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석지현 역주 해설 / 민족사 펴냄 / 2만 5천원

〈임제록〉이란 어떤 책인가?

〈임제록〉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은, 첫째, 개념과 언어로부터의 해방(不立文字)이라고 파악했다. 〈임제록〉에서는 이 모든 개념과 언어는 ‘옷(衣)’에 불과하다고 했다. 옷은 계절이 바뀌면 수시로 갈아입는다. 둘째는, 주체적인 삶이라고 파악했다. 이와 같이 〈임제록〉은 진정 견해(眞正 見解)와 수처작주(隨處作主), 즉 정안과 주체적인 삶, 이 두 가지를 갖출 것을 강조한 선어록이다. 임제 선사는 매우 준엄한 선풍(禪風)으로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공안(公案)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어디를 가든지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면 현재 서 있는 그곳이 곧 모두 진실한 곳이 된다는 뜻이다. 또 ‘무위진인(無位眞人, 아무런 속박 없는 참사람)’도 임제 선사 법문을 대표하는 명구이고,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도 유명한 명구이다.

〈임제록〉의 특징과 장점은?

〈임제록〉은 문어체(文語體, 문장체)가 아닌 구어체(口語體, 대화체)로 쓰였다. 구어체는 대화가 주류를 이루는 살아 있는 인간의 언어이고, 개념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어록은 모두 구어체로 기술됐다. 구어체에는 특히 옛 시대의 속어(俗語)가 많이 나온다. 속어란 그 당시 일반 서민들이 생활 속에서 사용하던 말(대화체)이다. 그러나 그 시대가 지나가면 그 시대에 사용하던 속어는 그대로 사장(死藏)되어 후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아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사전에조차 없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임제록〉에 유독 옛 시대의 난해한 속어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임제록〉이 구어체로 쓰였기 때문이다.

석지현 역주·해설본 〈임제록〉의 장점은 본문을 ‘11’서 ‘592’까지 단락으로 나누어 번역, 해설, 원문, 주(註) 순으로 〈임제록〉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한문으로 쓰인 원문이 부담스런 사람은 번역과 해설만으로도 〈임제록〉 요점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의 백미는 저자의 혜안이 돋보이는 해설이고, 구어체 스타일의 명쾌한 번역도 여느 번역본과 다른 이 책만의 가장 큰 장점이다.

임제 의현 선사는 누구인가?

임제선사의 법명(法名, 僧名)은 의현(義玄), 속성(俗姓)은 형(邢) 씨, 조주(曹州) 남화(南華)에서 태어났다. 젊은 날 출가해서 폭넓게 전통적인 불교경전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의 출가 당시의 나이와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임제의 고향인 조주 남화는 지금의 산동성 연주부로서 황하 하류의 남쪽 지방이다. 이곳은 임제와 동시대에 활약한 선승 조주종심의 고향과도 가까웠다.

그는 특히 법화, 화엄, 유마, 능가, 능엄 등의 경전과 유가, 유식, 화엄합론, 대승성업론, 법원의림장 등 불교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출가와 득도(得度: 具足戒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됨)를 통례에 따라 20세 무렵으로 친다면 827년서 835년(원화 연간)에 해당하는데, 이때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8)과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 화엄학이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학문이 단지 약 처방전이며 일종의 선전 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후 책을 덮어 버리고 구도행각을 시작해 황벽(黃檗: ?~850)을 찾아갔다. 하남서 태어난 임제가 무슨 이유로 머나먼 강남으로 황벽을 찾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당시 황벽은 홍주자사인 배휴(裵休: 797~870)의 후원으로 홍주 고안현에 황벽선원을 열고 많은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때가 회창년(841~846)에서 대중연초(847)에 해당하는데, 당시 임제는 황벽 밑에서 오로지 수행정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주도명(당시 황벽선원의 수좌)의 권유에 따라 황벽의 방장실 문을 두드렸다. “불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를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은 다음 대우에게 가서 크게 깨달았다. 이때의 극적 순간의 기록은 수행록에 자세히 실려 있다.

임제가 깨달은 시기는 회창의 법난이 한창 단행되고 있을 때였다. 임제는 당의 중앙정부와 대치상태에 있던 하북 진주지방으로 올라가 교화를 펴기 시작했다. 당시 이 지역의 실권자인 부주(府主) 왕상시(王常侍)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는데, 이 왕상시는 〈임제록〉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하북의 진주 임제원서 교화를 펼치는 장면은 모두 수행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때 임제의 교화를 도운 인물 가운데 중요한 사람은 반산서 온 광승 보화였다. 반산은 진주 북부지방으로서 도교 영장이었는데, 보화의 자유분방한 역할서 우리는 무위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던 신선도자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보화의 이러한 초인적인 행동은 기성불교의 권위에 맞서는 자유로운 인간상으로서, 임제가 제창한 신불교의 전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임제록〉이 후세에 끼친 영향은?

격동의 한 가운데서 그것도 혁명가들의 집결지인 하북 지방서 임제가 부르짖던 ‘반역의 외침’은 후대 선승들에게 실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임제가 입적하자 임제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그의 가르침은 임제종이라는 선풍으로 정비되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는 위산영우(771~853)와 앙산혜적(807~883)에 의해서 위앙종이 확립됐다. 또한 임제의 선풍이 정비되던 것과 거의 동시대에는 동산양개( 807~869)와 조산본적(840~901)에 의해서 조동종이 확립되었다.

당이 멸망하고 오대(五代)가 되자 운문문언(846~949)에 의해서 운문종이, 그리고 잇달아 법안문익(885~958)에 의해서 법안종이 확립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다섯 개의 선풍은 송대(宋代)로 들어서면서 난숙기를 맞았고 중국문화 전반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이 다섯 개의 선풍은 임제종과 조동종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맨 처음 위앙종이 소멸했고, 두 번째로 법안종이 없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문종이 임제종에 흡수돼 버리고 말았다. 남송(南宋) 말(末)에는 남은 두 개 종파서 각각 한 사람씩 거장이 나왔다. 조동종에서는 천동정각(1091~1157)이 출현해 묵조선(좌선 수행을 강조하는 선 수행방식)을 대성시켰고,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에서는 대혜종고(1089~1163)가 나와서 간화선(깨달음을 강조하는 선 수행방식) 운동을 전개했다. 남송 이후에는 임제종과 조동종, 이 두 개의 흐름만이 남아서 지금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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