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참회… 계율 청정 수행자 ‘감동’

이른 아침 옹기종기 모인 스님들
서로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 의식
존경·배려, 공동체 유지의 원동력
빠옥 총림은 엄격하게 계율 지켜
지계 바탕돼야 韓불교 정화 가능

이른 아침 선방에 도착하면 미얀마 스님들이 여기저기 옹기종기 쭈그려 앉아 무언 가를 중얼거린다. 이는 서로에게 참회와 축원하는 내용들이다. 계율에 따라 청정하게 사는 스님들의 모습이 감동스럽다.

오늘은 빠옥 선원에 도착한지 11번째 날(2012년 2월 1일)이다. 간밤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잤다. 현재의 공부와 관련하여 확인 차 호흡 수행에 관한 경전을 또한 잠깐 들여다본다. 같은 방의 한국 요기는 쉐오민 선원에서 출가하여 탁발도 하는 등 약 3개월 수행을 했다. 하지만 이곳으로 떠나올 때 비구계를 반납하는 환계 의식을 하고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왔다고 한다. 31살의 나이답지 않게 좌선에 열심이고 진지하다. 그는 3시 30분 새벽 좌선을 알리는 긴 목어 소리가 울리기 전에 일어나 선방에 오른다. 끝나는 6시에 다른 사람은 모두 내려가도 그는 여전히 몰입해 앉아있다.

이른 아침 선방에 도착하면 미얀마 스님들이 여기저기 옹기종기 쭈그려 앉아 중얼중얼 거린다. 처음에는 뭔지를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두 명, 세 명 서로 머리를 맞대고 오늘 아침에 이르기까지 잘못한 점을 서로 고백하고 참회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이는 마하시에서도 외국인 숙소를 관리하는 스님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스님이 아침에 그 같은 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스리랑카의 의식도 있다. 그제 공양청에서 만난 스리랑카 스님이 미얀마와 다른 스님 간 정형화된 덕담과 참회문을 적어주었다. 부처님께 올리는 예를 미얀마나 스리랑카 모두 비슷하지만 스님간의 인사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빠알리와 함께 영어로 번역해 왔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Namo Buddhya)”를 선창한 후 먼저 법랍 낮은 스님이 법랍 높은 스님에게 “스님, 나에게 존경을 표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법랍 높은 스님이 낮은 스님에게 “그대에 행복이, 그리고 열반을 성취하기를” 말하면, 법랍 낮은 스님은 “스님이시여, 제가 성취한 복덕을 기뻐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면 법랍 높은 스님은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대의 공덕을 축하합니다”라고 하며 법랍 낮은 스님은 “스님께서 성취한 공덕을 나에게도 나누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한다.
법랍 높은 스님은 “아주 좋습니다! 그와 같은 공덕에 스님도 기뻐해주길 빕니다”라고 하면 법랍 낮은 스님은 “아주 좋습니다! 나는 스님의 공덕을 기뻐합니다. 만약 나에게 있어 신체적 언어적 그리고 생각에 있어 잘못된 점이 있다면 용서를 빕니다”라고 한다.
법랍 높은 스님은 “내가 그대를 용서하는 것처럼 그대도 나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 법랍 낮은 스님은 “아주 좋습니다! 스님을 용서합니다”라고 답한다.
법랍 높은 스님은 “그대에게 행복이, 열반을 성취하기를”라고 축원한다.

수행 공동체는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부단히 실현하려는 행동규칙이 있다. 그래서 승가이고 공동체이다. 구성원들 간에 항상 서로에 대해서 존경과 배려를 보이는 것으로, 부처님은 구성원 사이의 화합을 강조하기를 마치 “우유와 물이 섞이는 것처럼 친절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함”을 여러 곳에서 설하고 있다. 하심을 가지고 감사의 마음으로 살 때 갈등과 대립과 같은 다툼은 없을 것이다.

아침 공양 시간보다 좀 일찍 가서 어제 마하시 선원에서 온 한국 요기의 식기를 챙겨주었다. 오늘도 스님들은 음식이 든 발우에 화려한 난 한 묶음, 또는 백장미나 국화를 공양물로 들고 이동한다. 부처님께 올리는 것처럼 스님들께도 올리는 꽃 공양이 아름답다. 아마 인류 역사에서 존경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는 문화는 불교가 선두에 있고 가장 일반화된 문화이지 않나 생각해 본다.

점심공양 이전에 잠깐 도서관에서 확인해 볼 것이 있어 올라갔더니 한국 출신의 상좌부 스님(Saddhama)을 만나 3호실 다른 한국 요기에게 안내했다. 젊은 요기는 스님에게 정성스런 삼배를 올리고 반가워한다.

도서관에서 한국 젊은 여성 요기가 초기경전을 빌려간다. 잠깐 눈인사를 나누고 아랫절에 한국 여성 수행자가 몇 명 있는지를 물으니, 비구니 스님 11명과 재가자는 자기 혼자라고 한다. 식사를 하러 길을 가는데 3호실 요기가 개울가로 간다. 이유인 즉 목욕탕에 살고 있는 개구리를 잡아 방생하기 위해서란다. 착한 마음씨이다. 항상 남을 배려하고 겸손하고 활력이 넘친다. 그런데 그 개구리는 나도 5~6일전에 보아왔다. 1m80cm가 넘는 높이의 수도꼭지 끝에 사는데 샤워하려고 무심코 옷을 걸어두었다가 보니 개구리가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신기하기만 했다.

어떻게 이 높이에 그것도 수도꼭지 끝에 처소를 마련하고 사는지? 처음에는 누가 장난으로 옮겨다 놓았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개구리 표정이 제 집처럼 너무 자연스럽다. 카메라를 가져와 사진을 두어 장 촬영했는데, 같은 방 요기가 하는 말이 이곳 개구리는 타일 벽도 잘 타고 올라간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마하시 선원에서 온 요기에게 “아! 그 개구리, 목욕탕에서 사는 것 같은데요”하니 개울가에 방생하기를 멈칫거린다.

점심 공양을 위해 줄 서 있는데 수행점검 인터뷰 해주시는 꼬비다 스님이 갑자기 나타나 나에게 ‘선(禪)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Jhanas)’이라는 제목의 앞 뒤 한쪽 자료를 내민다. 니끼야에서 나오는 선정의 중요성에 대한 자료이다. 너무나 큰 신경을 써 주심에 감사한다. 나 또한 이미 이전에 대부분 확인한 경전 구절이지만, 그래도 여기서 다시 보면서 재검토가 필요한 경구일 것이다. 오늘 점심 공양은 유럽 여성 요기가 보시한 것인지 탁발 행렬의 마지막에 서서 사과 하나씩을 각각 나누어준다.

이곳 스님들은 각자 자기 수행과 공부를 한다. 다른 어른 스님을 모시기 위해 따라다니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른 스님들이 움직이는데, 항상 시자 스님 등이 함께 하는데, 이곳에서는 각자 홀로이기에 누가 큰 스님인지도 잘 모른다.

마하시 선원에서도 선원장 스님이 79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선원 여기저기를 끊임없이 구감하는 데 항상 혼자이시다. 한국의 젊은 스님은 이 점이 크게 인상적이어서 우리와 이곳 불교와 큰 차이점처럼 가끔 이야기했던 것이 다시 생각되어진다. 점심을 마치고 설거지 또한 끝내고 내려오는데 듬성듬성한 백발의 스위스 요기가 엎드린 채 젊은 유럽인과 함께 두꺼운 청테이프로 공양청에 깔린 카페트를 움직이지 않도록 붙이고 있다.

보통 유럽인이 신앙심 없이 명상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 요기는 부처님 사진을 좌선하는 곳에 모시고 있다. 다른 이들의 편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솔선수범하는 그의 신심에 존경이 간다.

거처로 걸어오면서 생각해본다. 우리나라에 있어 문제, ‘대승불교의 위기’ 그리고 ‘화두선의 위기’라는 말을. 사실 이 문제는 계율의 문제와 관련하고 있음을 새삼 다시 느낀다. 인도불교사에 있어 단일한 불교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 분열한 데에는 계율의 문제에 따른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 등의 학계는 지계 중심으로 상좌부를 보수적, 대중부를 진보적이라고 평가한다.

문제는 그렇게 진보적이라던 대중부는 세계 불교사에 있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현재까지 면면히 불교를 지탱해오고 있는 부파는 다름 아닌 상좌부라는 점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계율의 수정과 탄력적인 적용을 주장했지만 그러한 부파는 생명력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침체하다가 끝내 단절되었다는 것은 역사에서 본다. 아마 계율의 예외는 다시 예외를, 끝없이 예외를 허용하여, 끝내는 존립기반의 정신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많다. 더 큰 문제는 한국불교는 구체적인 계율조항과 이에 대한 일상에서 실제 적용조차 모를 정도이다.

빠옥 총림에 지내다 보면 다시 상좌부와 대중부와 같은 국면을 보게 되는데, 이곳 스님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율장에 나온 대로 부처님 계율을 잘 따르는 것으로 자부심이 넘친다. 비구 스님들도 그러하지만 사미 스님들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툰 영어이지만 “도회지 스님은 담배도 피우고, 꽁도 씹고, 돈도 직접 받고, 오토바이도 타는 스님도 있다”는 등을 거론한다. 이러한 거론으로 계율의 긴장 수준과 자부심 또한 보여준다. 현재 미얀마에서 빠옥 총림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기로 유명하다.

정기적인 계율 교육도 보아왔지만 특히 돈 문제에 있어 분명하다. 스님들이 돈을 받지도, 소지하지도 않는다. 돈이 필요하면 종무소의 재가자나 정인을 통해 처리하도록 한다. 멀리 대중교통을 타고 외출해야할 경우 재가자가 버스표 등을 구입하여 갖다드린다. 스님이 생활필수품을 말하면 또한 구입하여 갖다드린다.

마하시 선원에서도 스님들의 경우 돈을 직접 만지지 않고, 가사의 한 귀퉁이에 얹어 놓게 하거나, 부채에 올리게 하는 스님도 있음을 보았다. 계율과 관련하여 역사적인 성찰은 흥미롭게도 계율을 잘 지키는 빠옥 총림이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 청정성이 널리 알려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마하시 선원에서 만난 한 한국 스님은 한국불교를 정화하겠다는 그동안의 어떠한 방안이나 주장도 본질과 먼 이야기라고 단언한다. 계율 수지를 근본적으로 결사하지 않는 한 결코 한국불교의 정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계율만 온전히 지키는 모습만 보여주면 저절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여기 와서 보니 한국불교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부쩍 드는 것 중의 하나는 20대 후반이나 30대의 사람들이 불교 공부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만난 이들 가운데 더러는 출가를 하여 아직 세상의 때가 타지 않는 듯 시원하고 맑은 기운이 가득하고, 공부에 또한 열의가 있다. 멀리까지 나와 4~5년 이상의 출가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언어 또한 배우려는 의지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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