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통제 속에 한국불교 지키다
일제 통제 속에 한국불교 지키다
  • 김경집 교수
  • 승인 2019.11.0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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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원 중앙선원
1970년대 찍은 선학원 중앙선원 건물 모습. 현재는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요즘 한일관계가 좋지 않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 배상에 관한 한국 대법원 판결에서 시작된 양국의 갈등이 무역, 안보, 그리고 불매운동까지 전방위로 퍼지고 있다. 여기에 정치적 상황까지 겹쳐 언제 해결될지 알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설법·강연·안거수행 등
전통방식으로 종풍 유지
범행단 통해 실천도 담보

이런 갈등의 원인은 한 세기 전 일제의 한국침략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36년간의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모든 분야에서 통제와 수탈이 행해졌다. 그런 식민지 정책에 한국불교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오히려 일제는 양국이 공동으로 신앙하던 종교인 것에 착안하여 한국에 진출하는데 일본불교를 이용하였다. 합방 이후에는 한국불교를 통제하여 식민지정책에 활용하였다.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11년 6월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제령 7호로 사찰령을 반포하였다. 이후 7월 8일 전문 8조로 된 사찰령시행규칙이 제정되어 그해 9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시행규칙 제2조에 의해 한국불교를 30본산으로 구분하였다. 각 본산은 사찰의 본말 관계, 승규, 법식, 그리고 기타의 필요한 사법을 정하여 총독의 인가를 얻어야 하였다. 그리고 30본산의 주지는 총독의 승인을 얻어서 취임하며 본말사법 규정에 의해 각 말사를 관할하였다.

1911년 11월부터 총독부는 각 본사의 제1세 주지를 차례로 인가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912년부터 각 본사는 각기 사법을 제정하고 이를 신청하여 총독의 인가를 얻었다. 그 결과 전국의 사찰을 30본산과 그 말사로 등록되는 본말제도가 확립되었다. 본말사 주지의 임면권을 장악한 총독부와 지방장관은 사찰의 폐합·이전·재정의 처분 등 각가지 규제로 1,300여 개에 이르는 한국불교를 지배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런 통제정책을 한국불교의 수준을 상승시키는 일로 선전하였다. 오랫동안 피폐했던 사찰들이 사법을 제정하고 재산보존 방법을 확립하는 등 그 면목을 일신하면서 한국불교의 존립과 아울러 보호에 완전을 기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수백 년 이래 억압되어온 한국불교의 승려는 이론 조치에 의해 불교를 신앙할 수 있는 근본이 세워졌으며,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 모두 평등하게 취급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제는 굴욕상태를 벗어나 다른 종교와 균등하게 포교의 임무를 다하며, 각자의 직책을 자각하도록 선전하였다.

이런 일제의 한국불교 지배는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한국불교 자체의 특색을 상실하고 인위적인 제약 속에서 독자적 발전의 기회를 상실한 점이다. 두 번째는 일본불교의 의례가 들어온 후 우리의 전통 의례가 변질되는 폐단이 심각하였다.

총독부가 사찰령 다음으로 제정한 법령은 1915년 8월 16일부터 시행된 총독부령 제83호의 포교규칙이다. 이 법에 의하면 한국에서 포교에 종사하며 또는 포교에 사용하는 교회당 강의소 설교소의 종류를 설립한 자는 포교규칙 시행일부터 삼 개월 이내에 각각 규정을 제출하여야 했다. 그리고 교회당 기타 포교용 건물 등에 있어서는 포교규칙 제9조에 의하여 새롭게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이런 통제에 의해 한국의 모든 종교는 포교용 건물 등에 있어서 포교종사자가 있는 본인 거주지와 포교소가 있는 소재지의 관할 부·군·도·청을 경유하여 새로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런 포교규칙에 의해 일제는 불교를 포함한 유력 종교의 통제를 위한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포교규칙은 1920년 4월 7일 개정되었다. 개정된 내용을 보면 우선 수속의 간편함과 서류 제출의 간소함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본칙에 걸려있는 벌금형을 삭제하여 포교자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새롭게 교회당 설교소 또는 강의소 등의 안녕 질서를 문란케 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될 때 그 설립자 또는 관리자에 대하여 이의 사용에 대한 정지와 금지의 규정을 첨가하여 통제의 방향은 변함없었다.

의식 있는 수행자의 선학원 창립

서울을 둘러보는 관광객에게 강북의 북촌은 매력적이다. 강남의 화려한 분위기와 달리 전통가옥과 어린 시절 살아봄직한 골목길이 주는 감성이 남다르다.

선학원은 그 북촌 가운데 있다. 중앙선원이란 현판이 붙어 있어 선을 수행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원래 1910년 설립된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어이없는 맹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대하여 생긴 임제종의 서울 포교당이었다. 1912년 임제종 사무소가 범어사로 옮기면서 동래, 초량, 대구, 그리고 서울 네 곳에 임제종 포교당을 세웠다. 한국불교의 독자적 활동을 허용하지 않은 총독부는 1912년 6월 원종과 임제종의 해체명령을 내렸다. 그 후 범어사 서울 포교당으로 사용되다가 1921년 선학원이 설립되면서 한국불교 전통을 지키는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의 통제로 한국불교의 종지와 종풍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자연히 각 본산에 있던 선원이 폐지되면서 선풍이 쇠락해졌다. 1913년 30본산 연합회에서 조사한 각 본말사의 선원은 고작 72개로 이 숫자는 일제 말기까지 별다른 증가 없이 계속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의식 있는 불교인들이 1921년 11월 불조의 정맥을 계승한다는 취지아래 선종의 중앙기관을 설립하였다. 처음부터 일제의 불교정책에 반대하여 이름도 ○○사 대신 선학원이라는 위장 칭호를 썼다.

선학원 설립에 주도적 역할은 한 사람은 범어사 포교당 포교사인 남천과 석왕사 포교당 포교사인 도봉 그리고 만공, 용성, 석두 등이었다. 요즘 옥중에 있던 한용운의 참여가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그의 참여도 알 수 있다. 대부분 민족적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어서 활동 역시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선학원을 개원하면서 초기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보살계 수계라고 하는 전통적 방법을 활용하였다. 그리고 핵심적 인물과 일부 재력 있는 신도들의 많은 희사가 있었다. 운영이 활성화 되면서 선원이 있는 지방 사찰의 재정 헌납도 이어졌다. 1924년 3월 15일 상오 10시 경성부 안국동 선학원에서 개최된 선우공제회 제3회 정기총회 때 보고된 헌납 부동산을 보면 1922년 2월 1일부터 1923년 3월 14일까지 불영사, 해인사, 표훈사 등이 부동산을 헌납하였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전국에서 선원을 운영하는 주요 사찰들은 많은 재원을 출연한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수행자들의 개별적인 재산출연도 이어졌다.

설립 직후 선학원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립적 경제의식을 촉구하였다. 1922년 3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회의를 거쳐 선풍의 진작과 전국 수좌들의 생활지원을 위해 성월, 남전, 학명 스님 등 79인의 수좌들이 발기하여 선우공제회를 결성하였다. 당시 사찰의 풍토는 수좌들의 선 수행을 지속할 만큼 여건이 좋지 않아 이를 타개해보려는 의도였다. 이후 선우공제회에 가입한 수행자가 3백 65명에 이르렀다.

선우공제회는 서무부, 재무부, 수도부 3부를 두고 적음, 석두, 만공 3인을 이사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공제회의 사무에서 회원들의 인가를 필요로 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전국 사찰에서 선출된 20명의 평의원 회의에서 결정하였다.

선우공제회는 각 사찰에 공문을 발송하여 선원을 운영하기를 권고하기도 했고, 선우공제회의 취지에 찬동하는 선려들에 대하여 회원으로 등록하고 회원증을 발부했다. 그리고 재정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유지하였다. 당시 선우공제회가 정한 유지방침을 보면 선우의 의연금 및 희사금으로 충당하고, 각 지부 선량 가운데 2할과 매년 예산 가운데 잉여금을 저축하여 공제회의 기본재산으로 설정하여 각 선원을 진흥하기로 하였다. 또한 공제회 재산의 수지 총액 예산, 결산과 같이 재정적 운영에 관한 사항은 모두 평의원의 1/2 이상 의결로 집행한 것도 선학원을 공정하게 운영하려는 합리적 방안이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학원과 선우공제회는 운영과정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924년 4월 사무소 및 기타 경비의 유지가 어렵게 되자 선우공제회는 서울에서 직지사로 이전하였다. 선학원 또한 1926년 5월 범어사에서 인수하여 범어사 포교당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선학원 재건과 한국불교 정립운동

활동을 멈춘 선학원이 다시 재건된 것은 1931년 1월이었다. 앞장 선 수행자가 김적음이었다. 만공은 한의학에 밝아 흔한 약재로 대중을 치료하면서 이름을 날리자 법호를 초부로 지어주었다. 그 역시 일제의 지배에서 자꾸만 변질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정립하려는 의지가 컸다.

재건된 선학원은 초기부터 대두된 재정적인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재단법인의 설립을 도모하였다. 법인은 1934년부터 준비하여 그 해 12월 5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인가받았다.

재단법인으로 개편된 이후 희사가 많아져 선학원의 재정상태가 좋아졌다. 1935년 선원 제4호에 실려 있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설립 당시 기부 재산자 일람표’에 의하면 만공을 비롯하여 선학원 핵심인물 16인이 전답과 건물을 기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기부된 가격이 모두 82,970원 45전에 이른다.

그 후 재정은 14만 원을 상회하도록 증가하였으며, 법인에서 경영하는 선원도 5개소에 이르자 많은 신도들과 본산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31본산에서도 찬조금을 보낼 의향이 있음을 밝혔고, 토지와 현금을 가진 신도와 승려들은 생전에 자신이 사용하다가 열반 후 수좌들의 공부를 위한 제위답으로 해달라는 찬조가 잇따랐다.

재건된 선학원은 1935년 3월 23일 수행자의 단합을 위해 선학원 대방에서 전선수좌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중앙선원 설치 건의안을 교무원에 제출하였으며, 선리참구원의 확장과 선종종규의 제정, 기타 각종 규약을 제정하려 하였다. 그리고 만공과 혜월 그리고 한암을 종정으로 선출하여 수행풍토를 강화할 수 있었다.

행정적으로 체제정비에 성공한 선학원은 당시 불교계 통일기관이었던 재단법인 중앙교무원 종회에서 수좌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사찰의 할애와 모범적 총림 건설을 위해 지리산, 가야산, 오대산, 금강산, 묘향산 등 5대 산을 요구하였다.

재기한 이후 지속적인 한국불교 발전을 도모한 선학원은 일요일마다 개최된 정기법회와 불교 기념일에 개설된 법회에 한용운, 이탄옹, 백용성 등 고승들이 일반대중을 상대로 설법과 강연을 하는 등 불교대중화에도 힘을 기우렸다.

이후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1년 3월 4일부터 10일간 고승수양법회를 개최하였다. 이 법회에는 만공을 비롯하여 34명의 청정비구들이 집결하여 선학과 계율 그리고 범망경과 유교경 그리고 조계 종지에 대해 설법하였다.

고승수양법회를 무사히 끝낸 선학원은 그런 여세를 몰아 불교계에 지계와 수행에 대한 의식을 높이기 위해 범행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고승법회의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참여자는 습정균혜의 비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범행단의 실천방향이 선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향에 있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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