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 인식하면 ‘시간연기’ 이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간다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무상’
무상의 기본 속성은 변화이다

그림. 강병호

시간과 공간은 원래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태초에 나타난 것이 ‘공간’이며 나타난 것의 움직임이 ‘시간’이 되는 것이다. 시공간이 하나라는 것을 증명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16살 때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서 물체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라는 화두에서 출발된다.

‘촉’은 산스크리트어로 말하면 스파사 즉, 충돌이다. 부딪치는 것이다. 6근·6경·6식이 결합하여 부딪쳐 촉이 이루어진다. A에서 B로 변했을 때 변하기 전 A가 나 자신인가? 변하고 난 후의 B가 나인가? 충돌이 일어나기 전의 나를 나로 인식할 것인지 충돌이 일어난 후 나를 나로 인식할 것인지 여기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갈등하는 기본의 바탕은 충돌 때문이다. 근본적인 의식의 저변에는 분명히 충돌이 일어나기 전을 나라고 했는데, 이 충돌이 일어난 후의 나를 나라고 할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촉에서 변화를 바탕으로 갈등이 생긴다.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충돌하기 전과 충돌하고 난 후의 가장 극한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충돌 전의 나의 가장 극한 상황은 분명히 살아있었는데 충돌 후의 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 상황이다. 죽음 전의 상황과 죽음 후의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 많은 상황 중에 가장 극한 상황은 충돌 전후이다.

충돌 전에는 살아있었으며 충돌 후에는 죽어버렸다. 이 문제에서 분명히 충돌 전의 나를 인식하면 충돌이 일어나기 전의 어제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충돌이 일어난 후 오늘의 상황도 생각해 보자. 충돌 전의 어제와 오늘을 생각해 봤을 때 충돌 전의 어제는 오늘 생각해 보면 어제의 일인 것이다. 어제 일어난 일은 대부분 기억한다.

나는 어제가 있었던 것을 인식한다. 충돌 전후를 생각해 보니 충돌 전이 어제였다면 충돌 후는 오늘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을 생각해보니 어제는 있었다고 인식한다. 하루하루가 조금씩 흘러가서 바로 죽음 직전의 상황을 생각하면 죽음 직전은 살아있을 때의 어제이고 죽고 난 다음이 오늘인 것이다.

촉에 대한 이해
충돌 후의 나는 죽었고 충돌 전의 나는 살아있다. 그러면 충돌 후 내가 충돌 전을 인식한다면 분명히 내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분명히 어제를 인식했었는데 만약 마지막 충돌의 극한 상황인 죽음을 사이에 두고 생각해보면 충돌 전의 어제가 있었다고 인식한다면 전생이 있다고 인식할 수 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내가 분명히 살아있는 삶을 안다면 그것은 전생이다. 충돌 전의 어마어마한 극한 상황에 의해서 그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급격한 충돌 상황에 의해서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제는 기억하고 10년 전도 기억한다. 이 몸뚱이를 받아서 살았던 오래 전은 어느 정도 기억한다. 충돌의 극한 상황이었던 죽음에서 생각해 보자. 죽음을 경계로 해서 그 전에 있었던 것을 만약 기억한다면 전생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 충돌의 문제는 전생 유무까지 확장된다.

간혹 전생을 아는 사람이 있다. 스티븐슨 박사는 1975년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전생을 기억하는 1300명의 사례를 모았다. 우리는 본래 전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또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스티븐슨 박사는 1300명의 사례를 모아서 책으로 출간했다. 내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전생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스마일이라는 아이가 있다. 그는 태어난 마을에서 3~4살이 될 때까지 마을을 떠나 본적이 없는데 자꾸만 자기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면서 자신의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태어나서 집을 떠나 본적이 없는데도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까지 말하면서 우겼다. 아이의 말을 듣고 알아보니 약 50리 떨어져 있는 곳에 실제적인 지명의 마을이 존재하였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그 마을로 갔다. 마을에 있는 어떤 큰 집에 들어가서 자기 집이라고 하였다.

기록에 보면 이스마일은 전생의 빚을 이생에서 받았다고 한다. 전생에 빌려준 돈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몸을 바꾸기 전에 그 마을에 사는 A씨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그 A씨는 이스마일이 죽어버리자 돈을 갚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찾아와서 어느 때 자기한테서 돈을 빌려 가지 않았느냐 하면서 죽은 그 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왜 돈을 갚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래서 전생에 빌려준 돈을 이스마일은 받아 낸 것이다.

린포체 신앙에 대해
티베트에서는 유명한 린포체 신앙이 있다. 뛰어난 수행승들은 자기가 죽었을 때 다시 환생할 것을 예언한다. 이것이 림포체 신앙이다. 현재 티베트의 법왕인 달라이라마도 린포체 중에 한사람이다. 달라이라마 같은 린포체가 10명 정도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달라이라마가 16세이니까 죽고 죽기를 16번해 환생한 것이 된다. 1984년에 예시 린포체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반하였는데 이듬해 스페인에서 오셀히타라는 아이로 환생을 하였다. 아이는 2살이 되던 해에 다람살라로 데려가서 키워지는데 이때 달라이라마는 “이 아이가 예시 린포체의 환생이라는 것은 96%정도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이 아이가 1985년에 태어났으니 현재 35살로 린포체로 티베트에서 교육받으면서 살고 있다.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자신만 아는 어떤 비밀을 만들어 놓고. 예를 들어서 경전을 혼자만 아는 곳에 숨겨 놓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숨겨 두었다가 다시 태어나서 즉 환생하여 그 보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전생에 자신이 숨겨둔 것을 다음 생에 태어나서 찾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린포체가 된다.

시간 연기에 대해
광주 비엔날레에서 북한의 천재화가인 네 살 된 오은별의 그림을 전시한 적이 있었다. 세계그림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전생이 없다면 그림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는 어린아이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림을 어떻게 그렸겠는가? 우리가 잘 모른다고 해서 전생이 없는 것일까? 분명히 전생이 있는데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바로 6촉의 가장 극한 상황인 죽음 즉, 죽음과 삶의 경계가 6촉의 극한 상황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촉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억한다. 이것이 강하게 부딪쳐서 일어나는 세계는 바로 어제 일어난 것과 10년 전의 것은 기억하지만 극한 상황인 죽음. 다시 태어나기 전의 상황은 기억하지 못한다. 촉의 극한상황에서 나의 모든 의식이 깨어져버린다. 그래서 기억을 못한다. 식이 맑은 사람은 전생을 기억할 수도 있다. 식이 맑은 사람은 그 전생의 업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6촉은 기본적으로 부딪침이다. 감정의 부딪침, 육신의 부딪침, 모든 것의 부딪침에 의해서 촉이 일어나고 연이어 일어나는 것이 육수이다. 부딪친 다음에 느낌이 온다. 그 느낌은 우리에게 상을 만들어 애욕으로 저장된다. 항상 촉은 느낌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 느낌에 의해서 촉에 대한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이다. 어떤 촉이든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좋은 촉은 지속적으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나쁜 촉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애’로 ‘육애’이다. 육애는 갈애로 느낌에 의해서 항상 좋은 감정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몸뚱이를, 의식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애욕이 모든 것의 뿌리가 된다. 애욕이 어떻게 생길까? 바로 육근으로 부터 시작한 갈애는 다른 것이 아니라 3개의 속성인 탐진치인 것이다.

그런데 시간연기는 연하여 일어난다고 했다. 앞에 것에 연하여 뒤에 것이 일어난다. 역으로 앞에 것이 없으면 연하여 뒤에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항상 앞에 것에 연하여 뒤에 것이 따라서 일어난다. 육촉에 연하여 육수가 생긴다. 육수가 일어나면 육수에 연하여 육애가 일어난다. 느낌에 의해서 육애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느낌에는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고 좋은 감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한다. 이것에 의해서 갈애가 생긴기며 애욕이 생긴다.

애욕의 덩어리가 ‘진’이고 ‘치’이며 ‘탐’이다. 물질적인 욕망을 포함하여 우리로 하여금 탐욕을 만들어낸다. 감정적인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진애 즉 화내는 마음인 진심을 만들어 낸다. 두 개를 합하여 모르는 것이 치심을 만들어 낸다.

앞에 것에 연하여 일어나는 시간연기는 육근, 육경, 육식, 육촉, 육수, 육애까지다. 6경의 기본적인 속성인 무상이 육수에 의해서 변했는데 이 변화에서 6식이 6촉으로 변화한다. 이 충돌의 끝인 갈등의 가장 복잡한 형태에서다 깨트려져 앞의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몸을 받아서 다시 태어났을 때 대부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극한 상황의 충돌 때문이다. 거꾸로 전생을 기억하려면 육촉에서 식이 맑으면 극한 상황인 태어나기 전 모태속의 나와 그것을 넘어선 것까지 기억해 나가면 바로 전생이 기억된다. 혹 최면을 걸어서 전생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무상, 시간의 속성은 일단 끊임없이 흘러간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없다. 끊임없이 변해간다. 이것이 바로 무상이다. 무상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화이다. 식은 끊임없는 변화를 바탕으로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기본적인 속성이다. 그래서 바르게 인식하는 식에서 충돌이 일어났는데 죽음과 삶의 경계 속에서 갈애가 생겨난다. 부딪침 다음에 느낌이 생기고, 느낌에 의해서 갈애가 생긴다. 시간연기의 흐름에 의해서 무상을 인식하고 나면 갈애는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시간연기는 무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거꾸로 무상을 인식하면 갈애가 소멸되고 이것이 바르게 변하게 된다. 갈애가 변해버리면 계정혜가 되는 것이다. 갈애가 좋은 쪽으로 제대로 변해버리면 탐진치가 계가 되고 정이 되고 혜가 된다. 계가 따로 있고 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탐을 바르게 잘 써면 바로 계가 되는 것이다. 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진을 잘 써고 잘 절제하면 정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캄캄한 방에 촛불을 가지고 와서 불을 밝히면 어둠이 없어져 버린다. 바로 이 원리와 똑같은 것이다. 시간연기의 속성과 흐름을 이해함으로써, 시간적 연기에 대한 기본적인 속성과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시간연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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