지적 재능을 갖춘 출가자 중심의 불교였다. 그들이 이론을 지나치게 중시하면서 불교의 실천성은 점차로 약화되었다. 종교의 생명력은 누가 뭐라 해도 실천에 있다. 붓다가 평생 사람들에게 강조한 것도 자신이 세운 이론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실천이었다. 그런데 부파불교는 생명력 넘치는 실천 중심의 불교를 이론을 중시하는 관념적인 불교로 변질시켰다. 불교가 모든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지식을 갖춘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이다.

부파불교는 지나치게 학문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문자를 모르는 대중들이 붓다의 가르침에 접근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깨침과 자비는 불교를 받치고 있는 커다란 두 기둥이다. 불교에서 깨침을 중시하는 이유도 이를 통해 진정한 자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파불교는 자비라는 대사회적 실천에 무관심했다. 비록 불교의 이론적 체계를 확립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지나치게 이론에 집착한 결과 중생들을 향한 자비의 기둥이 무너지고 말았다. 불교라는 거대한 건물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무너진 불교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붓다가 걸었던 길을 손에 손 잡고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부파불교는 대중들의 손을 뿌리치고 홀로 그 길을 가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있는 열반행 버스를 외면하고 자신들만을 위한 고급 승용차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만의 길을 선택했던 부파불교는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들의 한계를 지적한 사람들은 부파불교를 향해 ‘소승(小乘)’이라고 외쳤다. 여기에는 자신만을 위해서 작은 배, 작은 승용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라는 비판의식이 담겨있다. 그리고 붓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대승이라 불렀다. 대승이란 범어로 ‘마하야나(Mahayana)’라고 하는데, 모든 사람이 열반의 땅을 향해 함께 타고 가는 ‘커다란 배’, ‘훌륭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승, 대승이란 구분이 부파불교에게는 아픈 상처다.

요즘은 ‘소승’이란 용어를 잘 쓰지 않는다. 이 말 자체에 대승적 편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장로불교(長老佛敎)나 상좌불교(上座佛敎), 혹은 그들의 언어를 살려서 ‘테라(Thera)’ 불교라고 부른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 당시 부파불교의 한계를 지적한 대승불교의 입장은 정당했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 부파의 전통을 계승한 그들의 문화 전체를 소승이라 폄하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오히려 대승이라 자부하면서 사회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고, 보살행을 소홀히 하는 소승적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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