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 부수고 깨달음 이룬 여성들

달마의 살을 얻은 총지 스님부터
유철마·묘신·요연 등 선종사 기록
방거사의 딸, 영조도 재가 선지식
‘일체중생실유불성’ 보여준 롤모델

영천 백흥암 선원 동안거 모습. 중국의 선 르네상스 시대에도 치열한 수행으로 정각을 이룬 비구니, 우바이 선지식들이 있었다.

‘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는 용어가 있을 만큼 서양도 양성평등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여자들은 더더욱 낮은 편이다. 근자에 우리나라 공직자 남녀 비율을 조사했는데, 고위직 공무원에 여성이 한명도 없는 경우가 있으며, 그나마 법조계를 포함해 전체적으로 여성 비율이 겨우 두 자리 수를 넘었다.

그러면 불교계는 어떠한가? 부처님 당시에는 여성(출재가 모두)들도 깨달음에 있어서는 동등하게 인정받았으나 부파불교로 접어들면서 비구니를 포함한 여성들의 하열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대승불교로 접어들어 일승(一乘) 차원에서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 나오면서 조금 완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선 르네상스 시대, 선지식 여성들이 있었겠는가? 대답은 “Yes”이다.    

총지 비구니
보리달마가 중국으로 건너온 지 9년 무렵, 인도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제자들에게 각각 얻은 바가 있는지를 말해보라고 하였다. 제자들의 대답을 다 듣고, 달마가 훗날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은 나의 진수(眞髓)를 얻었고, 한 사람은 나의 뼈를 얻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나의 살을 얻었다. 진수를 얻은 이는 (2조)혜가이고, 나의 피부를 얻은 이는 도부(道副)이며, 나의 뼈를 얻은 이는 도육(道育)이며, 나의 살을 얻은 이는 총지(總持)이다.”

여기서 달마에게 ‘내 살을 얻은 자’라고 인가를 받은 총지는 비구니로서 양무제의 딸이다. 총지의 원 이름이 명련(明練)인데, 달마로부터 ‘총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유철마 비구니
선종사에서 대표적인 비구니로 ‘쇠맷돌’이라 불리는 유철마(劉鐵磨)가 있다. 그녀의 이름에서부터 범상한 비구니가 아님을 의미하는데, 그녀의 선풍(禪風)이 매우 예리하고 험준해 사람들이 그녀를 유철마라 불렀다. 유철마는 위앙종의 위산 영우(쓳山靈祐, 771~853)의 가르침을 받았다. 평소 유철마는 위산영우 선사 곁에 가서 가르침을 받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유철마가 위산 선사를 찾아왔다. 위산이 먼저 인사했다. 
“어이, 늙은 암소! 자네 잘 왔는가?!”

철마 비구니가 말했다. “내일 오대산에서 대법회가 있다는데, 화상께서도 가십니까?”

그러자 위산 선사는 네 활개를 펴고 벌렁 누워 버렸다. 유철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을 돌려 가버렸다.

참고로 위산은 호남성(湖南省), 오대산은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해 있어 두 산은 수천리 떨어져 있다. 유철마가 위산 아래에 살 때, 총림에서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수행력이 높았다고 한다.

하루는 자호(子湖) 선사가 멀리서 찾아와 말했다. “소문난 맷돌 스님 아니신가요?”유철마가 말했다. “외람됩니다.”

“맷돌은 오른쪽으로 도는가?왼쪽으로 도는가?”
“스님께서는 망상하지 마십시오.”

이 말에 자호 선사는 유철마를 갑자기 손으로 때렸다. 

묘신 비구니·남대낭자
위앙종의 2조인 앙산 혜적의 제자 가운데 비구니 묘신(妙信)이 있다. 사찰에 외교관이나 다름없는 소임자가 갑자기 하산했다. 혜적이 고민한 뒤에 이전에 믿음직하게 보았던 묘신 비구니에게 중요 소임을 맡겼다. 앙산이 외출하고 돌아온 승려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니, 모든 대중이 찬성했다고 한다. 

그녀가 중책을 맡은 지 얼마 안되어 사천성에서 17인의 승려들이 앙산에 도착했다. 마침 해가 기울여 비구 절에 가지 못하고, 묘신이 머물고 있는 암자에 들어왔다. 17인의 승려들이 법을 논하는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다. 결론이 나지 않고, 분분하자 묘신이 중얼거렸다.

“17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모여 있으면서 불법 입구에도 들어가지 못했군. 이렇게 몰려다니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한 승려가 듣고는 승려들에게 전했다. 스님들은 상의를 하여 그 비구니에게 법을 듣기로 하였다. 그녀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스님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 스님들은 그녀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이끌려 묘신이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그것은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마음이 움직인 것도 아닙니다.”

묘신은 혜능이 답한 ‘마음이 움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라는 것에 집착하면 ‘마음’이라는 관념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승려들은 그녀의 말에 감동한 바가 있어 앙산의 도량까지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묘신에 대한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도겐(道元)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예배득수(禮拜得髓)’에 전하는데, 도겐이 어떤 자료를 인용한 것인지 밝히지 않아 출처가 불분명하다. 아마도 도겐 선사는 일본의 비구니와 여성 신도들이 귀감을 삼도록 소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위앙종에는 묘신 이외에도 정씨 성의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위산 영우에게 참문하여 많은 문답을 통해 날카로운 선기禪機를 표했다고 한다. 후에 출가하여 대안(西院大安, 793~883, 위산과는 사형사제)의 법을 이었는데, ‘남대(南臺) 낭자’의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선림유취>에 전한다. 

말산 요연 비구니
당대의 서주(瑞州) 말산요연(末山了然) 비구니는 고안 대우(高安大愚)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말산이 임제 의현의 제자인 관계 지한(灌溪志閑, ?~859)과 선문답을 한 뒤에 관계 지한이 요연 비구니를 스승으로 예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관계 스님이 행각할 때, 말산 요연을 찾아가 말했다. “대답하면 머물 것이요, 대답하지 못하면 선상(禪床)을 뒤집어 버리겠다.”

요연이 법상에 오르니 관계 스님이 참문하였다. 먼저 요연이 물었다. “오늘 어디서 떠나 왔습니까?”

“길 어귀요.”
“왜 일산을 쓰지 않았습니까?”

관계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절을 하고는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말산인가?”
“정수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말산의 주인인가?”
“남자의 모습도 여자의 모습도 아닙니다.”

관계가 할을 하고는 말했다.
“왜 변하지 않습니까?”
“신(神)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거늘 뭣 때문에 변해야 합니까?”

이 말에 관계 스님이 굴복하고, 그 곳에서 3년 동안 원두園頭 소임을 살았다고 한다.

실제 비구니
당나라 때에 ‘일지선(一指禪)’으로 유명한 구지(俱瀜) 선사가 있다. 구지 선사는 법을 묻는 누구에게나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고 하여 그의 선을 일지선이라고 한다. 구지 선사가 젊은 시절, 아직 공부가 미치지 못한 채 암자에 홀로 살고 있었다. 이 무렵, 실제(實際) 비구니가 찾아왔다. 그녀는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구지 선사의 선상을 세 바퀴 돌고는 주장자를 선사 앞에 우뚝 세우며 말했다.


“화상이여! 한 마디 일러보십시오. 그러면 삿갓을 벗겠습니다.”
비구니가 세 번이나 물었지만 구지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실제가 말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군.”

이렇게 말한 뒤 뒤돌아 가려고 하는데, 구지가 말했다. “날도 저물었으니 하루 묵고 가십시오.”

실제는 ‘말할 수 없다면, 떠나겠다’며 홀연히 떠나버렸다. 이후 구지가 탄식을 하고 지낸지 열흘 무렵쯤, 천룡(天龍) 화상이 처소에 왔다. 구지가 천룡에게 자신의 근황을 말하자, 천룡이 구지에게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제서야 천룡의 손가락 하나에 깨달음을 얻었다.(법맥을 보면, 마조-대매법상-천룡-구지)

구지가 발심하고 정각을 이루는데, 실제 비구니는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이 실제 비구니는 선종사에서 조사선의 개조(開祖)인 마조(馬祖, 709~788)의 제자이다.   

방거사의 딸, 영조 
마조가 강서성(江西省) 건주(?州) 공공산(?共山) 보화사(寶華寺)에서 법을 펼 적에 남전·백장·염관 등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다. 방거사와 딸 영조도 마조가 보화사에 머물 때 귀의했다. 보화사 도량에 제자들의 이름을 딴 ‘등은봉송(鄧隱峯松)’, ‘영조여련(靈照女蓮)’ 등 유적이 전한다. 방거사 가족은 대나무로 생업을 이어가며 청빈하게 살았다. 특히 딸인 영조는 아버지의 경지를 능가했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이다.


방거사가 입적에 들려는 즈음, 딸 영조에게 말했다. “인생이란 꿈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다. 너는 네 인연을 따라 살아가도록 해라.”

그런 뒤 방거사는 영조에게 말했다. “해 그늘을 보아서 정오가 되거든 말해 주어라.”
한참 후에 영조가 말했다. “일식이에요. 아버지, 어서 나와 보세요.”

방거사가 밖으로 나가니, 일식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방으로 들어오니, 딸 영조가 평상에 올라가 죽어 있었다. 방거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 딸이 솜씨가 빠르구나!”

방거사는 딸의 장례를 위해 죽음을 일주일 연기했다가 일주일 뒤에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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