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매년 오백대재 봉행

1443년 세종 25. 벌써 세 번째 증심사 건물을 복원했다. 광주의 대표적 사찰이자 무등산을 지키던 증심사는 늘 화마로 인해 사찰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다시 신도들의 염원으로 사찰 전각을 다시 복원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다시 화마를 피하지는 못했다.

1609년 광해군 1. 석경, 수광, 도광, 세 스님의 원력으로 네 번째 다시 건물을 지어 오백나한을 모셨다.

한국전쟁은 한국에 있는 모든 사찰을 한 줌의 재로 만들었다. 증심사도 그 풍랑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951년 증심사의 모든 전각의 전쟁의 광풍으로 불에 탔으나, 다행히 오직 오백전 만이 화재를 피했다.

그리고 그 전각은 절골이라는 무등산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되었다. 정면 3, 측명 3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단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이 건물에는 부처님의 제자 500명을 흙으로 만들어 모셔져있다.

광주명승지 1호이자 무등산 증심사(주지 중현)의 대표적 건물을 오백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오백대재가 지난 1030일 오백전 앞에서 사부대중 300여명이 동참한 가운데 봉행됐다.

행사는 자양회의 육법공양을 시작으로 영산재 의식, 축원과 함께 화마를 피한 오백나한님과 오백전의 공덕을 찬양하는 합창단의 축가가 이어졌다.

주지 중현 스님은 범문을 통해 불자님들이 일 년, 한 분의 나한님과 인연을 맺는 것은 오계와 삼귀의 수지하고, 열심히 수행하면서, 청정한 삶을 산다는 것, 자신을 낮추고 부처님을 공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회향을 맞은 신도들에게 수행을 강조했다.

1980년대 들어 완벽히 복원된 증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오백전은 대웅전 뒤에 위치해 매년 수많은 기도객들의 방문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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