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이해의 길 19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공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찰의 고요한 분위기도 좋고 모두 마음에 드는데, 책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 공부가 어렵긴 하다. 그런데 붓다 당시에도 그랬을까? 붓다는 자신이 깨친 진리를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전달하였다. 당시 불교가 인도 전역에 유행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불교가 이처럼 어렵게 된 것일까? 널리 알려진 것처럼 불교 교단은 붓다의 가르침과 계율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20여 개의 부파로 분열된다. 400여 년 동안 지속된 분열은 불교의 성격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파불교가 지나치게 학문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붓다의 말씀인 경(經)에 대한 주석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에 대한 해설서를 논(論)이라 하는데, 부파마다 독립적인 논서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이 완성되고 불교의 교리가 체계화된 반면,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워진 것 또한 사실이다. 이로 인해 문자를 모르는 일반 대중들에게 불교의 진입장벽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부파불교는 출가자 중심의 불교로 변하게 된다. 특히 출가자 중에서도 지식을 갖춘 엘리트 비구들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붓다의 말씀인 경을 연구하고 논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0여 개의 부파가 서로 경쟁하는 상황에서 지적 소양을 갖춘 비구가 승원에서 주목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자기들 부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서 작업에 집중하였다. 이런 전문적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승원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불리는 아소카왕의 사찰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부파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실재론(實在論)을 주장한다. 붓다에 의하면 모든 것은 연기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성(自性)을 갖춘 독립적 실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부파불교는 모든 것이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있다(有)고 보았다. 그들은 각각의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한의 요소를 법(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을 ‘아공법유(我空法有)’라고 한다. 예컨대 나무라는 존재(我)는 연기하기 때문에 공(空)하지만 나무를 나무이게끔 하는 최소한의 법(法)은 실재한다(有)는 뜻이다. 그들은 이러한 법을 연구하여 75개를 찾아냈는데, 이를 ‘5위(位) 75법(法)’이라고 한다. 우리들이 많이 알고 있는 5온(蘊),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5온도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입장은 대승불교에 이르러 강력하게 부정된다. 〈반야심경〉에서 ‘5온이 모두 공하다(五蘊皆空)’고 한 것도 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치게 학문적이고 출가자를 중심으로 하며 실재론을 견지하는 부파불교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부파불교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특성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불교가 어렵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3가지 문제에 집중하였다. 한 종교의 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학문적이고 지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문맹률이 90%가 넘는 상황에서 문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학문적으로 불교를 설명하는 것은 지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사람들의 근기에 맞는 가르침을 설했다.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하는데, 듣는 사람의 입장을 얼마나 배려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부파불교는 지극히 어렵고 관념적인 불교로 변했다. 대중들은 그들만의 리그로 변해버린 부파불교에 등을 돌리고 붓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 외침이 다름 아닌 대승불교 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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