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계종의 탄생지 조계사

서울 조계사 대웅전(사진 왼쪽 위)과 앞마당. 조계종 총무원이 내려다보이는 전경사진.

1. 조계사 이전의 모습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조계사의 현주소이다. 이곳은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알고 있다. 지리적인 위치도 위치이지만 조계사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저마다 소원하는 바를 기도하면 위안을 얻는다. 주변의 직장인은 점심식사 후 이곳을 거닐며 업무에 지친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다. 요즘은 외국인들의 방문도 많아졌다. 시내에서 접근성이 수월한 전통사찰이기 때문이다.

불교혁신으로 총본산 건립 추진해
‘조선불교 선교양종 총본산 각황사’
태고사 사명변경 후 조계사로 탄생

현재 조계사는 사찰의 역할 이외에도 조계종의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 등 행정기구와 중앙종회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도심사찰의 역할과 조계종을 대표하는 조계사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조계사 위치와 규모 그리고 역할에 비해 창건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 이곳은 보성고보 자리였다. 보성고보는 1906년 9월 이용익이 설립하였고 후에 손자 이종호가 경영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종호가 해외로 망명하면서 학교경영이 어려워졌다. 그 해 12월 천도교가 학교를 인수하였고 손병희가 대표가 되어 경영하였다. 조계사 옆 조그만 숲에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표지석이 있는 것도 그런 연유이다.

그런데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천도교가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 1922년 5월 대표인 손병희가 죽자 내부 갈등이 야기되었다. 재정이 어려워지자 각 방면으로 경영자를 물색하였고 불교총무원이 학교 인수에 관심을 갖고 교섭하였다.

2. 불교총무원의 보성보고 인수

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1911년 6월 3일 제령 7호로 전문 6개조의 사찰령을 제정하였다. 이 사찰령과 동시에 전문 8개조의 사찰령시행규칙을 제정하여 그해 9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런 법령의 제정으로 일제는 행정적으로 전국의 사찰을 30본산과 그 말사로 등록케 하는 본말제도를 확립해서 주지의 임면권을 총독부와 지방장관이 장악하였다. 그리고 사찰의 폐합과 이전 그리고 재정의 처분 등 각가지 규제로 1,300여 한국불교 사찰을 지배할 수 있었다.

한국불교의 중앙조직이 된 30본산은 1912년 5월 28일 11본산의 주지가 원종종무원이 있던 원흥사에 모여 향후 30본산 주지회의를 정례화 하였다. 본산주지들은 원종종무원의 명칭을 변경하여 조선불교선교양종 각본산주지회의원으로 개정하고 규칙을 정하면서 30본산주지회의원을 출범시켰다. 그들은 10개조의 各本山住持締約을 작성하여 사찰령과 시행규칙을 준행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여 일제의 통제에 철저히 순응하였다. 이렇게 한국불교를 완전히 장악한 총독부는 1912년 6월 원종과 임제종을 해체시켰다. 이후 30본산주지회의원은 1913년 1월 5일에서 11일까지 총회를 개최하고 사법의 실시를 안건으로 다루는 등 일제의 한국불교 통제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30본산주지회의원으로 출범한 한국불교 체제는 1915년 30본산연합사무소 체제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30본산을 강력하게 통제하려는 일제의 의도였다. 총독부는 1914년부터 ‘조선각본사연합제규대강’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총독의 인가를 얻어 놓고 그 기회를 엿보다가 1915년 1월 정기회의가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총독부 관리자들이 회의에 참석하여 그 취지를 설명하고 실행을 요구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생겨난 ‘조선사찰각본사연합제규’는 1915년 1월 16일 30본산 주지회의 원장인 강대련의 이름으로 제출되었고, 2월 25일 총독부의 인가를 얻었다. 이후 30본산은 원흥사에서 각황사로 옮기고 명칭도 30본산연합사무소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30본산의 연합을 통해 한국불교를 강력하게 통제하려던 일제의 의도는 1919년 3.1운동 이후 다소 바뀌게 되었다. 조선불교청년회는 12월 16일 조선불교의 현안에 대해 논의하면서 30본산연합사무소에 8개조의 건의문을 제출하면서 30본산의 연합제규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그런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는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백양사, 석왕사, 위봉사, 봉선사, 송광사, 기림사, 건봉사 등 10개 본산 주지들과 연합하여 총무원을 세우고 그 사무소를 각황사에 두었다. 그러나 총무원 설립에 반대한 16본산은 강대련이 주지를 맡고 있는 용주사에서 30본산 주지회의를 개최하는 등 총무원과 대립하였다.

별도의 노선을 지향한 총무원은 불교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였다. 보성고보를 인수하는 일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23년 6월 총무원은 회의를 열어 소속 사찰의 재정 1/5를 총무원에 제공하여 보성고보 경영자금으로 활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천도교 측과 만나 인수, 인계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고 1924년 1월부터 경영할 생각이었다.

3. 중앙교무원 설립과 보성고보 이전

30본산의 분열을 지켜본 총독부 학무국은 지속될 경우 통제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 1922년 5월 24일 30본산 주지들을 불러 종래 30본산 연합 제도를 폐지하는 동시에 10본산이 설립한 총무원도 폐지하고 새로운 통일기관 설립을 제안하였다. 그 결과 26일부터 개최된 회의에서 30본산연합제규가 폐지되었고, 27일에는 불교중앙기관 설립에 대한 논의하여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2년 10월 15일 통도사, 석왕사, 범어사를 제외한 27본산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설립을 신청하여 28일에 인가를 받았다. 총독부의 압력과 보성고보의 운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총무원은 결국 1924년 4월 3일 교무원과 통합하여 30본산은 재단법인 중앙교무원이 되었다.

중앙교무원은 불교전문학교와 보성고보를 이전할 계획으로 1925년 5월 숭일동 북묘터 6천여 평을 매입한 후 교사를 신축하였다. 1927년 5월 건물이 완공되자 보성고보를 이전하였다. 그러나 불교계의 보성고보 경영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교전문학교 증자에 어려움을 겪자 중앙교무원은 다각도로 재원마련에 고심하였다. 예전 보성고보 자리를 매각할 생각이었지만 팔리지 않았다. 1931년에서 1935년까지 재원과 관련하여 논란이 지속되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1935년 9월 13일 보성고보를 고계학원에 양도하면서 13년간의 학교경영은 끝나고 말았다.

4. 태고사 건립과 조선불교조계종 탄생

1920년부터 본사주지들의 전횡에 맞서 정교분리와 사찰령폐지를 주장한 청년 불교인들은 불교혁신운동 일환으로 총본산 건설을 주장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1930년대에 이르러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936년 한국불교는 경남과 경북을 중심으로 연합체가 형성되더니 1937년에는 전남까지 확산되어 지금과는 다른 불교계 연합 체제를 형성하였다. 그런 분위기는 1937년 2월 열린 본산주지회의에서 통일기관 설치안으로 이어졌다. 23일 건축설계를 위한 이사회와 예산 확보를 위한 구체적이 방법이 논의 되었다. 그리고 25일에는 총본산 건설 계획이 구체적으로 담긴 교무원안을 본사주지회의에서 협의하였고, 사업 추진을 위한 기초위원 14명을 선정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지켜본 총독부는 1937년 2월 26일과 27일에 개최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총본산과 관련한 법규를 제시할 것과 총본산의 권위를 한국불교 스스로 유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런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본산 주지들은 총본산의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1937년 3월 5일 31본산 주지회의는 제1회 총본산건설위원회를 개최하여 본격적인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 명칭을 조선불교선교양종총본산 각황사로 하며 현 재단법인인 교무원은 해체하여 총본산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하였다.

지금까지 한국불교계의 주요 활동이 전개된 각황사도 매각하여 기지 확장에 사용하는 것으로 결의하였다. 이곳은 배불정책의 영향 때문에 아직까지 동대문 밖에 머물고 있던 한국불교가 1910년 10월 27일 창건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온 의미를 지닌 곳이다. 불교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 포교관계와 불교 강연 그리고 서적발간 등 여러 가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여 많은 호응을 얻은 곳이지만 새로운 도약을 위해 처분하였다.

총본산건설위원, 상임위원, 그리고 고문 등을 선출한 31본산의 총본사 건립위원회는 1937년 7월 27일 기공식을 시작해서 1938년 10월 25일에 준공되어 봉불식이 거행되었다. 1938년 10월 26일 열린 본산주지회의에서 사명과 사격을 다루고, 총본산의 사명을 북한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를 1939년 5월 22일 총독부에 신청하여 1940년 5월 인가를 받았다.

그런데 총본산의 허가와 이전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국가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다. 그리고 8월부터 총력전을 구축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시작하였다. 1939년에 이르자 총독부는 이런 분위기를 넘어 불교에 대해 예전보다 강력한 통제정책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총본산제보다 일본에서 통과된 종교단체법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에는 여러 종교가 존재하여 복잡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시행을 보류하였다.

종교단체법이 실시되지 않게 되면서 총본산 건설은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1940년 4월 寺名을 북한산에 있는 태고사를 옮겨오는 형식을 빌었다. 그해 11월 31본사 주지들이 모여서 종래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고 사용해 오던 종명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개정하였다. 마침내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산 태고사가 건립된 것이다.

총독부는 1941년 4월 23일 개정된 사찰령 시행규칙을 인가하였다. 이때 제정된 태고사법은 1941년 5월부터 시행되었고 태고사 안에 종무원이 설치되어 불교인들의 여망이었던 총본산이 출범하게 되었다.

1941년 5월 1일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산태고사 사법이 시행되었고, 6월 5일에 조선불교조계종 제1회 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종정으로 한암과, 9월 29일 종무총장 지암을 선출하였다. 10월에는 종무원 승적법 등 종회법을 심의하고 제정 반포되었다. 그리고 1942년 6월에는 조계종 종회법과 상벌법 승규법 승규법 시행세칙 등이 인가되고 시행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종단적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총본산은 비록 일제의 통제 속에서 건설되었지만 그 의미는 남다르다. 총본산 건설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근대적 의식 속에서 생겨난 종단 건립의 숙원을 이룬 것이다. 근대 한국불교 종단은 1908년 3월 6일 각 도의 사찰대표 52인이 원흥사에서 총회를 열고 세운 원종이 시작이었다. 임제종과의 갈등을 겪은 후 1912년 6월 강제로 양 종단이 해체되면서 사라졌다. 그 후 30본산 체제로 이어진 한국불교는 총본산 태고사를 중심으로 전국의 본산들이 결집되는 조선불교조계종이 세워지면서 종단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 태고사는 광복 이후 ‘조선불교조계종’이 ‘조선불교’로 바뀌고, 정화운동 후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질 때 이름이 조계사로 바뀌었지만 한국불교의 대표사찰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